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기소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한다” <1997. 4. 17. 대법원>

[뉴스프리존= 온라인뉴스]  5.18은 민주화운동이다. 사법부는 당연한 이 명제를 확인하며,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시민을 살해한 살인범에게 단죄를 내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5·18항쟁에 대한 왜곡은 암세포처럼 퍼져나갔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왜곡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이 기억하고픈 ‘5.18’은 정당한 국가 권력에 시민이 폭력으로 대항한 ‘폭동’이다. 이들은 ‘보수’라는 외피를 둘렀지만 극우세력으로, 5.18에 북한이 개입됐다고도 주장한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맥락(context)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사실(fact) 중 몇 개만 취사 선택해 자신들의 이념틀로 재구성한 뒤 , 다른 사실은 무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시민군의 사진을 보고, 총을 들고 있으니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최근엔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왜곡의 수준도 심해지고 있다. 1997년과 2002년 5·18 항쟁 관련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5·18 항쟁은 항구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으니 이런 왜곡 시도는 일부 극우세력의 일탈로 규정하고 무시하면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올해 5·18 기념재단이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5·18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5·18이 북한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9.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60대 이상은 그 비율이 16.3%로 평균의 2배에 달했다. 5·18이 불순 세력이 주도한 폭력 사태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14.2%로 집계됐는데, 특히 50대와 60대 이상에선 그 수치가 17.5%, 26%로 집계됐다.

5.18항쟁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믿는 사이, 그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오염됐고, 방치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더 이상 진실이 오염되는 걸 막기 위해선 5.18에 대한 왜곡 근원부터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왜곡 주체, 방식, 과정을 정밀 분석했다.


● 왜곡 근원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불순 세력 주도설’

5·18 불순분자 주도설, 북한 개입설은 새롭게 제기된 건 아니다. 5·18 항쟁 당시 폭력 진압을 자행한 전두환 씨 등 신군부는 항쟁 당시부터 불순분자 주도설을 퍼뜨려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은 담화문에서 “5·18은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거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고 있다고 발표해 사실을 호도했다.

하지만, 호응은 없었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의 5·18 항쟁과 관련된 키워드 사용량을 시기별로 분석했다. 그 결과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1987년을 기점으로 시위대의 폭력성에 방점을 찍은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광주항쟁’으로 대체되고,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1987년 국회 5·18 특위(광주 청문회),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 실시된 역사바로세우기와 5.18특별법 제정 등 5·18에 대한 평가가 제도화되면서 ‘광주사태’라는 표현의 거의 사라졌다. 언론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5·18 항쟁에 대한 평가는 끝난 듯 했다.

하지만, 2000년 대 이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2002년을 기점으로 5·18 항쟁을 ‘광주사태’로 규정하거나 이런 주장을 인용한 언론 기사가 증가하기 시작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3년 5·18 항쟁을 ‘광주 폭동’으로 규정한 기사나 그런 주장을 인용한 기사가 대폭 증가한다.

언론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볼 때, 2016년 현재 5·18 항쟁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결과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2002년과 2013년이 분기점이 된 것일까?


● 끝나지 않은 5·18 항쟁 진상 규명…왜곡 세력의 잠복기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포털사이트 네이버, 다음, 네이트의 블로그와 카페 게시글, 해당 포털사이트를 통해 검색이 되는 웹문서, 뉴스 등을 분석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기원과 주체, 전개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다. 5·18에 대한 왜곡의 두 축이 ‘5·18은 폭동이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라는 사실에 근거해 검색 키워드로는 ‘광주+폭동’과 ‘5·18+북한군’으로 설정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 기준, 공공의 영역이라고 할 언론지면에 5·18 항쟁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첫 기사는 1980년 5월 31일이었다. 당시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계엄사령부가 5·18에 대한 경위와 사후처리방침에 대한 발표문을 실은 것이었다. 이후 1980년에 몇 차례 더 5·18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가 등장하지만, 이 또한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인용하거나, 해당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인용한 것으로서 결국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주체는 신군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5·18 관련 키워드별 사용량 분석 결과와 같이 이후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 정권 교체 극우세력의 역습

그런데 16대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여 앞두고 있던 2002년 8월, 한 보수성향 일간지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는 제목의 광고가 게재된다. 해당 광고는 5·18항쟁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하며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또, DJ 정권의 사람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해, "(대통령)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고를 게재한 곳은 극우 칼럼리스트 지만원이 대표로 있는 시스템사회운동본부였다.

