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소설 , 빵굽는 여인 (1회분- 쌍화차 친구)

<1회분>
[뉴스프리존=한애자/소설연재]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삼월 날씨였다. 주변의 공기는 역시 학교를 상징하듯 생동하는 젊은 학생들의 재잘거림과 함께 울려 퍼졌다. 운동장 조회대 쪽에서 학생들을 정렬하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체육교사의 목소리가 때론 거칠게 학생들을 제압하는 기세가 되어 날카롭게 떨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왁자지껄하는 떠드는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는다.
“전체, 차렷!”
학생들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되자 회색 양복을 입은 은회색 머리의 교장이 조회대 위에 올랐다.
“교장 선생님께 경례!”
학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하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군대식으로 손을 머리 이마에 직각이 되도록 경례하는 인사예법도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서 사라졌다. 인사가 끝나자 학생들의 분위기는 또다시 왁자지껄 소란해졌다. 교사들은 이런 학생들의 무질서와 예의 없는 행태에도 체벌할 수 없게 되어 눈치만 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자, 그럼 이번에 새로 본교로 부임하여 온 선생님들의 부임 인사소개가 있겠습니다. 다 같이 박수로 환영을 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체육부장의 힘차고 씩씩한 마이크 소리에 학생들은 잠시 조용하여졌다. 이어서 학교장이 직접 부임해온 교사들의 성함을 부르며 간단하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교장이 성함을 부르면 해당하는 교사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와서 학생들을 돌아보며 인사를 하였다. 여덟 명 정도의 부임한 교사의 인사소개가 끝나자, 교장 선생님은,
“자, 그럼 부임해 온 교사들을 대표해서 민상수 선생님의 부임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교장은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교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전형적인 교사의 분위기를 풍겼고 눈에 띄게 준수한 용모였다. 그가 조회대 중앙에 올라서자 여학생들의 눈빛이 호기심과 함께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학생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저는 올해 교사가 된지 꼭 이십 년째 됩니다. 여러분만한 딸과 아들을 둔 학부모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출근하면서 저의 딸에게 ‘봄날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보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봄의 계절의 푸른 청소년기입니다. 이 시절에 미래를 향한 꿈을 향하여 매진하기 바랍니다. 서양 속담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는 말처럼 꿈이 없는 개인도 망합니다. 인생의 봄날에 무엇을 심어야 하나 깊이 생각하며 학창시절을 보내길 바랍니다. 그런 꿈과 미래를 향하여 달려간 학생은 결코 탈선하거나 방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심은 것이 없으면 거둘 것도 없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다정함과 함께 힘이 있었다. 국어선생님처럼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며 학생들에게 좋은 메시지라도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학생들 앞에 일렬로 서 있는 교사들 중 왼쪽 끝 편에 그를 지켜본 한 여교사는 그 표정이 다른 교사와 달라 보였다. 그는 민상수 교사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매우 긴장되어 보였다. 그것은 안개와 같은 민둥산처럼 자신의 학창시절로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민상수’라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의 준수한 용모도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훈화하는 말솜씨도 내심 관심을 가지는 표정이다. 왜 갑자기 마음의 폭풍이 불었을까! 이 은밀히 진행되는 폭풍우 속에 홀로 싸워야만 하였다.
어느덧 학생들은 교가제창을 하고 조회를 마치고 각자 흩어져 각 교실로 향하였다. 민상수도 남교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무실로 향하였다. 이때 같이 교무실 출입구로 들어서던 여교사들은 모두가 민상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역시 국어선생님이라 그런지 말솜씨가 있어 보여요!”
“맞아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게 보여요!”
전애희는 그렇게 맞장구치는 심 선생을 흘낏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과 달라 보여?’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을 때 민상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떨리며 요동치는 심정을 감추며 태연한 척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민상수입니다. 저 연구부장으로 임명될 줄은 몰랐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 그러면 부장님?”
