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나라를 위해선 진충보국했던 만고의 충신“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군주의 도리이고, 일을 알아보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다. 형태가 없는 것이야말로 유형의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이고,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세상사 인정의 근원이다.”당나라 때 조유(趙蕤)가 쓴 『장단경 長短經』이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의 원전 ‘인물지’의 저자 유소(劉邵)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관리의 책임은 한 가지 일로 여러 가지 일을 잘 조합하여 처리하는 것이지만 군주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대신들에게
『손자병법』 「계편」에서 제기하고 있는 ‘궤도 12법’의 하나다. 본래는 공격할 수 있고 수비할 수 있고 전투력도 있으면서 일부러 그렇지 못한 것처럼 가장한다는 뜻이다. 『육도 六韜』 「무도 武韜‧발계 發啓」 제12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사나운 새가 다른 새를 습격하려고, 할 때는 날개를 움츠리고 나직이 날며, 맹수가 다른 짐승을 노릴 때는 귀를 세우고 엎드리며, 성인(聖人)이 움직이려고 할 때는 반드시 어리석은 듯한 얼굴빛을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이는 막판에 가서 단숨에 성공을 거두기 위한 행동이다.『오월춘추 吳越春秋』 「합려
연적(戀敵)과 정적(政敵)에게는 잔인무도한 살육이 있었을 뿐이다!유방이 죽은 후 태자 유영(劉盈)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고 여치가 대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유씨 황실의 세력을 더욱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눈엣가시였던 척희(戚姬)를 냉궁(冷宮.-버림받은 왕비가 머무르는 처소)으로 몰아내었다. 여치는 사람을 시켜 척희의 머리를 자르게 하고 목을 쇠줄로 묶어놓았다. 또 궁궐에서 입던 옷을 벗기고 평민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러고는 우리에 가두어 일어나지도 못하게 하고 종일 쌀을 찧는 노동을 하게 했다. 한 번도 쌀을 찧어본 적이
『손자병법』 「허실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따라서 적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고 아군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면, 아군은 집중할 수 있고 적은 흩어지게 된다.아군이 하나로 집중하고 적이 열로 분산된다면, 이것은 열로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아군은 많고 적은 적어진다.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의 병력을 공격할 수 있다면, 아군이 더불어 싸울 상대는 가벼운 것이다.이 계략이 뜻하는 바는 ‘시형법’으로 적을 속여 적으로 하여 의도를 드러내게 유인하며, 내 쪽은 흔적을 드러내지 않아 허실을 모르게 하고 실체를 헤아릴 수 없게
권모술수로 연적(戀敵)도 제거하고 권력투쟁에서도 승리했다.중국에는 타고난 책략가나 정치가가 많다. 출신이 미천하고 특별한 점이 없는 여인도 황후가 된 후에는 온갖 책략을 써서 신하들을 주물렀다. 이 여인들은 백만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베는 장군마저 마음대로 농락하여 실질적인 황제가 되었다.섭정(攝政)을 한 황후가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마음대로 정권을 농락해도 부분적으로는 후대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런 점은 우리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나라를 개국한
적과 싸울 때 강 가까이 진을 치고, 아군이 근공(近攻) 하려면, 반대로 나타내기를 멀리한다. 반드시 많은 의병을 설치, 상하 멀리서 강을 건너면, 적은 반드시 병력을 나누어 응전해 온다. 아군이 은닉한 부대(潛師)로 이를 가까이서 치면 적군을 깨뜨릴 수 있다. 병법에 이르기를 ‘가까이서 멀리를 나타낸다.’라고. 즉 근거리에 있는 적을 격파하고자 하면서, 원거리에 있는 적을 먼저 격파하는 것처럼 보이게(기만) 한다는 뜻이다.‘원이시근(遠而示近)’과 상대되는 이 계략 역시 『손자병법』 「계편 計篇」이 그 출전이다. ‘가까운 곳에서 진
진정한 지자(智者)는 세태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다.용인술에 있어 유방에게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개국 초기에 유방은 한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함께, 장군들의 능력에 관해 논했다. 유방이 한신에게 말했다.“장군은 내가 백만 대군을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한신이 망설임 없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유방이 다시 물었다.“그럼 10만 대군은 어떨 것 같소?”“그것도 어렵습니다.”유방은 버럭 화를 내며 따졌다.“그대 말대로라면 내가 어느 정도의 병력을 통솔할 수 있다는 것이오?”“폐하께서는 1만의 병사면 족합
