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변화하는 전쟁에서 자기의 행동을 엄폐하여 적을 속이고 작전의 돌발성을 달성함으로써, 적으로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계략이다. 이는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계략이다.817년, 당나라 장수 이소(李愬)는 채주(蔡州-지금의 하남성 여양시)를 공격했다. 이소의 부대는 눈이 내리는 밤에 70 리를 행군하여 날이 밝기 전에 채주성 밖에 도달했다. 그런데 9천여 명에 달하는 구사와 말들을 무사히 성 근처로 접근시키려면 최대한 정숙을 유지토록 해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작은 소음까지 억누를
창업도 어렵지만 이를 지켜나가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옛날 말에 소규조수(蕭規曹隨)라 하여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전혀 고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 고사성어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한나라 혜제(惠帝) 2년(BC 193), 승상 소하(蕭何)가 병으로 죽었다. 여후와 혜제는 고조의 유언대로 제나라 재상 조참(曹參)에게 소하의 뒤를 잇도록 했다.이 일을 두고 당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소하와 조참은 유방과 함께 제업을 도모했으며 똑같이 패 지방 서리 출신으로 사이가 매
군사적 방비가 지극히 튼튼하고 철통같은 경우 군대의 투지는 해이해져서 적을 업신여기기 쉽고, 평상시 늘 보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암암리에 수행하는 작전은 공개적인 작전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공개적인 작전과는 서로 모순‧상치되지 않는다. 이는 역리에서 말하는 음(陰)과 양(陽)이 서로 작용하는 것과 같다.서기 588년, 수(隋)나라에서 대병력을 동원하여 진(陳)나라를 공격하였다. 이 작전 전에 수나라의 장수 하약필(賀若弼)은 장자강 연안의 수비부대를 임무가 교대될 때마다 모두 역양(歷陽-지금의 안휘성 하현)으로 집결
[뉴스프리존] 협객은 풍부한 이상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춘추전국시대의 협객(俠客)은 낭만적인 기질을 지닌 인간군상이였다.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인심이 흉흉한 세태 속에서도 그들은 전통적 이상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손에 든 검으로 현실을 구제하려했고, 현실 속에서 살면서도 현실을 초월하려 했다.형가(荊軻)는 위나라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연(燕)나라로 이주했다. 그는 독서와 검술을 좋아하여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검술에 관해 유세했지만 지기를 만나지 못하다가 연나라로 가서야 비로소 고점리(高漸離)라는 사람을 만나
전쟁사에서는 ‘허장성세’로 적을 현혹시키는 예가 아주 흔한 것 같다. ‘현양격고’도 ‘허(虛)’로써 적을 제압하는 책략이다. 그 뜻은 양을 매달아 두 발을 버둥거리게 하여 마구 북을 두드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략의 요지는 적을 헷갈리게 만드는 데 있다. 송나라 때의 장수 필재우(畢再遇)는 금나라 군대와 작전하는 중에 이 방법을 썼다.『자치통감』에 나오는 이야기다. 1206년, 필재우는 금군과 보루를 쌓아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금군은 군대 수를 갈수록 늘려갔고,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한 송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금군과 대치하면서 필재
춘추전국시대의 이른바 전국 사공자(四公子)라 하면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을 가리킨다. 기록에 따르면 이 사공자의 식객이 한때 3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한 가지 장기만 있으면 그들의 문하에 들 수 있었으며, 식객들은 신분의 귀천과 관계없이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사공자는 선비를 양성하는 것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또한 선비를 양성함으로써 일정 정도 국가의 보전에 기여했다.그런데 송나라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였던 왕안석 같은 사람은 그렇게
『36계』의 「제29계」를 보면 “국면을 잘 이용하여 세력을 포진하면 힘이 적더라도 기세가 대단해 보일 수 있다.”는 풀이가 있다. 그에 이어서 『주역』 제53쾌인 ‘점(漸)괘를 인용하여 “물새가 큰 산 위를 날면 그 날갯짓이 더 화려해 보이고 그 기상이 대범해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는 뜻의 제29계 ’수상개화‘다. 요컨대 전쟁에서의 여러 국면을 이용하여 유리한 진지에 포진하면, 병력이 약하더라도 진용이 강대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면 적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이로써 적을 압도
무릇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 이는 단순 하지만 영원한 진리이다.하지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는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덕성, 학식, 소질, 포부를 살펴봐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안영(晏嬰)은 대단한 학식과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 어느 나라에도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을
이것은 거짓 동작으로 적을 속여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감추고 적에게 불의의 타격을 가하는 책략이다. 따라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의 한 방법이자 군사상의 기만술에 속한다. ‘서쪽을 치기 위해 동쪽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성동격서’나, 후퇴하기 위해 고의로 또는 거짓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 등이 ‘양동기적’의 구체적인 운용이다.『자치통감』 「한기‧1」을 보면 기원전 205년 한신(韓信)이 위왕 표(豹)를 공격했을 때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위왕 표는 병력을 포판(蒲阪-지금의 산서성 영제현 서쪽)에 집중시켜 황하를 건너기 위한 지점인
병서를 읽어보면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피하는 계책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뜻을 가진 ‘양단억장’도 매우 수준 높은 계략이다. 소순(蘇洵)의 『심술 心術』이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나의 단점을 과감하게 드러내어 그것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상대로 하여 나를) 기피 하게 하고 장점을 은밀히 길러 (상대가) 그것(내 장점)에 가까이 접근하도록 해서 그 속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장‧단점의 활용 술이다.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의 단점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적이 의