다른 학교로 연구부장이 전근을 가고 그 빈자리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될 것이라는 소문을 언뜻 들었었다. 그가 바로 민상수라는 것은 매우 뜻밖이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보통 초임 땐 부장자리를 주는 법이 없었는데 실력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옆의 심 선생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잘생긴 민상수를 매일 볼 수 있어 행운인 듯 들떠 보였다. 그날은 서로 간단하게 상투적인 인사를 나누고 바쁜 일정 속에 각자의 수업과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삼월의 시간은 유난히도 빠르게 흘러갔다. 업무상 민상수와 마주칠 때마다 어떤 잠재적인 끈이 사라지지 않는 영상처럼 다가왔다. 그때마다 애써 그냥 지나치려고 노력하였고 떠오르는 생각의 구름을 생활 속의 우산으로 속히 가려버렸다. 그러던 사월의 어느 날, 전애희가 퇴근하려고 교무실에서 나가려 할 때였다.
“잠깐! 전 선생님 같이 가요!”
누군가 등 뒤에서 불렀다. 김춘화였다.
“오늘 차 안 가져 왔죠? 오랜만에 전철 타고 같이 갑시다!”
김춘화는 퇴근길에 자주 동행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전철역 쪽으로 향하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승용차요일제에 걸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근무하는 학교가 일산에 가까운 서부 쪽이라 두 사람은 3호선을 탔다. 김춘화는 전애희와 비교적 트러블 없이 대화가 통하는 편이라 동행하기엔 별 무리는 없었다. 다만 전애희는 별로 말없이 듣는 편이었고 김춘화는 수다를 떠는 편이었다. 사교의 여왕이라 할 만큼 그녀는 두루두루 접촉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장점은 말쟁이로 사람들의 비밀을 누설할 위험소지도 내포하고 있어 전애희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드러내는데 매우 조심하는 편이었다. 김춘화를 통하여 자신에게 좀 결핍된 ‘정보통신망’의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폭넓은 인간관계의 장점을 이용하여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이봐! 전 선생. 마음도 좀 터놓고 살아! 자기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마치 베일에 싸여 있는 여자라고들 하고 있어. 그거 알아?”
새삼스럽게 듣는 말도 아니고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고유의 스타일을 타인들이 저울질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였다. 자신은 개방적인 필요가 있을 때는 지혜롭게 잘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사람들을 의지할 때, 위로보다 배신감과 상처를 많이 겪어서인지 어느 때부턴가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잠잠히 경청하는 편을 택하였다. 그것은 말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유익을 주었다. 경청은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말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원치 않는 자신의 정보가 유출되어 후회할 때가 많았다. 잠깐의 상념 속에 김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애희도 얼떨결에 일어났다.
‘다음 역은 정발산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입니다.’
안내 방송이 들렸다. 두 사람은 전철에서 하차하여 계단을 오르고 백화점 출입구로 다가갔다. 김 선생이 백화점 쇼핑 좀 하다 가자고 하여 동행하였다.
“새로 오신 민상수 선생님 말이야!”
김 선생이 불쑥 내뱉었는데 상당히 마음에 두었다가 아까부터 참았다가 꺼낸 듯하였다.
“네?”
“민상수 선생님, 연구부장 말이야. 여선생님들한테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어머, 그래요?”
전애희는 민상수의 이름이 화재로 드러난 것에 대해 당황했으나 애써 태연한 척하였다.
“잘생겼잖아! 분위기가 있고 왠지 여자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잖아. 총각 때 여자깨나 울렸겠어. 안 그래?”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전애희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어떻게…….”
전애희는 매우 놀랐다. 자신의 뇌리에 한 남자의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사나이는 ‘여자깨나 울리는 남자’로 통하였던 것 같았다. 더군다나 들려오는 이미지의 영상과 외모, 성씨마저도 ‘민’ 씨라서 아연해졌다.
‘설마 그가!…….’
상수와 상현은 다른 이름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옛 모습이 가슴에서 잔잔히 물결치기 시작하였다.
‘세상에는 참으로 닮은 사람이 많구나!’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으며 그냥 묻어두려고 애를 썼다.
“자기는 좋겠네. 같은 부서라서 가까이서 매일 볼 수 있잖아!”
김 선생은 계속 지껄여댔다.
“자기 미녀잖아! 선남선녀끼리 잘 만난 것 같아!”