『손자병법』 「계편」에서 제기하는 ‘궤도 12법’ 중 하나이다. 이 계략 역시 일종의 ‘시형법’이다. 자신의 군사적 의도를 엄폐하기 위해 본래 ‘먼 곳에서 진군해오면서 가까운 곳에서 진군하는 것처럼 꾸민다.’『백전기법』 「원전 遠戰」에 나오는 관련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적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아군이 멀리서 물을 건너러하면, 배를 많이 만들어 가까이에서 건너는 것처럼 꾸민다. 그러면 적은 틀림없이 많은 병력으로 이에 응전해올 것인데, 아군이 그 빈틈으로 가서 물을 건넌다.또 『역대명장사략 歷代名將事略‧下冊』 「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작은 원한은 잊어야 했다.유수는 부드러움이 강경함을 제압할 수 있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여 넉넉하고 부드러운 ‘덕정(德政)’으로 군심(軍心)을 사로잡았고, 형벌로써 권위를 세우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이 점은 기의군 장수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마 기의군이 투항했을 때 유수는 그 우두머리를 제후로 봉했으나 유수의 한 군 장수들은 그들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현지의 민중인 이들이 살육이나 약탈을 당할 경우,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동마 기의군
이 계략은 ‘가짜를 보여 진짜를 감춘다.’는 ‘시가은진(示假隱眞)’과 같은 ‘시형법’에 속하지만, ‘시가은진’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계략이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사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상(假像)’을 만들어내어 자기 쪽의 진정한 의도를 감추려 한다.1947년 겨울, 등소평(鄧小平)이 이끄는 군대는 황하 북안에 당도했다. 황하 남안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의 불침 병은 야간에 탐조등을 비추다가 북안 수면 위에 쇠 투구를 눌러쓴 병사들이 소리 없이 남안 쪽으로 헤엄쳐 오는 것을 발견했다. 국
중용의 도를 실천하여 인심을 얻고 천하에 우뚝 서다.부드러움 속에 강경함이 숨어 있고, 강경함 속에 부드러움이 병존하여 양자가 서로 잘 조화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국인들이 지켜온 처세의, 기본이다.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강경한 사람이 많았던 데 비해 부드러운 사람이 적었다는 것이다. 만일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고 강경함을 보조 수단으로 할 수 있었다면 이러한 처세 및 통치의 방식은 이른바 ‘유도(柔道)’, 즉 유연한 도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유도’가 치국치민과 인간의 처세에 가장 바람직
적과 싸울 때 내 쪽의 수가 많고 강하면 일부러 겁먹은 것처럼 보여 적을 유인한다. 그러면 적은 틀림없이 공격해올 것이다. 그때 정예군으로 치면 반드시 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이는 내 쪽이 강하고 적이 약한 상황에서 활용하는 계략이다. 일부러 약한 것처럼 보여 적을 유인하여 싸우게 한 다음, 정예군으로 불의의 타격을 가한다. 이것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싸우지 못하는 척한다.’는 ‘능이시지불능(能而示之不能)’의 구체적 운용이다.기원전 342년, 위(魏)‧조(趙) 연합군이 한을 공격했을 때 손빈이 취사용 솥을 줄이고 일부러 겁먹은 듯
사람을 믿고 쓰겠다고 결정하면 장점만을 생각하고 단점은 잊었다.손권은 모든 권한을 주유에게 주었다. 총사령관은 손권이지만 최고 지휘관은 주유가, 외교와 병참에 관한 모든 권한은 노숙에게 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참견하지 않았다. 바로 손권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번 신뢰한 부하는 끝까지 믿는다’는 원칙이다. 손권은 이렇게 생각했다. ‘믿고 쓰겠다고 결정하면 부하의 장점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단점은 잊는다’라고, 최고 지휘관으로서는 갖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을 보고 받고, 모든 것을 지휘하고 모든 결과물에 대한 책임도
『백전기법』 「약전 弱戰」을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전투에 임하여 적이 많고 아군이 적으며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하면, 반드시 깃발 따위를 많이 세우고 솥을 많이 늘려서 아군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한다. 그리하여 적으로 하여 아군의 숫자와 전력의 강함과 약함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하면 적은 쉽게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이때 빨리 퇴각하면 전군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손자병법』 「세편 勢篇」에서는 “강약은 형(形)”이라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이른바 시형법(示形法)은 약하면서도 강하게 보이거나 강하면서도 약하
