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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혁명)기념일’,비폭력·평화적 '독립혁명'의 역사 의식을 정립
  • 권혁시
  • 승인 2019.03.02 00:03
  • 수정 2019.03.02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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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린(開天 개천) 아득히 먼 옛날, 선조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빛나는 얼과 한없이 넓은 마음,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널리 인간세를 이롭게 한다”(弘益人間 홍익인간) 그렇게 드높기 그지없는 ‘민족정신’을 한결같이 지키며 살아왔던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우리 한겨레, 배달민족이다. 그런데, 장구한 세월이 흘러 1905년, 을사늑약(외교권 박탈)에 이어 1907년, 한일신협약(군대해산)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3대 통감취임(경찰업무 헌병일임, 조선인 통제 위협, 신문잡지 엄중검열, 정책반대 철저금지)과 한일합병조약(주권상실, 이 조약은 이완용을 필두로 일부 친일세력에 의한, 국민 주권·의사에 반한 체결이므로 원천무효이다), 그로 인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함으로써 조선 519년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미증유의 치욕의 사태였으며, 우리겨레는 주체를 잃었고 일제치하에서의 삶은 자기배신일 수밖에 없었다.

'홍익인간'의 심원한 사상·문화의 창조정신, 용진무퇴(勇進無退)의 저항의지가 한겨레의 원천이며 생명력이거늘 어찌하여 그 지경이 되었던가? 이토록 통탄을 금치 못할 불우했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역사관)의 정립을 통하여 통렬히 자각하고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고찰컨대 첫째, 조선은 선비정신(성인지도 聖人之道)에 의해 5백년을 유지했으나, 말기에 와서 중화 '사대주의'와 무도한 '세도정치'로 인하여 대다수 지식인, 리더그룹의 주체의식과 사명감이 실추했고, 유교사상 경도 탓에 포용적 발전(개혁·개방)을 실현치 못하였다.

둘째, 제국주의 일본에게 강점 당했던 36년 간 민족정기, 민족문화에 대한 철저한 말살정책, 식민교육이 실행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식민사관'에 의해 역사의식의 굴절을 넘어 역사왜곡의 정당화로 점철하였다. 셋째, 1945년 8월 15일, 그 후의 해방정국은 분열과 분단의 불완전한 독립으로 귀착하였으며, 그러한 연유로 해방은 되었으나 단일민족의 통일국가로서 일치와 결집을 통한 발전 동력을 발출시킬 수 없었다.

넷째, 6·25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선진국가(강대국)에 상당기간 유학했던 다수 지식인들이 비판 없이 답습, 수용한 서구식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으로 말미암아 '문제의식·비판정신'을 잃고 무분별한 엘리트주의, 학벌패권주의를 증폭시켜 왔다. 그리하여 전 분야의 양극화 심화를 야기했을뿐더러 특히, 미국에 대한 신사대주의의 경향을 고착시켜 독립과 통일의 에너지를 반감시킨 측면이 적잖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각성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부패망국'(腐敗亡國)의 수치와 능욕, 통한과 수모 속에서도 무기력하고 비겁하게 주저앉아 있지 않고 온 겨레가 용감하게 분연히 일어섰던 민족사에 대하여 '시민혁명'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정립해야 한다. 3·1독립운동은 세계만방 향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한 날 한목소리로 태극기를 치켜들어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일제 강점에 거세게 항거했던 비폭력 '독립혁명'이었는 바, 이를 시발로 끝내는 독립을 쟁취했던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안정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안악사건'(황해도지역 민족운동 탄압, 백범 白凡 김구 金九 체포),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조작사건', '105인사건'(데라우치 암살 빙자 신민회, 그리스도교인 박해), 이로써 독립운동의 기반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 한편,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적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착취의 식민주의에 강력 대응하는 세계적인 저항 기류가 거세게 솟구쳐 올랐다.

그런 와중에 정의와 평화를 강하게 추구하는 '인도주의'(humanism)가 확산되었고, 자주와 독립을 뜨겁게 열망하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이렇게 세계인의 의식변화가 급진전을 이루는 가운데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10월혁명)에 의하여 제국(로마노프왕조)이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제정 러시아를 대체하는 노동자·농민의 (소비에트) 정권이 세워지면서 약소민족의 '해방전선(운동)'에 대한 지원노선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한 달 후인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방침의 기본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 "대한의 '자주독립·민족통일'을 위하여!"
'3·1독립운동(혁명)' 계획 추진, 파리강화회의 참가 '대한독립' 설파

세계정세의 급진적 변화는 식민지배하의 민족들을 크게 자극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뜨겁게 달구었고 그 해 8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년)은 독립지사들을 결속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 본격적인 독립운동·투쟁에 돌입하였다. 특히, 여운형은 역사적인 '3·1독립운동'을 계획,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지혜와 용기, 선견지명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그는, 독립투쟁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제의 조선 강점과 폭압적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실상을 온 세상에 폭로하고, 대한의 독립과 그 당위성에 대한 호소를 선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 18일 개회)에 몽양 못지않은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민족지도자이며 선각자인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년 ㅡ 1912년 7월,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가 민족대표로 선발되어 2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출발하였다. 우사는 3월 13일, 3·1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던 때에 파리에 당도하여 대표부를 설치하고 독립 외교활동에 전력투구하였다. 얼마 후 임시정부가 수립(4월 11일)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라는 공식명칭으로 통신국, 회보 등을 적극 활용하여 각국의 대표, 주요기관, 언론 등에 3·1독립운동과 일련의 활동을 세계에 널리 홍보·선전하였다.

