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본래 남의 양을 슬그머니, 그리고 아주 쉽게 끌고 간다는 뜻이다. 즉, 남의 손에 있는 물건을 쉽게 가져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말이 군사에서 쓰일 때는, 틈을 타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여 이익을 얻거나 주요 임무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역량이 비교적 약한 적을 손쉽게 공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요 공격 방향에 대해 영향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 계략은 ‘양을 끌고 오는’ 목적이 ‘순조로울’ 것을 요구한다. 만약 순조롭지 못하거나 주요 공격 임무에 영향을 주게 되면 전체 국면이 불리해져 ‘양’을 순조롭게 끌
장소(張昭)는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대신들 가운데 가장 연로했지만, 누구보다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손책(孫策)이 동생 손권(孫權-182~252, 재위 222~252)에게 “바깥일은 주유(周瑜)에게 맡기고 안의 일은 장소에게 맡겨라.”라고 주문했던 것만 봐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동오의 외부적인 문제들은 주유에, 의해서 착실하게 해결되었지만, 내부의 문제들은 완전히 장소에게 위임되지 못했고 여러 곳에서 장소와 손권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마음속에서도 장
'역대명장언행록(歷代名將言行錄)'에 나오는 명나라 때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튼튼하게 벽을 쌓고 들을 깨끗하게 비워놓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기회(틈)를 타서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을 활용법으로 삼아 싸우면 비록 수가 모자라도 지키고도 남음이 있다. 지키고도 남음이 있다면 싸워도 모자랄 것이 없다.이 책략은 빈틈을 노려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승간격하’에서 ‘승(乘)’은 ‘이용’의 뜻이며, ‘간(間)’은 ‘빈틈’을 말한다. 따라서 ‘승간’은 ‘기회를 이용한다.’는 뜻이 된다. ‘하(瑕)’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으로는 큰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중국 속담 중에 “부주의로 형주를 잃었다不意失荊州”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관우(關羽)가 형주를 잃고 맥성에서 피살당한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관우가 실패한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마음을 놓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관우는 부주의 때문에 형주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맥성으로 갔던 것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 때문이었다.그의 이런 성격이 후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의리 있는 장수라는 일반적인 평가가 가로막고
명나라 때의 『초려경략』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병이란 기회를 만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또 먼저 늦추었다가 나중에 빠르게 하는 방법도 있는데, 늦추는 것은 상대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고 빠르게 하는 것은 적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틈을 타는 것이다. (내가 늦춤으로써) 대비를 느슨하게 만들어 미처 준비하지 못한 틈에 쳐들어가면 이기지 않을 수 없고 적중하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적이 느슨하게 흩어져 있는 틈을 타 예상 밖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성공하는 책략이다. 『병뢰』 「승 乘」에서도 어떻게 적의 빈틈
좋은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한번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될 뿐이다.이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한신에게 죄를 지은 한 가신의 동생이었다. 한신은 죄를 지은 가신을 가두고 날을 골라 목을 칠 작정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가신의 동생이 형을 구하려고 한신의 계획을 여후에게 밀고한 것이다. 여후는 두렵고, 당황하여 급히 소하를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다. 소하가 계책을 올리며 말했다.“심복 하나를 군졸로 꾸민 다음, 도읍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폐하가 벌써 진희를 무찔렀다고 거짓 보고를 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이 말은 『울료자 尉繚子』 「병권 兵權」에 나오는 말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성읍이 비어 있고 물자가 다 떨어진 자에 대해서는 그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 병법에서 ‘무인지경에 들어가 적이 미처 저항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 차지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자치통감』 「당기 唐紀」에 실린 817년의 일이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이 후 지방 세력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양성하여 각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당 헌종(憲宗)은 대장 이소(李愬)로 하여금 채주(蔡州-지금의 하남성 여현)에 근거지를, 삼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결단하지 못한 머뭇거림이 주는 교훈한신(韓信)은 남몰래 고통을 참는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일화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신은 회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농사도 짓지 않고 상업에도 종사하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먹고 입는 것이 항상 부족했고 하찮은 관직이라도 지내보려 했으나 쓸만한 재주도 없어 자리를 얻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남에게 빌어먹어야 했다. 그는 한동안 정장(停長.-한대 행정구역의 하나인 정(停)의 우두머리로 지금의 면장이나
『삼국지』 「순욱전 荀彧傳」에 이런 고사가 있다. 동한 말기 당시만 해도 조조의 실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후, 특히 산동성 연주(兗州) 일대에서 여포를 격파한 후 그의 세력은 상당히 커졌다.연주 근처의 서주(徐州)는 그 지세가 험한 요충지인 데다가 각종 산물이 풍부해서 조조는 진작부터 이 지방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서주를 지키는 도겸(陶謙)이라는 인물이 워낙 인심을 얻고 있는지라 한 차례 전투를 벌여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뒤 도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는 곧 서주를 공격하려고