외교적 유연성이 능수능란했던 통합의 지도자로 부상(浮上)하다열아홉에 2대째 군주가 돼서 무려 50여 년을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오나라의 손권(孫權.-182~252)이다. 우리는 그를 조조나 유비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지만, 그것은 손권에 대한 인물 탐구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한다. 그는 안으로 여러 부서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이질적인 요소를 통합하며 밖으로는 많은 군웅들과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수성에 성공한 창조적이며 관리에 능통한 지도자였다.삼국시대의 세 주역은 분명 조조, 유비, 손
『손자병법』 「세편」에 보면 “전투를 잘하는 자는 그 기세가 맹렬하고, 그 절도가 빠르고 간결하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세험절단(勢險節短)’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세(勢)’는 ‘태세’다. 활시위를 잔뜩 당겨 곧 쏠 것 같은 ‘태세’를 말한다. ‘절(節)‘은 원근과 거리를 줄인다는 뜻이다. 유인(劉寅)은 『손무자직해 孫武子直解‧권3』 「병세」 제5에서 “절(節)이란 그 힘을 줄인다는 뜻으로, 틀림없이 그곳에 이르러 실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험(險)‘과 ’단(短)‘에 대해서는 “험은 빠르다는 뜻과 같고, 단은 가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인가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인가허창으로 돌아온 조조는 전란으로 파괴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시책을 모색한다. 먼저 전몰병사들의 유가족을 위해 토지를 분배하고 학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문헌전적(文獻典籍)의 연구와 인재 교육을 위해 500호 이상의 마을마다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배경에는 조조 자신이 학문을 즐겨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들 조비(曹丕.-187~226)가 쓴 『전론(典論)』에는 아버지 조조가 시서와 문적을 좋아하여 비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중국 역사에서 조조(曹操.-155~220)만큼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정사(正史)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陳壽.-233~297)는 “조조야말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관중(羅貫中.-1330~1400?)이 쓴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는 악행을 대표하는 인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과 유행으로 조
명나라 때의 『투필부담』 「본모 本謀」에 나오는 말인데, 적의 예봉을 꺾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역대 군사 전문가들은 용병이란 건실함을 피하고 허점을 공격하며 먼저 약한 곳을 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이 책략은 적의 예봉을 저지하고 날카로움을 날카로움으로 맞서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그러나 사실 이는 문제의 양면이다. 내 쪽에 적의 예기를 꺾을 능력이 없거나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때는 당연히 그 예기를 피하고 약한 곳을 골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적극적으로 적을 맞상대해서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손자병법』 「구지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작전은 신속함이 으뜸이다. 적의 힘이 아직 미치지 못한 빈틈을 타고 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길을 거쳐 적이 경계하지 않고 있는 곳을 공격한다.이 말의 요지는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과 뜻밖의 공격으로 용병술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빈틈을 탄다’는 뜻의 ‘병귀승인(兵貴乘人)’을 구체화한 것이 ‘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길을 거쳐 적이 경계하지 않고 있는 곳을 공격한다’는 ‘유불우지도, 공기소불계’다.『사기』 「회음후열전」에 실린 이야기다. 204년, 한신은 조(趙)를 공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