광고라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언론이라는 공적 영역에 다시금 5·18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한 건 생경한 일이다. 북한 배후설은 신군부가 5·18 당시에도 유포한 것이었지만, 북한 특수군이 5·18 항쟁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해당 광고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5.18 왜곡을 연구해 온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2002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오 교수는 “1997년 대법원이 전직 대통령 전두환에 대해 내란(12.12 쿠데타) 및 내란목적살인(5·18 항쟁)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후 숨죽이고 있던 보수 세력이 반발했었다”며, 일간지에 해당 광고가 게재된 것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던 극우세력이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또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 인터넷 보급과 종편 탄생…왜곡의 심화

하지만, '왜 2002년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전에도 전두환 씨 등 신군부 인사를 중심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사회적 자정 작용에 의해 걸러졌고,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5·18 항쟁에 대해 소리 높여 ‘폭동’이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2002년 이후 지만원과 같은 왜곡세력의 주장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전문가들은 익명성과 무한 복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의 보급을 이유로 꼽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2002년에 전체 가구의 70.2%에 보급될 정도로 대중화됐다. 이후에도 가구 인터넷 보급률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2012년에는 82.1%에 달한다. 스마트폰도 대중화되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국민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인터넷 대중화는 5·18 왜곡 담론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증가, 그리고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심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경향을 특정한 이벤트를 기점으로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보였다.

위 그래프는 ‘광주 폭동’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이다. 인터넷 상에 간혹 등장하던 ‘광주 폭동’이라는 용어가 의미있는 수준으로 관찰된 것은 2007년 8월이다. 2007년 7월, 5·18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된 것이 계기였다.

인터넷 상에선 ‘화려한 휴가’가 5·18을 미화한 것으로 실상은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게시글들이 올라왔는데, 한 언론사는 ‘화려한 휴가’를 본 누리꾼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이른바 전사모 회원 간에 댓글 전쟁이 붙었다며, "(전사모)회원들은 5·18을 공산폭동으로 규정지으며 전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고 댓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2009년 3월과 5월, 2011년 5월, 2013년 5월 시기별 최고점을 기록했다. 2009년 3월은 용산 참사와 이후 전개된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던 시기이다. 당시의 게시물들은 ‘촛불 집회가 소수 불순세력이 주도했고, 과거 5·18도 불순세력이 주도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2009년 촛불 집회를 비판하면서 29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5월 이명박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행사에서 5·18 항쟁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5·18항쟁 단체들이 행사 참석을 거부했던 시기이다.

20011년 5월은 5·18 항쟁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과 관련해 극우단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한 시기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등을 찾아가 “광주시민 학살은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이들 단체들은 “5·18는 북한군이 개입된 폭동이었다”며  “잘못 알려진 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 폭동’이라는 키워드로 가장 많은 게시물이나 뉴스가 검색된 시기는 2013년 5월이다. 2011년 12월 개국한 종편 <채널A>와 <TV조선>은 201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탈북자 인터뷰를 마련했다. <채널A>는 5·18당시 북한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인터뷰를 검증 없이 방송했다. 뒷모습으로 목소리만 나온 한 탈북자는 “광주 폭동 때 참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조장, 부조장들은 (북으로 돌아가) 군단 사령관도 되고 그랬다”며, “전라도 사람들은 광주 폭동이 그렇게 들통 나면 유공자 대우 못 받는다”고 말했다.

<TV조선>은 북한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임천용이라는 인물을 출연시켜, “(5·18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침투했다”며,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고 북한에서 내려온 게릴라였다”는 주장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해당 방송으로 두 종편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적·사회적으로 공고화된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의미와 희생자와 참가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우려가 크다”며 중징계를 받았고 해당 종편은 사과 방송까지 했다. 하지만, 왜곡 발언이 담긴 방송 내용은 사진 또는 게시물 형태로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퍼진 뒤였다.