인물이 없어서 자기는 사십이 넘도록 결혼을 못했다는 그런 인상이었다.
“자기와 너무도 어울려 보이는 이미지라서 말이야!”
“농담 그만하세요!”
전애희는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왜 화났어? 그냥 해보는 소린데…….”
김춘화는 잠시 주춤하더니 누그러졌다. 좀 푼수 끼가 있는 자신이 쓸데없는 상상과 부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본인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어느덧 그들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건강식품코너로 먼저 가봅시다. 마시던 차가 떨어졌거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랐다. 김 선생과 동행하는 백화점 쇼핑은 자신에게 좀 어색하였다. 전애희는 백화점 쇼핑을 늘 혼자 즐겼다. 자신만의 비밀처럼 스타일을 간직하고픈 심리였다. 자신이 즐기는 의상이나 화장품이 어느 회사의 제품이고 어느 브랜드를 입는다는 여교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어서였다. 바겐세일이 있는 토요일 오후에는 마음에 맞는 여교사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쇼핑을 하러 가곤 하였다. 그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 자신이 무슨 심리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자각증세를 보이다가도 그런 모습이 자기답고 자유로웠다.
‘내가 A형이라서 그런가? A형은 숨은 비밀이 많은 타입이라고 하던데!’
이렇게 되뇌고 있을 때였다.
“뭘 드릴까요?”
“네, 쌍화차 주세요!”
“아, 네, 어느 걸로…….”
점원은 여러 모양으로 예쁘게 포장된 쌍화차 종류를 내밀며 김 선생에게 제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웬 쌍화차?”
“응, 아버님께서 즐겨 드시거든.”
“저기 오미자차랑 같이 넣어 주세요!”
“쌍화차는 몸에 좋은가 봐요. 아버님은 늘 쌍화차를 대놓고 드시거든요!”
“그럼요. 한방재료가 들어가서 한약과 같은 성분의 효과로 몸에 보약 효과를 내주고 있지요.”
“꼭 한약 냄새가 나서 한약 같아요. 그런데 왜 계란을 넣어서 드시는지 모르겠어요. 계란의 비린내 때문에 비위가 상할 것 같은데 아버님은 잘 드셔요.”
김 선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야 옛날에는 먹을 것이 귀하여 계란을 넣어 먹으면 몸보신이 된다고 얹어 드셨거든요.”
점원은 자그마하게 포장된 것을 집어 내밀며 말했다.
“이걸 얹어 드시면 훨씬 영양과 맛이 좋습니다.”
그것은 쌍화차 위에 얹어 먹는 고명이었다.
“아, 고명만 따로 파는 것도 있군요? 한 봉지 주세요!”
“더 필요하신 것 없으세요? 곁에 계신 분은?”
“아, 참. 전 선생, 어때 쌍화차 잘 드시나? 내가 선물하고 싶은데…….”
“아, 좋아하긴 해도 나중에 구입하지요.”
“아냐, 서로주고 받아야 정이 생기는 거야. 그동안 전 선생에게 선물 한 적이 없어서 미안했는데 잘 되었네.”
김춘화는 같은 걸로 쌍화차를 주문하였다.
“자기 말이야, 사람이 고전틱 해서 쌍화차 분위기와 잘 어울려.”
전애희는 그냥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흔히 권하는 커피나 녹차도 아니고 쌍화차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저기 인삼사탕 한 봉지 주세요. 우리 김춘화 선생님 잘 드시잖아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
“항상 선생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잖아요.”
전애희는 가끔 업무 차 그녀의 자리에 다가가면 그는 손에 한두 개씩 인삼사탕을 쥐어주곤 하였다. 그들은 쌍화차와 인삼사탕의 교환으로 서로의 친분을 돈독히 해주는 행사를 치렀다. 요금을 계산하고 쇼핑백을 들며 백화점 출입구로 나왔다. 김춘화는 약간 아쉬워하는 듯했다.
“시간 있으면 오늘 날씨도 좋은데 호수공원이나 한 바퀴 돌고 갈까!”
