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레사 기자] 4.3 희생자 추념식, 문재인 대통령 대신해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제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 4·3평화공원에서 국가추념식으로 엄수됐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12년 만에 4·3 추념식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4·3 영령을 추모했다.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제주 4·3 사건은 1947부터 1954년까지 7년여 동안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인 2만5000~3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비극적 사건 중 하나다.

이 사건은 1947년 3.1절 군중을 향한 경찰의 발포를 계기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간 제주도 전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제주 4.3사건 71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이 이념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으로 가는 길”이라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끝까지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SNS를 통해 “더딘 발걸음에 마음이 무겁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제주 4.3은 여전히 봄 햇살 아래 서 있기 부끄럽게 한다”며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고 배·보상 문제와 트라우마 치유센터 설립 등 제주도민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일에 더욱 힘을 기울이겠다. 대통령으로서 끝까지 챙기겠다”고 강조했다.

死삶 - 끝나지 않은 역사, 빌리 브란트 총리가 생각 나는 이유

지금부터 약 49년 전 일이다. 당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헌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에 대해 사죄했다.

예고되지 않았던 총리의 돌발행동에 보좌관들은 당황했지만 세계는 감동하며 독일의 역사청산 의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후 브란트 총리의 정책과 행보는 그의 눈물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브란트 총리, 네이버 갈무리

위 사건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그의 사과 한 번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브란트 총리는 독일의 수상이기 전에 나치의 피해자였다. 반 나치 투쟁을 하다가 나치에 쫓겨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명백히 피해자이며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을 대표해 지난날 독일이 저지른 과오를 사과했다.

왜였을까. 자신의 잘못도 아니며 심지어 피해자인 그가 독일의 과오를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과한 이유 말이다. 좋든 싫든 그 역시 독일인이며 독일 정부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닌 자신의 신분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한 것.

피해자이지만 자신이 결국 독일인이고 독일의 정치인이기에 일정부분 책임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또 독일이 전범국이란 오명을 씻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선 자신의 사과가 꼭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는 독일에 대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독일에는 언제 또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는 국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유대인과의 악화된 감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독일이 계속 그런 상황에 처해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가 나서서 사과를 한 것이다. 그 후 제2, 제3의 브란트 총리가 독일에서 등장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까지 나치의 범행에 대해 사죄하고 눈물 흘리기 시작했다. 브란트 총리의 사과가 독일 사회 전체를 각성시키며 나치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역사를 정리하려면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려 과거와 맞대면해야 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 사과한 연설 중 한 마디를 빌려보면.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제는 미래를 함께 생각합시다.’

제주 4.3 사건

해방이 되자 미군이 왔습니다/미군이 오고, 군인이 오고/지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오고/모두 무기를 들었습니다/어머니, 나는 죽음이 두려웠습니다/나는 산에 숨었다 잡히어 빨갱이가 되었습니다/나는 빨갱이가 아니라 하였습니다/빨갱이가 아니라면 산에서 잡혀온 다른 빨갱이를 이 죽창으로 죽이라 하엿습니다/눈 감고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며 반은 미쳐 내 이웃을 향하여 죽창을 들고 찔렀습니다/피 묻은 죽창을 들고 내가 미쳐서 소리지를 때/희미한 여명 속에 “겨누어 총! 쏘아!” 하는 소리가 반복되고/사람들은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모두 구덩이에 처박아 휘발유를 뿌려!/어머니, 그 시국에 우리는, 제주 땅에 태어난 죄로 허망하게 쓰러져야 했습니다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 중에서 -문무병)

제주 4.3 역사 기록 갈무리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사건이 있다. 그럼에도 사건발생 50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0년에 이르러서야 제주 4.3 특별법(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그때부터 비로소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됐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하면서 55년 만에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제주도민들의 한은 풀린 것인가.

지난 4월 2일 ‘평화의 섬’ 제주에서는 4.3 57주기를 맞아 추모 전야제가 열렸다. 일종의 축제인 전야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감히 손댈 수 없는 한의 실타래였던 제주가 이제 조금씩 그 실을 스스로 풀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성항공의 취항으로 5만원이면 제주에 발을 디딜 수 있지만 당시 나에게 비행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인천에서 제주로 출항하는 오하마나호의 3등 칸은 나들이 떠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만원이었다. 통닭에 소주를 곁들여 수다보따리를 풀어놓는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이 놀다갈 그 땅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피와 한으로 얼룩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귀향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으로 사는 게 팍팍한 때였다. 이와 함께 극심한 흉년, 일제 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 행위는 광복에 대한 제주민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려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월 1일에 발생한 발포는 민심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3.1사건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이는 한국에서 유례없는 관공서, 민관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 95%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미군정은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 사람으로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단원 등을 대거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2500 여명이 구금됐고 계속되는 고문치사사건과 우익의 테러는 제주사회의 폭발을 부추겼다. 조직노출로 위기에 처해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일부세력은 무장투쟁을 결정했고, 드디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함으로써 비극의 막을 열었다.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으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을 통해 평화적 사태해결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과 이를 지원한 미군정에 의해 평화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 총선거가 무산되었고, 교체된 신임 연대장 박진경은 부하대원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양측은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이는 폭풍전의 고요일 뿐이었다.

제주 4.3 역사 기록 갈무리

화산섬 곳곳엔 역시 동굴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동굴 하나하나에 피의 상흔이 있었다. 아이가 울자,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고 자기 손으로 아이를 죽여야 했던 사연, 살려줄테니 동굴에서 나오라고 한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한 이야기가 내 눈 앞 동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니. 북제주군 북촌리에는 ‘너분숭이’라는 곳이 있다. 북촌은 해안마을임에도 5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무더기로 학살된 곳이다.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갓난아이들은 돌무더기로 대충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 무덤자리가 바로 이곳 ‘너분숭이’라는 것이다.

남한정부가 수립되며 제주도 문제는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됐다. 경비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채택한다. 해안 마을에 피난 온 주민들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자, 살기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은 더욱 늘어났다. 그런데도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빨갱이가족이라며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했다. 재판절차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마을 근처에서 경찰 2명이 사살됐다는 이유로 아무 영문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몰아넣고 집단 총살시킨 것이다. 49년 3월, 사면정책이 발표되어 많은 주민이 하산하였고 그해 5월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즉결처분 한 것이다. 산사람에게 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겨우 살아남은 한 두명 마저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세상에서 잊혀지게 만든 야만의 시대. 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어 제주 4.3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후 연좌죄, 국가 보안법은 끊임없이 제주를 억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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