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예술극장에서 (재)국립극단의 김윤철 예술감독, 김영수 작, 윤광진 연출의 ‘혈맥(血脈)’을 관람했다.

김영수(金永壽 1911~1977)는 극작가 겸 소설가로 서울 출생이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학예부기자, 어린이신문 주간 등을 지냈다.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 등과 1933년 도쿄[東京]에서 학생예술극장(學生藝術劇場)을 조직했고, 34년 신춘문예에 희곡 ‘광풍(狂風)’ ‘동맥(動脈)’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극작생활을 시작했다. 

작품세계는 비극적 세태를 사실적 기법으로 대담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은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뚜렷한 환경극작가가 되게 하였다. 38년 소설 ‘소복(素服)’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소설도 쓰게 되었다. 작품으로는 ‘총(銃, 1940)’ ‘단층(斷層, 1940)’ ‘정열지대(情熱地帶, 1946)’ ‘돼지(1950)’ 등이 있고, 희곡집으로 ‘혈맥(血脈, 1949)’이 있다.

그의 초기 작품 경향은 예술성과 대중성이 공존하였으나, 후기에는 대중성이 강하였다. 희곡 ‘혈맥’은 그의 대표작으로 이념이 다른 부자간의 갈등을 그렸으며, 제 1 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임영웅 연출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와 전세권 연출의 방송극 ‘거북이’를 집필해 성공을 거두었다.

혈맥의 초연은 1948년 1월 극단 신청년(新靑年)이 박진(朴珍)의 연출로 문교부 주최의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동도극장에서 공연하였고, 1949년에 재 공연되었다. 혈맥은 1963년 한양영화사(漢陽映社)에서 김수용(金洙容)이 감독하고, 김승호, 황정순, 신영균, 김지미, 신성일, 엄앵란이 출연해, 제3회 대종상과 제1회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후 연극 ‘혈맥’은 끊이지 않고 공연됐고, 각 극단에서의 공연 뿐 아니라, 학생극으로도 여려 차례 공연되었다.

윤광진(1954~)은 서강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 바버라 대학원 출신이고, 우리극 연구소 소장,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 뮤지컬 연극학과 교수다. 1994년 동아연극상 연출상, 작품상, 2007년 서울연극제 작품상, 2013 한국연극대상을 수상한 우수한 연출가다. ‘아메리칸 환갑’ ‘못생긴 남자’ ‘로미오와 줄리엣’ ‘그림자 아이’ ‘츄림스크에서의 지난여름’ ‘황금용’ ‘리어왕’ 등 연출작에서 출중한 기량을 발휘했다.

혈맥의 원작은 3막 4장으로 구성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인 1947년, 당시 서울의 외곽 지대이던 성북동의 방공호(防空壕) 세대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세 개의 방공호 주민들과 그 인근 주민들로, 광복 직후의 혼란기를 살아가던 도시 빈민들이다. 특히 세 개의 방공호 중 두 곳의 주민이 월남한 피난민과 일제 징용에서 돌아온 동포라는 점은 이 작품이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세 방공호의 주민들은 공통된 소망이 있다. 그것은 ‘거지 움막 같은 이 땅굴생활’을 하루바삐 면해보자는 것이다. 깡통을 두드려 대야나 두레박, 그리고 남포 등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깡통영감의 후처 옥매(玉梅)는 전처소생인 복순(福順)을 기생으로 집어넣음으로써 땅굴생활을 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처가 죽은 뒤 혼자 거북이를 키워온 털보영감은 거북이를 미군부대 고용원으로 보냄으로써 땅굴생활을 청산하려고 한다. 방공호에 사는 인물 중 원칠은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이지만, 땅굴생활을 면할 대책은커녕 병든 형수에게 약 한 첩 지어줄 힘조차 없다. 그는 지나치게 큰 꿈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로, 담배 목판을 메고 나가 나날의 생계를 해결하는 현실적 생활인인 형 원팔과 매사에 불화를 빚는다.

작품의 말미에서 거북이와 복순은 공장 직공이 되기 위하여 각각 아버지.어머니의 눈을 피해 가출한다. 이들의 가출을 두고 옥매와 털보영감은 길길이 뛰지만, 깡통영감은 젊은 것들이 새 세계를 찾아 나선 것이라고 위안한다.

한편, 현실과 이상의 갈등으로 대립하던 원팔과 원칠은 원팔의 아내 한 씨의 죽음을 계기로 화해에 이르게 된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광복 직후의 세태와 인정의 기미를 나타내는 데 주력하였으나, 그것을 넘어서 삶의 진실을 형상화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무대는 하수 쪽 배경 가까이 전봇대가 기웃 둥한 모습으로 서있는 게 눈에 띈다. 배경 가까이에 있는 통로는 상수 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다, 이 통로는 하수 쪽에서 오른 쪽으로 향한 내리막길 통로와도 연결되고, 내리막길 끝에는 계단이 있어. 언덕 아래 방공호를 집 삼아 기거하는 움막집의 마당과 연결되어있다. 움막집으로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움집은 세 가구로 나뉘어져 있고, 움집 앞마당에는 깡통으로 대야나 두레박 남포 같을 걸 만드는 장비가 놓이고, 바로 옆에 술동이가 놓여있다.