● 지속적 왜곡…의혹을 넘어 '담론·논란'이 된 왜곡

위 그래프는 ‘5.18+북한군’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이다. 5·18 항쟁은 폭동이었다는 주장은 신군부에서부터 제기되었지만, ‘북한특수군 개입설’의 출발점은 추적 결과, 앞서 소개한 2002년 신문 광고였다. 물론 그 이전에 준비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외부로 공개돼 인터넷으로 추적 가능한 출발 시기는 2002년이다. 다만, 당시에는 큰 반향이 없었다. 그랬던 것이 2009년 10월에는 인터넷 상에 의미 있는 수준으로 관찰됐다.

계기는 탈북자들의 주장, 특히 북한특수군 출신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2009년 6월, ‘자유북한군인연합’이라는 단체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투입되었다는 내용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이 발간했는데, 이 책이 5·18에 북한군 투입된 증거라는 글이 블로그와 게시판 등에 광범위하게 게재됐다. 저자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의 대표는 앞서 종편에 출연해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임천용이다.

하지만,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증언자로 등장한 탈북자 중에 실제로 1980년 5월,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사람은 없다. 김희송 전남대 교수의 "5·18 역사 왜곡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증언은 친구나 직장 동료 등에게 들었던 소문이거나 심지어 ‘군당비서에게 들었다는 아버지의 전언’ 등 전언의 전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북한이라는 특수성,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북한을 실제로 경험한 탈북자의 이야기라는 접근의 제한성을 바탕으로 이들의 ‘전언’은 사실로 포장돼 필요에 따라 소비됐다.

왜곡 과정을 분석해보면, 탈북자의 전언에 바탕한 ‘북한 특수군 개입설’이 대표적으로 소비된 시기가 2011년 5월이었다.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 극우단체들이 탈북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며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 반대운동을 펼쳤던 때다. 그리고 2013년 5월, 종편이 ‘북한 특수군 개입설’을 여과 없이 방송하며 대량 유통됐다.

이런 결과를 종합하면, "5·18은 폭동"이라거나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식의 주장은 보수 정권이 촛불 집회 등과 같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고 5·18 항쟁의 제도화가 진전되는 이벤트가 있을 때, 그리고 종편 출범 이후에 증가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5·18 왜곡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실체는 뭘까?


● '극우 이론가 + 일베' 왜곡담론 생산과 유통 분업 구조

앞서 살펴본 그래프를 다시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검색에 잡힌 게시글 대부분은 포털 내에 개설된 블로그나 카페가 아니라 별도 사이트에 올라온 글, 즉 웹문서다. SBS <마부작침>의 분석 결과, 웹 문서는 다른 사이트의 글을 공유해 게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위 그래프는 게시글 공유 정도에 따른 사이트별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화살표 방향은 사이트 간 글이 공유된 방향을 나타내고, 선의 굵기는 공유 빈도수에 비례한다. 이 결과를 보면 김대령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사이트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라는 사이트의 글이 집중적으로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 사이트인 해당 사이트 글의 대부분은 운영자인 김대령과 지만원이 작성한 것으로, 주된 논지는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5·18 왜곡 담론이 지만원과 김대령이라는 인물에 의해 생산됐다면, 유통은 극우성향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저장소, 소위 ‘일베’를 통해 이뤄졌다. 광주 사람을 ‘홍어’라고 비하하거나 5·18 항쟁 당시 사망자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사진을 두고 ‘시체놀이’ 등으로 비하해 물의를 일으켰던 ‘일베’다. 일베에서 ‘5·18 북한군 개입’ 게시글이 2012년 11월 30일 처음 등장한 이래, 2016년 5월 13일까지 809건이 게시됐다.

이는 해당 기간 동안 전체 웹문서 게시글의 88.6%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북한군 개입설’이 일베를 통해 대부분 유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베 내에서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내용의 게시글도 2012년 5월 처음 등장한 이래 5월 13일 현재까지 1,832건이 게시 됐는데, 이는 해당 기간 전체 웹문서의 18.8%를 차지하는 수치다.

● 집단 극단화로 신념화 된 5·18왜곡

5·18 기념재단과 광주시를 중심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대책위를 만들어 신고 센터까지 운영하고 있지만, 5·18 왜곡은 끊이지 않고 있다. 5·18 왜곡 담론 생산 및 유통자들은 ‘정부의 5.18 민주항쟁 결과 발표는 사실을 호도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라며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같은 보수인사라고 하더라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거나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으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베 네티즌 5.18 묘지 참배 (ⓒ연합뉴스)단초는 있다.
 