전애희도 싫지는 않아 그들은 호수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4월 초의 날씨라서 제법 쌀쌀한 기운은 사라지고 봄기운이 완연했다. 햇빛이 따사하게 봄을 단장하며 산천초목을 애무하듯 하였다.
“민 선생 말이야. 여자들이 그렇게 유혹을 해도 끔쩍하지 않는 형인가 봐! 전번 학교에서 아는 교사가 그러는데 민 선생을 짝사랑했던 여선생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데?”
수다는 또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푸하하하하…….”
전애희는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유부녀들이 웬 짝사랑!”
“유부녀뿐만 아니라 노처녀들도 그 선생을 사모했다던데?”
전애희는 계속 웃으며 애써 긴장된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태연한 척하였다. 그들은 곧 호수 쪽으로 서서히 거닐기 시작하였다. 잠시 말없이 걷다가, 봄의 풍경에 시야가 사로잡혔다.
“어머? 이젠 완연한 봄이네!”
벌써 푸른 잔디 위에 파릇파릇 잔디가 솟아나고 봄꽃들이 그 빛깔을 단장하며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이곳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호수라면 얼마나 좋을까!”
감상적인 김 선생의 목소리였다. 전애희는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물 밑에서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두 물고기가 서로 입을 마주보고 물거품을 내더니 그 중 하나가 홱 돌아서서 사라졌다. 남은 물고기도 같은 방향으로 그 물고기의 뒤를 좇아 헤엄치듯 내달았다.
“춥지 않을까?”
“글쎄요, 얼음 밑에서도 물고기들은 살잖아요. 마치 강태공의 낚시처럼!”
“강태공은 물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았다는데 이 노처녀 벌써 마흔을 넘겼으니 이제 무엇을 낙으로 삼으란 말인가!”
넋두리 하듯 김 선생은 한숨을 쉬고 전애희의 옆얼굴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긴 늙지도 않은가 봐! 주름도 하나도 없네. 질투 나게 말이야.”
“왜요. 가까이 보면 주름도 늘고 잡티도 많아요!”
“난 인물이 없어 이렇게 노처녀로 늙어가지만 자긴 남자깨나 울렸겠어. 같은 여자인 나도 반하겠는데!”
“뭘요, 이젠 사십이 넘었는데요.”
“어쩜, 삼십대 같아. 어디 러브스토리 좀 들려 줘. 심심한데 말이야!”
봄처녀처럼 사랑하는 이성을 그리워하는 김 선생의 심정이 좀 애처로워 보였다. 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민상수를 만나서 그런지 그녀의 가슴은 사랑의 물결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사십이 넘은 노처녀라고 푸념하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언제나 당차고 밝고 씩씩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에 대해서도 무관심해 보였는데 러브스토리를 운운하는 걸 보니 몹시 외롭고 심적인 사랑의 생동감이 반짝이고 있는 듯하였다.
“자긴 정말 미녀라서 남자들이 많이 따라다녔겠어!”
“미녀도 차이기도 하는데요, 뭘!”
전애희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쏟았다.
“설마, 전 선생이 차였겠어!”
“……!”
잠시 침묵 속에 잠겼다. 김춘화는 전애희의 러브스토리를 추궁하다 지쳤는지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여고시절의 국어선생님을 사랑하였던 그 열정! 그분의 잘생긴 모습이 민상수와 같은 국어선생님이라 영상이 된다고 하였다.
“민 선생을 보면 자꾸 그 국어선생님이 떠올라요.”
“국어선생님이니까 문학적 감수성이 깊을 것 같네요.”
“맞아! 멋있는 시인이었지. 그 선생님이 살아계실까 하며 가끔 떠올리기도 하지만.”
감회어린 그녀의 얼굴엔 세월이 자신을 자꾸 외롭고 비참하게 가둬두는 듯 쓸쓸하다고 고백하였다.
“그땐 정말 행복했었어.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였던 그 순간은 정말 살맛이 났고 내 세상인 듯하였으니까. 그래서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들 하나 봐. 어쩌면 그때 사랑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하여 타 없어져 나에겐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가 봐.”