그 오른쪽에 평상형태의 조형물이 놓이고, 맨 오른쪽에는 풍로와 솥, 냄비 같은 취사도구가 놓여있다. 장면전환에 따라 맨 위쪽 언덕길 전봇대 옆에 천막이 가설되고, 천막 안에서 음주를 한다. 해방 직후의 세태를 반영하듯 메밀묵 사라는 소리와 함께 묵장사가 묵 그릇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고, 등장인물들의 하는 일을 통해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감지할 수 있다. 대단원에는 수레에 시신을 싣고 영구타령을 부르며 언덕길로 퇴장하면, 도시개발의 굉음 속에 움막집은 사라져 간다.

연극은 도입에 흑색정장을 한 미모의 여성해설자의 해설에서 시작된다. 해설자는 장면변화마다 등장해 해설을 하고, 중간에는 극중의 한 배역을 맡아서 호연을 보이고, 대단원에 다시 해설자로 등장해 극을 마무리 짓는다. 깡통을 주어다 연장이나 기구를 만들어 파는 인물, 그의 후처는 함경도 아낙이라 또순이 사투리를 제대로 사용하면서 전실 자식인 딸에게 성깔을 부리고, 의붓딸을 소리꾼을 만들어 요정으로 내보내려 든다.

맨 오른쪽 움막집에 사는 나이든 홀아비는 아들과 살지만, 아들 장가보내기 보다는 매파가 소개해 준 젊은 아낙에게 회가 동해, 만사 제쳐두고 젊은 아낙을 집으로 데려다 첫날밤을 치른다. 그런데 다음날 그의 모습이 한물간 표정이다. 젊은 여인은 상황을 살피다가 홀아비의 모아놓은 돈 자루를 들고 도망쳐버린다. 이 극에서 복선으로 홀아비의 아들은 깡통연장 만드는 집 딸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이 된다.

그 집 딸도 홀아비 집 아들을 좋아한다. 두 사람은 의붓어미가 소리를 가르쳐 자신을 요정에 내보내려 하니, 홀아비 집 아들과 새 삶을 찾아 도망쳐버린다. 가운데 움집에서 아들 둘에게 의지하고 사는 과수댁은 찬송가를 부르는 게 일상인 듯싶다. 과수댁 두 아들 중 한명은 목판에 담배를 담아 장사를 하고, 아우는 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인물이라 이상주의자 행세를 하며, 경제력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병상의 형수에게 약 한 첩 지어주지 못하니, 형제간의 다툼이 끊이지를 않는다.

아우의 깔끔한 모습 때문인지 주점여인의 구애를 받기도 하지만, 그 여인을 받아들일 능력은 없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래서인지 아우는 움막집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설현장 노동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현장으로 간다. 그러나 얼마 후 아우는 낙상해 다리를 다치고 동료 노동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한다. 그 모습을 본 형이 아우를 부등켜 안아준다. 홀아비는 잃은 돈 자루와 여인의 행방을 찾으며, 집나간 아들을 찾는다. 그러나 동리사람들은 홀아비 아들이 이웃 집 딸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 외에는, 아들이나 돈 자루를 들고 뺑소니를 친 여인을 찾지는 못한다.

오랜 병석에 누워있던 가운데 움막집 형의 아낙이 죽는다. 마을사람들이 상여대신 수레에 시신을 싣고 영구타령과 함께 퇴장하면, 극중 홀아비의 젊은 아낙 역을 했던 여성해설자가 다시 검은색 정장으로 등장하고, 지역개발에 따른 움막집을 철거하는 기계음이 펼쳐지면서, 해설자가 움막집이 이제는 자취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해설가 함께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장두이, 이호성, 조영선, 조용태, 김용선, 이영석, 전국향, 곽수정, 황연희, 최광일, 문욱일, 백익남, 김혜영, 문현정, 정현철, 이기현 등 출연자 전원의 성격창출과 호연, 그리고 열연은 2시간 반 동안의 공연에 관객을 몰입시키고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남성출연자들의 호연이 볼거리이지만, 김용선, 전국향, 곽수정 등 여성 출연자들의 호연이 기억에 남는다.

무대 이태섭, 조명 조인곤, 의상 이윤정, 소품 이경표, 분장 이동민, 음악 미스미 신이치, 움직임 이경은, 드라마트루크 이재민, 방언지도 백경윤, 음향 유옥선, 조연출 박홍근, 조연출보 정혜진 그 외의 스텝 진의 열정과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재)국립극단의 김윤철 예술감독, 김영수 작, 윤광진 연출의 ‘혈맥(血脈)’을 기억에 길이 남을 걸작연극으로 만들어 냈다./뉴스프리존=박정기 문화공연칼럼니스트]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