그리고 공고서·비망록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함으로써 대한 국민과 정부(임정)의 입장과 견해를 전 세계인에게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열강의 비협조로 상정은 안 됐으나, 일제 침탈의 부당성,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공식화하고 세계만방에 공표, 공론화한 실질적 효과와 역사적 의의가 대단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규식은 강화회의가 종료된 후에도 책자 '한국의 독립과 평화'의 발간과, 각국 대표 방담 등, 지속적인 독립외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렇게 '3·1독립운동(혁명)' 결행에 대한 발상과 계획을 주도하고, 그 실행을 추동하였던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해방 후에도 백범 김구와 같이) 초지일관했던 사명의식과 실천의지는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 그리고 '민족통일'이었다. 독립과 통일은 반드시 병행해야 할, 우리 한계레가 이루어야만 하는 부정할 수 없는 당위인 동시에 저버리지 못할 염원이므로 '민족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자주독립'이 완결되기에 그런 것이다.

"저들이 밤낮으로 기원하는 두 글자는 독립뿐이다. 독립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결코 분투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하이주재 대륙보 기자 나다니엘 페퍼,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나는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 씨가 남조선 정당 간에 배전의 협동과 통일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과 노력에 진전이 있다는 보고를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다. 진정한 통일과 성실한 협력은 외계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지도자들이 인류 4대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노력하는 그것으로만 완성되리라 믿는다" (하지 미군정 사령관, 좌우합작 지지입장 공표 '담화문')

오늘은 3·1절 100주넌이다. 3·1독립운동은 민족지도자들을 위시한 순국선열들이 수개월 동안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적 식민통치에 항거한 대대적이고 광폭적인, 역사 이래 최대의 범민족적 저항운동이었다(참여인원 2백2만여 명, 집회 1천5백여 회, 사망자 7천5백 명, 사상자 1만5천여 명, 체포구금 5만여 명 등). 앞서 밝힌 바와 같이 3·1독립운동은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후 군대(독립군·광복군)를 조직하여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끊임없이 독립투쟁 벌였으며 마침내 나라를, 국권을 되찾아 다시금 독립을 쟁취한 원동력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3·1독립운동의 목적은 오로지 '대한 독립'이고, 온 민족이 그 염원 하나로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날짜에 불과할뿐 특정한 의미가 전혀 없는 3·1절(삼일절)을 '3·1독립(혁명)기념일'로 개칭하고 3·1만세운동, 3·1운동, 3·1독립운동 등을 '3·1독립혁명'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그 두 말할 나위 없는 이유와 근거는 앞서 개관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그 의의이다. 아울러 이 독립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향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의 기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부언컨대,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1919년 3월 1일(삼일절)을 건국으로 명시하였고, 1948년도 제 1호 관보에는 당해연도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 건국원년으로 기산하였다. 이론적으로도 병탄으로 정부가 소멸됐지만 ‘국체 및 정체의 주체’(영토·국민) 당사자(국민)가 엄연히 존재하여 스스로의 명확한 인식(집단적동의·collective agreement)하에 ‘독립’을 선언하였기에 건국이 성립되었다는 논지가 명확하다. 따라서 3·1절 개칭과 연관시켜 주지할 대목은 독립국가의 건국에 상응하는 '독립혁명'이라는 역사적 의미부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독립혁명과 정치혁명을 통하여 인류역사상 최초로 ‘민주시민국가’를 이루어낸 미국과 프랑스의 경우도 참고해야 한다. 1776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 1784년 7월 14일 프랑스대혁명기념일에 건국을 기리지만 ‘건국(기념)일’이라는 명칭은 부여치 않았는데, 삼일절을 '3·1독립(혁명)기념일'로 개칭해야 마땅한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민주국가의 모든 의사결정은 ‘국민적 합의(consensus)'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반드시 이를 준행해야 한다. “가장 잘 통치된 나라에서는 국민 개개인의 감정이 국가 전체의 감정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플라톤, ‘국가’)

100년 전 오늘, 민족대표 33인(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병조 나인협 이명룡 박준승 오세창 최린 김창준 양전백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한용운 권동진 양한묵 이종훈 박동완 정춘수 홍병기 권병덕 유여대 이종일 신홍식 최성모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이갑성 임예환 신석구) 명의로 작성된 '기미독립선언서'의 낭독(정재용)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만방에 엄정히 선포하고 '대한독립 만세!"(김상옥 선창) 그 큰 함성을 시작으로 '독립혁명'의 도도한 물결이 탑골공원에서 장안으로,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므로 결론은, 민족사의 일대 전환과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이룬 이 날을 정명(正名)함으로써 (친일·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와 굴절된 '역사의식'을 정립하여 우리 한겨레의 투철한 '독립정신'과 명정한 '민족정기'를 회복시키는 근본을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구현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원동력 삼고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한민족의 오랜 숙원인 진정한 '자주독립·민족통일' 향한 대장정의 길로 끊임없이 용솟음쳐 전진하여아 한다.

권혁시  online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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