결국 김 선생의 러브스토리로 오후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일곱 시가 넘어서 서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이층에서 딸 초희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따라 따라 랄라라…… 라라라…….”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란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전애희는 베란다 쪽의 창밖을 쳐다보며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딸 초희의 피아노 소리가 제법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잠깐 민상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고개를 흔들고 서서히 이층의 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느덧 초희는 빠른 템포의 마지막 부분을 정열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맨 첫 악장의 조용한 템포로 곡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빠른 템포! 베토벤의 거친 감정의 사랑의 열정과 관계가 깊었다. 그가 사랑하였던 여인 엘리제, 그녀는 베토벤의 정열적인 사랑을 외면하고 몰라주었다.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그녀에게 광기가 서린 미움과 증오, 사랑의 외침이 빠른 템포에 실려 춤을 추듯 흔들리었다. 그것은 사랑의 폭풍우였다. 잠시 이제 그 폭풍우가 지나자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순화하여 엘리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연주로 마무리 된다는 사연…….
전애희는 학창시절에 음악선생님께서 엘리제를 사랑하였던 베토벤의 사랑을 들려주며 ‘음악의 감정이입’을 언급하던 일이 떠올랐다.
“아주 잘 치는데 우리 딸이!”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는 자신의 분신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어렸을 때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 투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침 딸이 음악을 좋아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초희는 엄마가 칭찬하는 소리에 천진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 엘리제는 나보다 예뻤을까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지?”
“미인이니까 그녀를 위한 노래가 탄생되었겠죠.”
딸 초희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제법 여자아이 같이 예쁘장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의 어렸을 때의 축소판처럼 느끼면서 생명의 그 유전적인 영향이 경이롭고 새삼 놀라웠다. 초희는 입 안의 이가 고르고 입 속이 석류 속처럼 아름다웠다. 훤한 이마가 윤기가 흐르고 빛나고 있었고 커다란 두 눈동자는 샛별처럼 반짝였다. 쳐다볼수록 탐스럽고 예쁜 자태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초희는 그 석류 속 같은 입을 열며 말했다.
“엄마, 피아노 선생이 나보고 엘리제처럼 예쁘다고 하였어요. 너희 어머니를 닮아서 예쁘다고요!”
전애희는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다는 찬사는 인생에서 큰 자아감을 심어주는 듯하다.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덧 사십대의 여인으로 들어서고 있는 지금, 젊음과 아름다움은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듯하였다. 전애희는 잠시 우쭐하였으나 체념하듯 한숨이 흘러 나왔다.
“여자가 제일 매력적일 때는 삼십대에서 사십대야!”
언젠가 폐경기를 맞이한 오십대 여교사가 쓸쓸하게 탄식하듯 내뱉었던 말이다. 반면에 남자는 사십대에서 오십대까지 매력을 간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유부남과도 젊은 여자들이 사랑하나 봐!”
이제 폐경기인 자신은 아무런 낙이 없다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후엔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가니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민상수-민상현’
순간 전애희는 이 두 이름이 기억 속에 맴돌았다. 초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남편의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늘 남편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던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잠시 후 물이 끓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 선생이 선물하여 준 쌍화차 엑기스를 하얀 컵에 털어 넣었다. 물은 갈색의 액체로 녹아지면서 특유의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피어오르는 쌍화차 향기는 어느덧 오랫동안 묻어둔 그 향기를 찾아 전애희의 마음을 기어코 점령하고야 말았다.

‘쌍화차 친구!’

<2회분>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쌍화차 친구’라고 언제나 자신을 부르던 그를 만난 것은 대학가의 하숙집이었다. 그 당시 그 대학은 지방의 단과대로 겨레의 교육을 책임질 스승을 양성하는 지방의 명문대였다. 각 지방에서 선생이 되고파 하는 학생들이 몰려오던 곳이었다. 그들은 하숙이나 자취,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대학 4년의 코스를 마쳐야만 하였다.
