다투지 말아야 할 장소‘손자병법’ ‘구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손자병법’에 관한 주석을 모아 놓은 책 ‘십일가주손자 十一家注孫子’에서는 이를 두고 “크게 이득이 안되는 땅을 다투어 얻었다가 잃는다면 차라리 다투지 않는 쪽이 났다”고 하였다.성 하나, 작은 땅 한 곳의 득실을 따지지 말고 적의 생산 역량을 소멸시키는 데 역점을 두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총체적인 전략목표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일부 지역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617년,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李淵)은 수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는 잇달아 곽읍(霍邑.
법가의 인치는 법에 따른 집행이고 유가는 법보다 예를 중시하다.법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인류 전체가 추구해온 가장 기본적인 통치 형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대 중국은 법가사상이 극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제가 완비된 국가를 실현하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입이 바로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법가의 법이 양성한 것은 인치(人治)의 인재들이었고, 유가가 배양한 것은 치인(治人)의 인재들이었다.진(秦) 양왕(襄王)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신령을 찾아가 양왕이 빨
‘손자병법’ ‘구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산지(散地)’란 제후가 자기 영역 안에서 적과 작전할 때 위급하면 병사들이 쉽게 도망갈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산지무전’이라 해서 절대 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적이 쳐들어온다는 것은 적이 전력이나 기세 면에서 자신의 우세를 믿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비하는 쪽은 상대적 열세에 놓인다. 그렇기에 ‘산지’에서의 작전 책략은 지나치게 급한 결전을 피하고 수비 태세를 취하여 서서히 적의 역량을 소모 시키다가 기회를 엿보아 적을 섬멸시킬 것을 요구한다. 옛사람들은 ‘전(戰)’을
고대 중국 역사는 남방에 文人, 북방에 皇帝가 많이 난다는 말이 있다.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이후로 중국의 시인이나 문인, 화가들은 대부분 강남에서 배출되어 강남재자(江南才子)라는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는 고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중국 현대문학사를 장식하고 있는 노신(魯迅)이나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파금(巴金), 노사(老舍) 등 유명 작가들의 절대다수가 남방 출신이다.또 재미있는 것은 봉건 황제들이 거의 북방에서 났다는 사실이다. 시황제(始皇帝-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인 진 나라를 건설한
‘손자병법’ ‘구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경지(輕地)’란 군대가 적지에 그다지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지역을 말하는데, 본토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위급하면 가볍게 얼른 돌아갈 수 있기에 ‘경지’라 한다. 일찍이 손자는 오왕의 질문에 대해 “군대가 적의 땅에 진입했는데 적이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으면 병사들이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물러나고 싶어 하기에 쉬이 싸우려 하지 않는 곳을 경지라 합니다.”고 대답한 바 있다.대대적으로 적국을 침입한 군대는 군사상의 우세를 믿고 적의 허점을 틈타려고 한다. 따라서 일단 전투가 시작
모택동과 장개석 정치적 행보가 매우 다른 두 사람도 그를 존경했다.중국 청나라 말기 때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증국번(曾國藩-1811~1872)은 대단히 신기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성상(聖相)이라 일컫기도 하고 원흉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인격이 갖는 양면성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를 칭찬하자면 성인에 가까운 재상이라 할 수 있고, 비난하자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기 때문에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건 간에 그는 근대 이후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아왔다. 물론 이러한 추앙은 정치적인 면이 아
‘손자병법 구변편’에 “비지(圮地)에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말이 있다. 또 ‘구지편’에서는 “산림이나 험준한 곳, 또는 늪이나 연못 등이 있어 행군하기 어려운 곳을 비지라 한다.‧‧‧‧‧‧비지에서는 아군의 행진을 빨리하여 신속히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군대가 비지를 지날 때는 신속하게 통과해야지 멈추어서는 안 되며, 이런 지형에 군영을 치고 주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이 비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을 가하고 있다. 조조는 “비지란 물 때문에 허물어진 곳을 말한다”고 했다. 또한 이전(李筌)은 “땅 아래를
모든 서생이 다 무능하고 계책이 없지는 않았다.다양한 장군의 품격 가운데 최고의 경지는 역시 유장(儒將-선비 출신의 장수)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무를 겸비한 유장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여 그만큼 인격적 매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진정한 유장이 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스스로 유장임을 표방한 인물이 무수히 많았지만 진정한 유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인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손자병법’ ‘구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로가 교차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공격하기에도 편하고 적군이 와서 공격하기에도 편한 곳을 교지(交地)라고 한다.” 즉,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을 교지라 한다. 이어서 손자는 교지에서의 작전 원칙에 대해 “교지에서는 각 부대 사이의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교지에서 내 쪽은 수비를 신중히 해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교지에서는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뜻의 ‘교지무절’은 여러 갈래의 도로가만나 왕래가 빈번하고 사통팔달이며 막거나 끊을 수 없는 곳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서생이란 호언장담만 하고 실천과 경험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학문이 깊고 넓은 인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요즘 윤석열의 난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제 일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파렴치한 난동의 종말은 결국 그가 몸담았던, 검찰을 근본부터 회생 불구로 망쳐놓고, 그도 모자라 정치권마저 망칠 조짐이다.기원전 270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위나라 사람 범저(范雎)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제시한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 즉, 이해가