유방의 벗이었던 서한의 개국공신이며 한나라 초기 삼걸 중 한 사람.천하를 경영할 만한 뛰어난 능력과 세상을 구제할만한 지략을 지녔던 관중(管仲)은 제(齊)의 환공(桓公)이라는 천추에 만나기 어려운 명군을 만나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내정권과 외교권, 특히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을 것은 물론이요, 환공을 도와 제후들을 규합하고 천하를 재편성하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도제(檀道濟)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 무제(武帝-유유(劉裕)가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무장으로서,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북의 전진(前秦)을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송 문제(文帝-유의륭(劉義隆)는 무제에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단도제를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삼고 ‘무릉군공(武陵君公)’에 봉했다.『남사』 「단도제전 檀道濟傳」에는 단도제가 사용한 ‘창주양사‘ 의 계략에 관한 기록이 있다. 431년, 단도제는 북위 정벌에 나서 ’위군과 잇달아 30여 차례 싸워 승리를 거두고‘ 역성(歷城-지금의 제남시 교외)에 이르렀다
해서(海瑞-1514~1587)는 광동 경산 출신으로 자가 여현(汝賢)이고 호가 강봉(剛峰)이다.회족(回族)인 그는 청조(淸朝)뿐 아니라 중국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청렴결백한 관료이다.성품이 매우 정직했던 그는 조정의 권력 다툼에 과감히 뛰어들어 여러 차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로 파직당하기도 했지만,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중국 역사에 길이 남는 명신이 되었다.해서는 명 세종 가정(嘉靖) 연간에 과거에 합격한 뒤 남평 교유(敎諭)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호부주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종에게 「치안소(治安疏)」라는 글을 올렸다가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말로, ‘적이 편안하면 피로하게 만드는’ ‘일능노지(佚能勞之)’나 ‘안정되어 있으면 동요시키는’ ‘안능동지(安能動之)’와 마찬가지로 적으로 하여 진짜가 아닌 허상을, 쫓도록 유인하여 주도권을 쟁취하는 방법이다. (‘안능동지’‧‘일능노지’ 참조)군대에 식량이 떨어지면 군심이 동요한다. 굶주린 병사는 싸우지도 못하고 절로 무너진다. 두군대가 대치하는 중에 적의 후방 보급로를 파괴하는 것은 밥을 끓이고 있는 아궁이에서 장작을 꺼내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따라서 고대 병법에서 이와 비슷한 조목이
화신의 이름은 훗날 부패한 관리의 전형이 되었다.화신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부패 사범이었다. 그가 보통의 탐관오리와 다른 점은 황제의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조정의 재정권을 장악했고 군권과 인사권도 상당 부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신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치밀한 경영을 통해 조정 안팎에 거대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때문에, 이런 인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단호한 수완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경우는,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부르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청 가경(嘉慶) 원년(1796) 정월
‘가벼운 정예병으로 적을 시험(탐색)해본다’는 뜻의 이 말은 『오자병법』 「논장 論將」 제4에 나온다. 거기에서 무후(武侯)와 오기(吳起)가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무후 : 양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적장에 대해 전혀 모를 경우, 이를 외형으로 알아내는 좋은 방법은 없겠소?오자 : 신분이 낮더라도 용기가 있는 자에게 몇몇 정예 부하를 딸려 보내 탐색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때 적이 쳐들어오면 싸우지 말고 도망을 치도록 일러둡니다. 그러면서 적의 태도를 살피는 것입니다. 뒤쫓아 오는 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도망치는 우리 탐색 대
봉건시대 정치가들은 권모술수에 능란한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다.봉건 관료사회에서 성공한 정치가들은 대부분 권력을 조롱하는 데 있어서 술책의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는 날에는 가볍게는 목숨을 잃고 심하게는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는 분위기에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술책이 얼마나 뛰어났을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한 봉건관료들은 ‘정치가’라기 보다는 ‘관장의 예술가’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주아부(周亞夫)는 병법에 통달했고 군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난 명장이었지만 황제와 황실 인척들의 뜻을
모택동은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 문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전투의 실행에는 많은 문제가 따른다. 예를 들어 정찰, 판단, 결심 등 강한 것을 피하고 약한 것을 공격하는 것, 성을 포위하여 구원하러 온 적을 공격하는 것, 가상 공격, 방공, 여러 적 사이에 끼었을 때 정예병을 비축할 필요성 등등이 있을 수 있다.이 책략은 일부 병력으로 성이나 요새 등을 지키는 적을 포위함으로써 다른 곳의 적이 구원에 나서도록 유인한 다음, 주력군을 집중시켜 구원에 나선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이 계략은 손자의 ‘공기필구(攻其必
통치자가 ‘망국의 신하(亡國之臣)’를 쓰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과 같다. 망국의 신하는 자기중심적이다. 머릿속에 사적인 이익에 관한 생각만 꽉 들어차 있어 나라의 안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또한, 흑백을 뒤섞고 법리를 운운하며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어떤 훌륭한 계획도 성공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붕당을 조직하여 통치자를 압박하고 나라를 어지럽힌다. 이러한 간신적자는 틈을 보아 반역을 획책하며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한다.사람의 음험함과 악독함은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다. 겉으로는 건실하고 규율을 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도덕의 이해(理解)전국시대의 유세가인 소진(蘇秦)과 연왕(燕王) 사이의 변론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 기준을 제시하는 사례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소진이 연왕에게 말했다.“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제가 증삼(曾參)처럼 부모에게 효도하고 미생(尾生.-노나라의 매우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 변통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경우에 쓰는 말)처럼 신의를 지키며 백이처럼 청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절 비방하고 모함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연
비지(圮地-가기가 어려운 땅)에서는 집(군영)을 짓지 말 것이며, 위지(圍地)에서는 책략을 구사하고, 사지(死地)에서는 싸워야 한다. (손자병법 구변편)들어가기에는 길이 좁고 막혀있으며, 돌아올 때는 우회해야 하며, 소수의 적이 다수의 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지형을 위지(圍地)라 한다. 따라서 산지(散地)에서는 싸우지 말아야 하고, 위지 에서는 기계(奇計)를 써서 빠져나와야 한다. 험하고 견고한 곳을, 등지고 있고 좁은 곳이 눈앞에 있는 지형을 위지 라고 한다. 위지 에서 아군은 출구를 스스로 막고 병사들로 하여 결사적으로 분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