지난 2014년 7월 11일, 5·18 항쟁을 폄하한 일베 회원 2명이 국립 5·18 묘지를 찾아 고개를 숙였다. 5·18 역사왜곡대책위가 일베에서 5·18 항쟁 폄하글을 주도적으로 올렸던 이들은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하자, 이들 회원 2명은 일베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사과문을 올리고 5·18 묘지를 찾아 사죄한 것이다. 이렇게 5·18 왜곡 담론을 퍼뜨린 사람들에 대해 적극적인 사법처리 의지를 보이자, 일베 내에서 5·18에 대한 왜곡 게시글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이와 관련해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사법 처리가 능사는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현재로서는 5·18 왜곡 담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적극적 사법처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인터넷 사용이 활성화되면서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화하는 의견만 받아들이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집단 극단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5·18 왜곡담론’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논리나 사실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사법처리를 통해 왜곡담론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와 우리 사회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한 5·18 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데도,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대통령 비판 등 정부 정책 왜곡에 대해서 적극적·공격적으로 대응하면서도 5.18 왜곡에 대해선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또, 2009년 이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정부가 논란을 부추긴 면도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 회담에서 야당 원내대표들이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자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또 불허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5·18이 다시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 결과는 5·18 항쟁이 현안이 될 때마다 5·18 왜곡도 증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5.18 항쟁 왜곡에 대해 정부의 대응은 어떠할까. 나치의 선전 장관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그 다음 의심 받지만, 되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이 5·18 왜곡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5.18 민주화운동의 왜곡이 바로 그렇다. “한 문장만 있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 나치 선동가 괴벨스. 악마로 평가받는 그조차 “99%의 거짓과 1%진실을 배합하면 100% 거짓보다 훌륭하다”고 말했지만, 5.18 역사 왜곡은 1%의 진실도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광주 태생의 시민에게 단 하나의 근거도 없이 5.18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북한 특수군’이라고 지목하는 방식이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 방식과 결과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과 궤를 같이한다. “이왕 거짓말을 하려면 최대한 크게 하라”는 괴벨스의 말을 충실히 따랐고,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에는 수많은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고, 반박하려 할 때면 이미 사람들은 선동돼 있다”는 말은 5.18 왜곡의 결과로 귀결됐다. 무대응이 논란을 줄일 수 있다며 5.18 왜곡에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이, 0.1%의 진실조차 없는 거짓에 ‘의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확대 재생산된 의혹은 어느새 담론이 됐고, ‘논쟁거리’라는 제목까지 달게 됐다.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왜곡된다는 말처럼 1988년 광주청문회, 1995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5.18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지만,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5.18에 대한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5.18을 모르는 세대들이 생겨났다. 이런 ‘망각’의 틈을 타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은 전염병처럼 퍼졌고 불행하게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에 반박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다.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5·18항쟁①왜곡의 실체> 기사에 이어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 왜곡 담론의 실체를 분석했다.


● 5.18 진실: '민주화 요구'에 대한 '전두환의 내란 목적 살인'

‘5.18(1980)’은 민주화 운동이다. 진실 발견에 시차가 컸지만, 8년 뒤 열린 광주 청문회, 5.18특별법(1995), 이듬해까지 이뤄진 검찰 수사와 5.18 국가기념일 제정(199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2007),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2011)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시민운동으로 거듭 확인됐다.

5.18민주화 운동의 개요는 이렇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신군부 세력인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씨를 중심으로 내란이 일어났다. 12.12 쿠데타(1979)다. 군(軍)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 씨는 ‘국회 해산,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개입 계획이었다. 5.18 하루 전날인 17일, 신군부는 병력을 동원한 상태에서 국무회의를 열게 해 시국수습방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정치활동 규제, 집회 전면 금지, 언론 통제, 전국 대학 휴교’ 내용이 담긴 포고문 10호를 발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이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까지 했던 시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였다.