자신보다 더 재능 있는 이를 추천하고 벼슬을 양보한 포숙아의 이야기는 역사의 미담으로 전해진다.능력에 따라 인물을 등용하는 것은 역대로 중국 통치자들이 표방한 인재 활용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기준을 실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정실에 따라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고 오랜 현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왕조들이 순식간에 지고 마는 우담화(優曇花)처럼 그렇게 단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친척을 편애하고 아첨꾼을 총애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성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 없이 강조해왔지만 ‘병(兵)이란 궤도(詭道)다.’ 따라서 ‘허허실실’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병은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전쟁에서는 각종 수단으로 적을 현혹하고 속인다. 허점이 있으면서도 튼튼한 척, 튼튼하면서도 허점이 있는 척한다. 또 허점이 있을 때 그 허점을 그대로 보여 적으로 하여 오히려 튼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고, 튼튼할 때 튼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적으로 하여 오히려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그 운용의 묘미란 실로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자치통감‧권155』에 나오는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지혜로 불패의 입지를 구축한 관료부소(傅昭)는 자가 무원(茂遠)으로 북지 영주 출신이다. 그는 분란이 끊이지 않고 무질서한 관직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입신의 도를 세웠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주마등처럼, 왕조가 바뀌는 위진남북조 시기에 그가 불패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매사에 조심하고 널리 살피는 지혜 덕분이었다.그는 일생 동안 송(宋), 제(齊), 양(梁)의 세 왕조를 겪으면서 주군의 관료와 지방 장관, 조정관 등 다양한 관직을 편력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갖가지 위기가 닥쳤지만,
실한 것을 실하게 보인다.이 말은 『초려경략‧권6』 「허실」에 나온다.허실은 나한테 달려 있으므로 적의 오판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튼튼한 곳을 튼튼하게 보임으로써 적으로 하여 내 쪽에 혹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튼튼한 곳을 튼튼하게 보인다.’는 ‘실이실지’는 적과 싸울 때 일부러 내 쪽의 실력을 드러내는 병가 사상이다. 이 책략은 내 쪽과 적의 실력이 엇비슷하거나, 내 쪽에 충분한 준비가 있고 부서를 주도면밀하게 배치한 후에 실시해야 한다.394년, 후연의 왕 모연수(慕容垂)는 서연(西燕-지금의 산서성 남부
“중국 역사에서는 모든 황제(皇帝)와 장상(將相)들이 하나같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문제로 고심했다. 신하를 다스리고 부하 장수들을 다스리는 문제가 최고 통치자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자주 부상했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 가볍게는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를 달아야 했고 심하게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기 때문이다.”이를 해결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성격제형술(性格制衡術)이었다. 성격제형술이란 일종의 분치(分治) 개념으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성격을 이용하여 견제하는 것을 말한다. 직급이 서로 엇비슷하면서 성격이
명나라 때의 『초려경략‧권6』 「허실 虛實」에는 “튼튼하지만, 허점이 있는 것처럼 하고 나의 튼튼함으로 저쪽의 허점을 공격하면 파죽지세다”라는 대목이 있다. 본래 역량이 강대하지만 허약함을 위장하여 상대방을 마비시킨 다음 틈을 타서 적을 물리친다. 이는 내 쪽이 적보다 우세하고 주동적인 지위에 있을 때 적을 유인하는 모략이다. 실제 운용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 형식이 있다. 함정은 없지만 고의로 파탄을 보이거나 허점을 보여 적이 걸려들게 한다. 특히 교만한 적이 성급하게 싸움을 서두를 때, 이 ‘시형법’은 더 확실하게 활용될 수 있다
현명한 아내는 남편을 위기에서 구하며 황제로 등극시키다.다음날 부인 마씨는 그동안 모아놓은 귀중한 장식품들을 장씨에게 갖다 바치면서 주원장이 양부와 양모에게 효성의 마음으로 마련한 작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장씨가 몹시 기뻐하면서 이를 곽자흥에게 알리자, 곽자흥도 금세 흐믓한 표정을 지었다.“주원장에게 이런 효심이 있는 줄 모르고 공연히 그를 의심했었구먼!”이때부터, 곽자흥은 주원장에 대한 의심을 풀고 싸움에 나갈 때마다 항상 주원장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도 좋아져 저양의 성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하지만 곽자흥
책략의 운용은 변화가 무쌍하다. 모든 계략은 한결같이 ‘적을 계산하고 적에게 계산 당하지 않기 위해’ 주도권을 쟁취하고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허즉실지’는 자신이 불리한 형세에 놓여 있을 때 고의로 실력이 센 것처럼 위장하여 상대에게 위험을 가하고 함부로 진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백전기법』 「허전 虛戰」에서는 “아군의 형세에 허점이 있을 때 거짓으로 그 허점을 튼튼한 것처럼 보여 허실의 소재를 가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감히 아군과 싸우지 못하게 하면 전군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가
집안에 현명한 아내가 있으면 남자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황제는 당연히 남자여야 한다. 하지만 중국의 봉건왕조 역사에서 여자가 정치를 했던 왕조는 적지 않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나 여후(呂后), 자희태후(慈禧太后)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垂簾聽政)한 태후나 황태후가 수십 명에 달한다. 편견을 배제하고 이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남편이나 자식, 손자를 도와 출세시킨 인재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중국 역사에서 황제를 가장 잘 도왔던 여성을 들자
『손자병법』 「계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용병의 기본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용병은 적을 속이는 ‘궤도‘다. 그런 까닭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쓸 수 있으면서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가까운 곳을 노리고 있으면서 먼 곳에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 가까운 곳에 뜻이 있는 것처럼 꾸민다. 적에게 이익을 줄 것처럼 유인해 끌어내고, 적을 혼란시켜놓고 공격한다. 적의 병력이 건실하면 내 쪽에서는 태세를 정돈하여 대비하고, 적이 강하면자중하며 정면충돌을 피한다. 적을 화나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