음악과 전애희가 하숙에 든 집은 텃밭이 있었고 마당이 넓은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그 마당의 양편으로 하숙방이 마주보이고 중앙에는 공동 수돗가가 있었다. 그리고 마당의 오른편에는 채마밭이 있었고 그 채마밭 너머에는 훤하게 트인 금강변이 내다보였다. 모래사장이 펼쳐진 곰나루는 삼월 초에 혹독하게 막걸리를 허겁지겁 들이키며 고통의 신입생 신고식을 치렀던 곳이다. 그 주변은 모두 하숙집이 즐비하였고 주변의 농가는 하숙생 두세 명을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빈농에게는 새로운 수입거리로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짭짤한 수입을 맛 본 농가는 텃밭조차 메워 하숙방을 짓기 시작하는 추세였다. 이처럼 시골 농촌에 위치한 이곳 시골 캠퍼스는 그야말로 전원적인 자연과 함께 대학생활이 펼쳐졌다.
하숙생은 모두 일곱 명의 대학생이었다. 여대생 전애희의 하숙방은 마당에서 제일 먼저 접하는 오른쪽 끝 방이었고, 그 옆에는 무용과 여학생의 방이었다. 그리고 맞은 편 왼쪽의 첫 번째 방에는 물리과 남학생, 그 두 번째 방은 서천이 고향인 중국어과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맨 끝은 불어과 옥순이의 방이었다. 그 집의 대문 쪽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대문 옆의 첫 번째 방은 국어과 예비역인 민상현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옆방은 역사과 여학생이었다. 이렇게 여자 네 명, 남자 세 명, 모두 일곱 명의 하숙생이 함께 지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커다란 평상에서 하숙생들은 밥상에 둘러앉았다. 방금 밭에서 솎은 상추와 향긋한 쑥갓과 풋고추가 상에 올라왔고, 뒤뜰의 커다란 옹이 항아리에서 퍼온 시골 된장으로 쌈장을 만들었다. 한 상 가득 푸짐했던 삼겹살 파티는 그야말로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전애희가 민상현을 만날 수 있는 건 아침식사시간뿐이었다. 하숙생 대부분은 아침식사 때 여지없이 모이지만, 점심이나 저녁식사는 각자의 볼 일이 있어 한 자리에 모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고향방문을 한다, 친구들과 등산을 간다, 여행을 간다 등의 이유로 하숙생 전부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들은 충남 서천에서 온 중국어과 김종만을 하숙생의 대표로 뽑았고, 한 달에 한 번의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처음 한 학기는 서로가 어색하여 말도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친숙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불어과 옥순이는 언제나 재미가 있었고 발랄하여 분위기메이커를 담당하였다. 너무 실없이 잘 웃어서 헤퍼 보이는 인상이었다. 남자 보는 눈은 있었는지, 대문 근처의 민상현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향이 상주인 옥순이는 명절을 쉬고 집에 내려가서 돌아올 때는 곶감을 한 아름 싸들고 돌아왔다. 그러면 옥순이는 맨 먼저 민상현의 문 앞에 서서,
“상현오빠, 문 열어요!”
하며 노크를 하였다. 가까이 접촉할 구실을 찾은 옥순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밤에 술에 취하여 잠을 자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옥순이는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곶감을 담은 쟁반을 들고서 애희의 방으로 들어왔다. 전애희는 옥순이와 곶감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동안에도 옥순이의 얼굴은 계속 상현이 일어났는지 살피는 눈길이었다.
“언니, 우리 상현오빠 방으로 놀러가요!”
상기된 얼굴로 옥순이는 계속 상현의 방을 흘끔거리며 졸라대었다. 아마 혼자 가기가 쑥스러워서 졸라댔지만 두 사람은 피차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전애희는 옥순이처럼 헤퍼 보이는 여자에게는 그가 관심 없으리라고 확신하며 질투는 하지 않았다.
옥순이가 그를 좋아하고 만나고파 애가 타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떠나버린 배를 기다리는 외로운 항구와 같이 여겨졌다. 한창 유행하던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이해가 되고 실감이 났다.
상현은 여자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가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호리는 말을 한다거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말이 없는 사나이였다.