시민들은 또다시 등장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5월 18일 광주 시민 역시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런데 전두환 씨는 자신의 정권 찬탈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해 광주 시민의 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이를 위해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전 씨 주도로 이뤄진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뒤늦게 반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죄 등이 적용됐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 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했고, 전 씨에 대한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 1980년 '신빙성無' 결론 내린 '북한 개입설'

지금까지 내려오는 북한 개입설은 <5·18항쟁①왜곡의 실체>에서 보도했듯 1980년 5.18 항쟁 당시 전두환 씨 등 반란 세력이 시도한 왜곡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왜곡 배경엔 전두환 씨 등 반란 세력의 정당성 확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왜곡은 진상 규명을 통해 거짓이라는 게 입증됐고, 실제 5.18항쟁 당시 기록들도 이를 명확히 증명한다.

북한 개입설의 근원은 1980년 신군부가 유포한 북한 남침설이다. 지금도 등장하는 이른바 북풍(北風)이다. 군병력을 이용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 서리를 맡았던 전두환 씨는 계엄확대를 위해 ‘북괴 남침설’ 정보를 생산했다. 정보 출처는 일본 내각조사실이라고 밝혔는데, 내용은 이랬다.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르는 5월 15일~20일 사이 남침 강행 결정".

중앙정보부는 이런 첩보로 전 씨 등 신군부의 정치개입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명분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첩보의 진위를 판단하는 육군본부는 당시에 이미 ‘신빙성 없음’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1980년 5월 10일 작성한 <북괴 전면 남침설 분석>을 보면 이런 내용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타국(유고) 방문 중 침략 모의 가능성 희박, 남침 예정이라면 각료는 대동치 않음, 북한군 병력 집결 징후 없음. 전쟁 징후 없고, 남침설 신빙도(신뢰도) 희박"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군(軍) 스스로 거짓 정보라고 인정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계엄사령부 참모 회의록에선 “북괴(북한)가 남침을 준비한다는 일본 첩보는 벌써 6번이나 거짓말”이란 취지의 당시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겸 계엄사 부사령관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씨 등은 이런 신빙성 없는 남침설을 이용해 5.18항쟁 이후 “고첩(고정간첩)과 불순 인물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했다”는 담화문을 발표해 민주화 운동을 북한을 배후로 한 난동 또는 폭동으로 몰아갔다. 언론 통제를 통해 거짓을 사실로 만들려 했다. 전 씨 등 계엄군은 1980년 5월 24일 남파간첩이 검거됐다는 발표까지 했다. “5.18항쟁을 선동할 목적으로 독침까지 들고 남파된 간첩 이창용이 서울역에서 검거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거짓이었다. 뒤늦게 공개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보면 이창용에겐 5.18과 관련한 임무는 애당초 없었고, 광주 잠입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났다.


● 과격 진압에 대한 시민의 정당한 저항

전두환 씨 등 계엄군은 5.18항쟁을 '소요사태, 폭동'으로도 몰고 갔다. ‘불순세력이 총기를 들고 군인을 공격하면서 발포까지 하게 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이미 당시 기록을 봐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전남도청에서 작성한 <5.18항쟁사태주요사건 일지>에도 “군 공수부대 2백여 명 투입. 학생 및 학생차림 젊은층 무차별 구타 연행, 혹독한 진압 목격 시민, 흥분 분개”로 기록돼 있다. 군의 폭력적 진압이 자행되면서 시민들을 흥분시켰다는 것이다.

5.18항쟁을 호도하는 세력은 “시민들이 대검(大劍)을 장착한 총으로 군인들을 위협했고, 군은 대검을 장착하지 않았다”는 유언비어를 지속적으로 퍼뜨려 왔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만 봐도 이는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상황일지엔  ‘7空輸隊銃劍鎭(7공수단 착검진압)’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공수단이 사용하는 M16 소총에 대검을 꽂고 진압을 했다는 뜻이다. 또 5.18항쟁 당시 착검을 한 채 누군가를 쫓아가는 사진을 두고 시민이 군인을 쫓아가는 것이라는 왜곡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착검을 한 사람은 ‘7공수여단 서모 중사’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5월 21일 13:00 시민들을 향한 집단 발포 이전인 19일에도 ‘고등학교 3학년 김영찬 군에 대한 계엄군의 총격’이 있었다는 수사기록도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즉,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과 총격이 선행됐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정당한 저항을 했다는 것이다.


