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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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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1 00:24
  • 수정 2019.03.0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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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적인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법으로 정하여 온 국민이 기념하는 날’이다. 대한민국 5개의 국경일 중 하나인 3․1절은 3․1운동이 우리 역사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3․1운동 결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은 국내, 해외를 막론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로 나뉘며, 그 파벌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갈라졌고,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영향을 받고 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등장한 소련의 레닌이 식민지의 민족해방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론(National Self-Determination)’을 발표했다. 이 소식에 식민지와 반식민지 민족들은 크게 반겼고 식민 지배를 받던 약소민족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19년 1월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1월 20일 기독교와 연대한 천도교 손병희 교주는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 셋째,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세 가지 독립운동의 원칙을 만든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해 서울에선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며, 기독교와 함께 각 지방에 보낸다.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 측,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이 맡았다. 조선민족대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선정했고, 소극적인 유림은 제외됐다. 종교계 대표들과 각 학교 대표들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이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만들어졌다. 1월 21일 고종이 붕어한다.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며 일제에 대한 증오가 가중될 때,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한다.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29명이 모여 식사, 선창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는 독립선언식이 거행한 후 바로 일제에 연행된다. 그 시각, 서울의 군중들과 중학교 이상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독립을 선언한다. 어디선가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들렸고, 군중들은 공원 밖으로 뛰어나와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 만세운동은 고종의 인산 참배를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군중도 가세해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수만 명의 군중이 시위했지만, 비폭력 원칙으로 당일 폭동사례는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많은 사람이 운동을 이어갔고, 3월 5일에는 평양에서 온 1백 명의 학생까지 가세해 더욱 큰 시위로 발전해 그 인원이 약 1만 명이었다. 8일부터는 각종 파업과 시장의 철시가 이어졌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잠잠해졌으나 22일부터 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며 4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충청남도는 3월 3일 예산군을 시작으로, 충청북도는 3월 19일 괴산에서, 강원도는 3월 10일 철원에서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축으로, 대구는 3월 8일 시작해 경북 각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경상남도는 3월 3일에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일반에게 돌리고 도내 21개 군이 모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전라북도에서는 3월 3일 전주, 군산, 이리 등지에서 선언서가 사람들에게 배부되고, 전라남도는 3월 3일부터 구례, 수천, 여수, 광양, 목포에서 배부되고, 10일 광주에서도 본격화되었다.

서울과 사전 연락된 황해도는 3월 2일 황주에서 천도교도가 앞장서서 운동을 전개, 평안남도도 3월 1일 평양, 진남포 등지에서 큰 운동이 시작됐고 다른 지역보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평안북도는 의주, 선천, 정주 등에서 3월 1일에 일본 헌병 초소,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적극적인 운동 형태를 띤다. 함경남도는 3월 초, 중순에 치열한 운동을 전개, 함경북도는 3월 10일 성진에서의 시작해 4월까지 크게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비폭력적으로 질서 있게 계획적으로 뻗어 나갔다. 많은 학교는 동맹 휴학했고, 상점은 문을 닫거나 운동자금을 제공했고, 노동자들은 파업 등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농촌 지역까지 퍼지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군중을 해산시켰지만, 운동은 계속되었다. 이에 일본은 매우 놀라 무력적으로, 철저히 탄압했다. 화성 제암리, 평남 성천, 평남 사천, 황해도 수안 등에서 무차별 총격과 대량학살이 시작된다.

3.1운동은 국내를 떠나 국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서북간도, 만주, 중국본토, 러시아 연해주, 미주, 하와이, 일본 등에 이주해있던 1백여만 해외 한민족도 함께해 국내외를 망라한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며 임시정부의 건립 등 조직적으로 발전한다. 3•1운동 이틀 후 3월 3일 자 『조선독립신문』에 임시정부의 설립이 예고됐다. 임시정부의 조직 소식은 3•1운동의 시작과 함께 『조선독립신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임시정부의 수립’이 3•1운동의 목표 중 하나가 된 것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자는 3•1운동의 민족지도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3•1운동의 정신은 이처럼 독립된 주체적 기구를 세웠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초기의 민족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대규모의 운동을 기대도 예상도 못 했다. ‘독립청원’인 3•1운동이 학생, 종교인 같은 중도지식층과 국민들이 함께 나섰다. 전국 수백 곳에서 한 달 가까이 운동이 계속됐다는 것은 당시 ‘조선국’이라는 나라의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운동은 33인 외 실제 시위를 한 15인까지 모두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그 중에서 박희도, 정춘수, 최린, 최남선 등이 변절했다.

3.1 운동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 운동이다.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기에 건국절이 내포된 삼일절을 국가 중요 국경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 후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이름으로 독립선언기념일,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렸고, 공휴일이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2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했다.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는 물론 미주와 국내, 러시아, 쿠바,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시, 필라델피아, 심지어는 일본 일부 도시에서 태극기를 앞세워 시가행진하며 거행됐다.

대한민국 2년(1920년) 발행된 임시정부의 관보 독립신문에는;

삼월 일일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한 삼월 일일,
이천만 대한인은 간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년 후 만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삼월 일일,
대한의 자녀들은 어떻게 이날을 지켰는가.

1945년 광복 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했고, 이듬해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했고,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1950년대 삼일절에는 시장이 문 닫고 국기를 내걸며, 음악회, 학예회,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전국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5.16쿠데타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남았다. 1980년대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경축사를 대독하며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된다. 북한에서도 3.1 운동을 기념하지만, 공휴일은 아니다.

2019년이 3.1절 100주년 국민준비위원회는 중앙경축식을 비롯하여 문화축제, 아리랑대축제, 독립의 횃불 봉송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설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행사를 준비하며, 서울시도 자체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현행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일제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3.1운동 후 전국에 수십만 명이 체포됐고, 서대문형무소에만 가마 꾼, 의사, 간호사, 기생, 상인,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3천 명 넘게 갇히었다. 그러나, 독립투사 중 훈장에 추서된 2/3는 신상기록도 못 찾았다. 덧붙여서 유관순 열사는 건국훈장 3등급으로 아직 저평가되고 있으며,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일본 정부를 대변하며 일장기를 흔들어대는 종자들이 있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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