용소무애(用少務隘)적으면 협소한 지역을 택한다.‘용중무이(用衆務易)’와 상대되는 말로, 역시 ‘오자병법’ ‘응변(應變)’에 나온다.소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좁은 곳에서 적과 싸우려 한다.‘백전기법’에서는 “적의 수가 많으면 어두워졌을 때나, 무성한 풀숲에 복병을 숨기거나, 계곡 입구의 좁은 길을 막고 적을 공격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이 책략은 고대 전투에서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는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중요한 원칙이었다.일반적으로 산악이나 밀림, 깊은 늪지대나 험한 계곡에서는 대부대
진정한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제나라에 도착한 손빈은 먼저 몇몇 사촌 형들의 소재를 수소문했다. 그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예전에 사촌 형의 편지를 가져온 자 역시 방연의 하수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당한 억울한 일들은 모두 방연이 꾸며낸 음모였던, 것이다.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로 인품도 정직하고 덕망이 두터웠다. 그는 손빈이 제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그를 맞아 자기 관저로 모셔왔다. 그리고 지극한 예절로 그를 대접했다. 손빈과 이야기를 나눈 뒤
‘오자병법’ ‘응변(應變)’에 보이는 간략하면서도 기본적인 책략이다.다수의 병력을 거느린 자는 되도록 평탄한 지역에서 싸우려고 한다.대부대가 작전할 때는 평탄한 지역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이다. ‘백전기법’ ‘중전(衆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대개 전투에서 내 쪽의 군대가 많고 적이 적으면 험한 곳에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평탄하고 넓은 지형이 필요하다.‘사마법(司馬法)’ ‘용중(用衆)’ 제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많은 병력이 진군할 때의 관건은 멈추는 데 있다.이상은 모두 내 쪽의 군사가 수적으로
진정한 학식과 재능을 가진 인재는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손자병법』은 군사 전문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경전으로서 인류 문명사회의 기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책이 저술된 당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책에서 지혜를 구하고 있고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와 상업, 처세 등의 영역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국에서 『손자병법』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전국시대의 손빈(孫臏)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孫武)의 후손으로서 역시
‘손자병법’ ‘군쟁편’에서 말하는 ‘용병의 8원칙’의 하나다. ‘고릉물향’에서 ‘고릉(高陵)’은 높고 큰 흙산을 가리킨다. ‘향(向)’은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적이 높은 산을 차지하고 진지를 구축해놓았다면, 무리하게 올려다보면서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다.제갈량은 ‘편의십육책(便宜十六策)’ ‘치군(治軍)’ 제9에서 “산과 언덕에서의 전투는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치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구체적인 전술적 지휘의 계략이다. 손자는 8가지 용병법을 제기했는데, 이는 당시 전쟁의 특징과 무기의 특징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
본색을 감추고 기다렸다가 상대를 제압하여 대의명분과 명예를 지킨다.중국인들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래서 각각의 왕조마다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쌓아왔다. 야사와 전설도 대단히 많지만 이른바 왕조의 정사(正史)인 『24사 二十四史』만 하더라도 똑똑한 사람이 평생 읽어야 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 중, 어떤 부분을 들춰봐도 사람을 다스리는 일의 독특함과 심오함을 확인할 수 있다.그중에는 성공에 관한 역사적 경험도 적지 않지만, 특히 기만적인 방법을 능숙하게 이용하여 성공한 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기
‘위공병법(衛公兵法)’ ‘장무병모(將務兵謀)’에 보면, 적장이 꾀가 많으면 기회가 있더라도 쉽사리 움직이지 말고 내 쪽의 정예병과 힘을 한껏 비축해두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잡아 작전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내 쪽의 정예병과 힘을 한껏, 비축해두었다가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대목이 바로 ‘축영대갈’에 대한 풀이다. 이 책략은 적장이 지략이 뛰어나고 부하들을 잘 단속하고 있어 쉽사리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채택하는 것이다.‘자치통감‧권41’ ‘한기(韓紀)‘에 보면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다. 29년, 봉
사람의 그릇에는 크기가 있다. 사람을 쓸 때는 그 사람의 그릇 크기를 먼저 살펴라!중국인들은 위진(魏晉), 시대의 기풍을 선망해마지않지만 이를 본받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남조 송나라 때 유의경(劉義慶)이 편찬한 『세설신어 世說新語』 「아량 雅量」에는 위진, 시대 선비들의 대범하고 넓은 도량을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가장 특출한 사람이 바로 사안(謝安)이다.사안은 매사에 평온하고 두려움 없는 성품으로 겉으로도 놀란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배를 띄워 유람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당태종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이 한 말이다. 그 뜻은 아군의 군기를 엄격하고 분명하게 잡고 경계 태세를 삼엄하게 한 다음 적군의 마음이 흩어져 부대의 기강이 느슨해졌을 때 공격한다는 것이다.기원전 203년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한 전투와 625년 이정(李靖)이 힐리가한(頡利可汗)과 벌인 전투가 바로 이 ‘이엄대해’의 책략을 채현한 본보기였다.‘사기’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기록을 먼저 보자.기원전 204년, 제나라 왕 전광(田廣)은 한나라군의 진공을 막기 위해 역하(歷下.-지금의 산동성 제남)에 대군을 주둔시켰다. 유방
온유한 인품과 넉넉한 지모로 평생동안 올바른 지략을 펼쳤다.순유(荀攸)는 삼국시대 때 조조의 뛰어난 모사이자 전략가로, 조조가 중원을 장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순유는 자가 공달(公達)이며 후한 말기 영천 영음 사람이다. 선비 가문 출신으로 인품이 선량하고 단정했던 그는 지모와 지략이 풍부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조부와 숙부 밑에서 성장한 그는 외모가 다소 우둔하고 나약해 보이긴 했으나 속마음은 갖가지 지략과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13세 때, 조부 순담(荀曇)이 사망하자 전에 순담의 수하에 있던 장숙(張叔)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