● 왜곡 날조된 북한특수군 개입설

앞서 언급된 ‘북한 배후설, 소요사태, 폭동’과 같은 왜곡담론은 1980년부터 시작됐다. 대부분 5.18항쟁 당시 전두환 씨 등 신군부가 생산, 유포했던 내용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이는 앞서 언급한 광주청문회(1988), 특별법(1995) 등을 통해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수차례 확인됐다.

관심을 가져야 될 부분은 새롭게 제기된 왜곡이다. ‘북한 특수군’ 개입설이 대표적이다. 처음 등장 시기도 2000년 이후였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시스템클럽'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지만원 씨가 이런 왜곡을 주도하고 있다. 5.18항쟁 당시 사진 속 광주 시민을 '북한 특수군'으로 지목하는 '막가파'식이다. 이를 토대로 5.18항쟁은 북한 특수군이 기획 연출한 사건으로, 북 특수군이 잠입해 폭동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5.18항쟁 당시 광주 시민 사진과 북한 간부를 연결시켜 마치 '근거'가 있는 것처럼 호도해 왜곡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SBS마부작침>은 사진 속 인물을 추적했고, 취재 결과 해당 주장은 1% 근거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5.18항쟁기념재단'의 협조를 얻어 사진 속 실제 인물을 찾아냈고, 안면 분석 의뢰 및 국가 발급 증명서 확인을 통해 당시 촬영된 사진과 동일 인물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왜곡 세력이 주장한 북한 특수군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마부작침] 광주 북한 특수군 주장 사진

[마부작침] 심복례 주민등록등본 및 제적등본우선 지 씨 등이 북한 김정일의 첫 부인인 홍일천과 동일인물로, 광주 북한 특수군의 줄임말인 ‘광수’ 중 139번 째 라고 지칭한 사진 속 인물은 광주 시민 심복례(73) 씨였다. <SBS마부작침>은 심 씨의 사진, 5.18항쟁 항쟁 당시 사진, 홍일천의 사진을 경찰청 몽타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국내 최고 얼굴 분석 전문가로 꼽히는 최창석 명지대 정보통신학과 교수에게 분석 의뢰했다. 최 교수는 "사진 속 인물은 양쪽 눈의 위치가 수평하고 홍일천은 오른쪽 눈의 위치가 높고 왼쪽 눈이 낮다"며 "두 사진 속 인물은 발제선(이마와 머리털 부위 경계선)과 귀밑에서 턱까지의 윤곽선이 상이한 점 등을 볼 때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최창석 교수는 5.18항쟁 당시 사진과 심 씨에 대해선 "발제선, 광대뼈, 눈썹, 두 눈의 위치 등을 볼 때 동일 인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왜곡 세력이 항쟁으로 남편을 희생당해 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심 씨를 북한군으로 악의적으로 날조했다는 것이다.


[마부작침] 심복례 안면 분석 결과

안면분석 결과만으로도 사진 속 인물은 심 씨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간의 왜곡 과정을 볼 때 이번엔 '북한 특수군이 아니더라도 북한과 연관성이 있다'는 방식으로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SBS마부작침>은 심복례 씨의 동의를 얻어 심 씨 주민등록초본과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확인했다. 등본엔 심 씨의 본(本)은 청송, 전 호적은 '해남군 산이면, 심00 자녀'라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또 1972년에 남편과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북한 특수군은 물론, 북한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뜻이다.

[마부작침] 광주 북한 특수군 주장 사진

왜곡세력이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라며 '광주 북한 특수군(71광수)'으로 지목한 사진 속 실제 인물은 광주 시민 박남선(52) 씨였다. 박 씨와 5.18항쟁 당시 사진에 대해 최창석 교수는 "얼굴자세는 달라도 얼굴 부위 간 세로비율은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양쪽 눈꼬리가 처진 모양, 1자형으로 두툼한 입, 납작한 두상모양, 양쪽이 모두 1자형으로 왼쪽 눈썹 끝이 처진 점이 동일하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최 교수는 "발제선, 눈썹, 눈 코밑, 턱 끝의 간격이 모두 일치 한다"며 "사진 속 인물과 박 씨는 상이한 곳을 찾을 수 없는 동일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사진 속 인물은 황장엽이 아닌 광주시민 박남선 씨라는 뜻이다. 또 다른 왜곡을 예상해 박 씨의 동의를 얻어 주민등록초본, 제적등본도 확인했다. 그 결과 박남선 씨의 출생 장소는 '전남 화순군, 박00씨의 자녀'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심복례 씨와 마찬가지로 북한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것이다.

