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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김원봉 선생 '독립유공자' 지정 후 '서훈' 수여 수순 행보 밟나
'유공자 지정논란' 약산 김원봉 토론회 독립기념관 4월 1일 개최
  • 김종용 기자
  • 승인 2019.03.29 18:57
  • 수정 2019.03.3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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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모두 벼랑끝에 살았던 약산

보훈처를 둘러싼 정쟁이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이름을 다시 소환했다. 보훈처는 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검토 중이다. 이런 가운데 국가보훈처 산하 독립기념관이 다음 달 1일 약산 김원봉 독립운동 업적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의열단원 박차정(왼쪽)과 의열단장 김원봉의 결혼사진. ⓒ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토론회 개최 사실이 알려지자, 벌써부터 국가보훈처가 김원봉 선생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해 '독립운동 업적 재평가'에 들어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김원봉 서훈 법률 검토를 의뢰했고, 정부 법무공단은 지난해 12월 "서훈이 상훈법 위반이 아니다"고 답변을 받았다.

정부 법무공단은 김원봉 선생이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가 아니어서 서훈 취소 사유를 규정한 상훈법 8조 2항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근거를 설명했다. 앞서 국가보훈처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광복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김원봉 의열단 단장을 올해 3·1절 계기에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동안 김원봉 선생은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전력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이 어려웠다지만, 국가보훈처의 이런 행보가 김원봉 선생에 대한 서훈을 기정사실화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지난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약산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며 피우진 처장을 비롯한 보훈처를 맹비난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좌파의 독버섯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고 있다”면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드디어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운을 뗐다.

약산이 1948년 정부수립 전 북한으로 건너가 국가검열상, 노동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요직을 지냈음을 부각하면서 내심 '좌파 정권이 좌파 인사들에게 서훈을 내려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진과 2진으로 나눠 고국으로 돌아왔다. 2진으로 돌아온 약산은 조국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좌익과 우익 모두 그를 멀리했다. 그를 기다린 것은 친일경찰들의 폭행이었다. 경찰과 극우 청년단체들은 공공연하게 협박하고 암암리에 위협을 가했다.

약산이 구속된 것은 1947년 3월 22일이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몰린 것이다. 중부경찰서에 구금된 선생은 일제하 최악의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은 풀려나자마자 전 의열단원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고 한다.

약산은 일제 군경이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붙잡으려고 했던 항일투사이다. 그런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의 최악질 노덕술에게 붙잡혀 철장에 갇히고 온갖 수모와 구타를 당했으니 3일간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약산 김원봉의 이북 선택과 오해와 진실은 무엇인가

남과 북 양쪽에서 다 내몰린 비운의 항일 독립투사이자 혁명가인 약산은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19년 의열단을 조직, 조선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 암살 등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주도했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에 진정한 독립투사는 김원봉뿐'이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1930년대에는 조선 혁명학교 교장 겸 민족혁명당 당수, 아시아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조선의용대 총대장 겸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 등 우리나라의 독립과 건국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해방 후 민주주의 민족전선 대표를 역임하며 좌우 합작 민족통일에 힘써왔으나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등을 지냈다. 그는 1958년 김일성을 비판하다가 숙청됐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독립에 대한 공적이 사실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던졌지만, 그는 늘 월북이라는 멍에를 지고 있었다. 남과 북은 그를 밟고 섰고, 그의 이름을 철저히 지웠다. 반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그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평생을 독립운동을 연구해온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한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내 건 김 현상금 1위가 약산이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제와 친일 매국노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었다.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는 60만 원의 현상금을, 약산에게는 100만 원을 걸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약 200억~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해방 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하나 된 조국 통일운동으로 좌우 합작을 도모하며 언제나 우리 민족의 살길을 늘 고민하고 시대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실천한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밤낮없이 오로지 민족만을 바라보고 행하였던 그의 항일투쟁은 오늘날 과연 제대로 평가나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새겨 보아야 한다. 좌우의 논리로 정파적 프레임이라는 틀속에 가두어 평가하는 자체가 너무나 모순된 행동이다. 약산의 항일운동은 오직 조국과 민족만을 위해 많은 젊은 의열단원들과 함께 피로써 투쟁하고 맞서 왔다.

일제기관 파괴와 친일 매국노 처단 등 적극적인 무력항쟁 노선을 실천에 옮기는 단체는 오직 의열단뿐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가 이끈 의열단은 독립운동 역사상 괄목한 만한 활동 성과를 남겼다.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해방될 때까지 총과 폭탄을 놓지 않았다. KBS 다큐영상 캡처

조선의용대는 1941년 중국공산당 팔로군이 주둔하고 있는 화북행이 결정되자 약산은 깊은 고심 끝에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중경의 임시정부로 본대를 이끌고 이동한다. 그가 만약 완전한 공산주의자였다면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했을까? 해방 후 조국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좌우 합작을 도모하다 피살된 여운형 선생의 죽음 앞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약산 김원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 가능성을 언급하자 자한당 나경원 원내 대표는 약산 김원봉을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전우용 역사학자는 친일 경찰 노덕술과 서북청년단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짓이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명색이 야당 원내대표라는 나경원 의원이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인 올해 일제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소위 야당 중진이라는 한 정치인의 항일운동에 대한 역사 인식에 대한 허망함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물론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면치 못했다.

오늘날 좌파니 우파니 하면서 이전투구하는 민족분열은 이승만 정권이 노덕술과 같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역사학자들 생각이며 오히려 노덕술을 반공 투사로 변신시켜 훈장을 주면서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것이 국민분열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다.

영화 '암살'의 약산을 보고 '대한민국 만세' 외친 사람들은 누구인가

광복절 70주년을 앞둔 지난 2015년 8월 6일 국회에서 1천만 관객을 기록한 흥행대작 영화 '암살' 상영회가 열렸다.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보도자료는 김무성 전 대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전한다.

"이 영화는 1933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만약 현재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을 했을 것인가' 자문해보기도 한다. 영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큰데, 우리 국민 모두의 애국심을 다시 한번 고취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가 그 시대로 돌아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보자."

2015년 8월 6일 영화 '암살' 국회 시사회에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김무성 대표 등 주요 인사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더 팩트

그날 김무성 전 대표와 당 주요 인사들은 영화를 보고 제대로 필 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대한독립 만세!"라고 만세 삼창을 외쳤다. 이렇게 영화 '암살'이 대중들에게 특별히 각인을 하게 한 역사적 실존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이다. 하긴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소리높이 만세를 부르지 않으랴.

자한당은 약산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며 서훈 언급을 한 피우진 처장을 비롯한 보훈처를 맹비난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4년 전, 광복 70주년에, 그것도 약산을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게 한 영화 '암살'을 보고 당 지도부가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외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북한 고위인사에 대한 찬양과 고무인가.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자한당 수뇌부의 자가당착인가. 이러한 자한당의 논란 속에서 약산이 지금 살아 있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참 아이러니한 것은 김무성 전 대표의 부친 전 전남방직 회장 김용주가 일제에 비행기 헌납까지 한 대단한 친일 매국인사라는 것이다. 그날만큼은 그도 한가닥 애국심이 분출되었던 모양이다.

결론은 좌편향 이든 우편향이든 잔학한 일제로부터 대한독립을 위해서 희생했다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좌익과 우익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민족을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했나, 안 했나'가 중요한 거다.

김종용 기자  doa11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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