[마부작침] 박남선 주민등록등본 및 제적등본박남선 씨는 왜곡세력이 문제 삼은 사진에 대해 "1980년 5월 24일 또는 25일경 촬영된 걸로 보이는데,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중 거동수상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장면이 찍힌 것 같다"고 사진 속 인물은 본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박 씨는 항쟁에 참여한 혐의로 기소돼 하급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3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출소한 뒤, 뒤늦게 민주화운동자로 인정됐다. 그런 그를 두고 왜곡세력은 이번엔 북한 특수군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씌운 것이다. 박 씨는 "지인을 통해 나를 두고 북한 특수군이라는 사진이 떠돈다는 얘기를 처음 접하곤 황당했다"고 운을 뗀 뒤, "마치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며 우기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탄식했다. 그는 "더 큰 문제는 5.18항쟁 민주화 항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은 '진짜로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내려왔어'라고 오해하는 현실이고, 이런 잘못된 내용들이 5.18항쟁 항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부작침] 박남선 안면 분석 결과[마부작침] 광주 북한 특수군 주장 사진

북한 특수군으로 지목된 인물은 박남선, 심복례 씨 외에도 더 있다. 왜곡세력은 5.18항쟁을 기록한 영상에 나온 인물도 특수군으로 지목했다. 실제 인물은 확인 결과 망인이 된 백용수 신부였다. <SBS마부작침>은 당시 영상과 백 신부의 생전 사진도 분석 의뢰했다. 최창석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중력에 의해 눈이 더 작아지고 눈꼬리는 더 처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두 사진 속 인물의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처진 형태로 동일하다"라고 밝혔다. 이어 "인중은 오른쪽으로 휜 형, 밑이 깊게 파인 형태의 다크서클, 아래 입술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각도 등을 볼 때 영상 속 인물과 백 신부의 상이한 점을 찾을 수 없고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마부작침] 백용수 신부 이력서 및 제적등본광주천주교재단이 제출한 백용수 신부의 이력서를 통해 1938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 1980년 항쟁 당시 광주에서 사목활동을 한 사실도 확인했다. 백 신부의 제적등본에도 본적이 전남 신안군이라고 명시돼 있다. 백 신부 역시 북한 특수군은 물론 북한과는 어떠한 관련성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1966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5.18항쟁 당시 광주 월산동성당 주임 사제였고, 지난 2004년 선종했다. 백 신부의 조카는 "삼촌이 북한 특수군으로 폄훼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정말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며 "며 "근거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때문에 신부님의 명예만 훼손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마부작침] 백용수 안면 분석 결과

● 괴벨스 답습한 5.18 왜곡…'망각과의 투쟁' 필요

날조로 인해 피해가 커지면서 피해자들은 형사 고소도 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악의적 왜곡으로 박남선 심복례 씨, 고 백용수 신부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최근 지만원 씨를 기소했다. 검찰도 사진 속 인물과 박 씨 등이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으로, 북한 특수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5.18 기념재단은 북한 특수군으로 지목된 사진의 또 다른 실제 인물을 찾아내 왜곡 세력을 상대로 형사고소를 이어가고 있지만, 왜곡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위장 침투했다는 허위 주장을 계속 반복해 5.18 민주항쟁의 의미와 진실을 지속적으로 퇴색시키려는 이유에서다.

나치 선동가 괴벨스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지만, 두 번째는 의심을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다보면 결국에는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고 했다. 5.18 항쟁 왜곡방법은 괴벨스를 그대로 답습한 형태다. 왜곡 단계가 더 커지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하는 이유이고, 이를 위해선 5.18 민주항쟁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왜곡이 일어나게 된 이유도 분명히 밝혀내야한다.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바로 세울 수 없다. 역사의 진실은 끊임없는 기록과 교육, 즉 망각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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