왜 그에게 사랑과 그리움의 우물이 깊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옥순이의 가슴앓이, 자신의 가슴앓이! 그를 본 순간 어떤 보호본능의 모성애가 발동하였고 무슨 깊은 아픈 사연이 있어 보여 애달팠다. 제임스 딘처럼 쿨 하면서도 묘하게 여자들에게 관심 없어 하는, 약간 시니컬한 분위기는 처연함과 함께 더욱더 애를 녹이는 듯하였다.
사람들이 점잖고 얌전하며 여성스럽게 여기던 자신이, 지금 옥순이의 그 들뜬 마음 이상으로 그를 향하고 있었다. 전애희는 그 은밀한 가슴앓이를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으려 애썼고 옥순이 앞에서도 무관심한 척하였다.
“보통 열 시 정도가 되어야 일어나는 것 같아요.”
“응, 글쎄, 항상 늦게 일어나는 것 같은데…….”
두 여대생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문을 열고 기지개를 펴고 있는, 상현의 방 쪽을 훔쳐보았다. 면도를 하지 않은 그의 얼굴은 수염의 음영이 짙어져 사뭇 야성미가 느껴졌다.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그다지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사색적인 지성미를 느끼게 하는 깊이 움푹 들어간 눈매는, 옆으로 길게 이어져 어느 여자나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도착하지 못하여 아쉬워하는, 먼 곳을 바라보는 우수에 어린 모습이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자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애희는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그와 인연이 있을 어떤 운명을 예감하였다. 그에게 왜 자신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지 전애희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명석하지도 않았고 중간 정도의 학업성적에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다. 결코 장래가 촉망되지 않았고, 가정환경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 보였다.
“어머니! 밀린 하숙비 보내주세요!”
언젠가 지나치다 언뜻 들었었다. 민상현과는 한 번도 정식으로 데이트를 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사귄 것 같은 친밀감과 연민이 몰려왔다. 그저 가끔씩 아침식사 때, 잠깐 그의 얼굴을 대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왜 이토록 그를 그리워하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오빠, 북엇국 드셔야겠어요. 술 많이 드시면 아침에 북엇국을 먹어야 속이 풀린다면서요?”
옥순이의 새침한 근심어린 배려의 말이었다.
“임마, 하숙집에서 어떻게 북엇국을 주문할 수 있어?”
“대신 여기 동태무국도 좋은데요!”
옆의 무용과 서하영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말하였다.
“동탯국이 왜 시원하다고들 하는지 모르겠어요. 펄펄 뜨겁게 끓고 있는 국물을 마시면서요!”
“어른이 되면 그 맛을 알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옥순이는 자신을 나이어린 소녀처럼 대하는 것을 언짢아하였다. 민상현은 식사시간만큼은 약간 말을 하였다. 아침식사 후 주인아줌마는 언제나 사과 세 개를 쟁반에 얹어 주었다. 전애희가 과도로 조심스럽게 사과를 깎는 모습을 민상현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마치 그녀의 손이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어린 표정이 스쳤다. 정갈하게 깍은 사과 한쪽을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 전애희의 몫이었다.
“아침 사과는 보약이라잖아요!”
사과를 내밀며 말하는 것이 유일한 그와의 대화였다.
“네, 감사합니다!”
일어서며 입에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그는 마루 쪽으로 나갔다. 마치 수줍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을 마주치거나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듯하였다. 전애희는 소년 같은 그가 귀엽기도 하여 빙그레 웃었다.
“왜 웃어요?”
옥순이가 퉁을 놓았다.
“아, 아니, 꼭 사과만 받으면 입에 물고서 다람쥐처럼 조르르 달아나는 것이 우습지 않니?”
“뭐요, 얼굴도 빨개졌던데?”
그는 다른 하숙생보다 자신에게 각별한 예의로 대하는 듯하였다. 그런 그의 모습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비스럽고 전애희의 가슴에 새기며 흡수되었다. 그렇게 아쉽게 사라진 그는 밤늦도록 술에 취하여 들어왔고 방문을 열어놓고 문가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기듯 한쪽을 오랫동안 응시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문을 닫고 코를 골면서 잠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의 술 취한 모습은 여느 남학생의 단순한 주정뱅이처럼 한심한 모습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생의 진실을 찾다가 지친 철학자의 모습이요, 방랑하는 모습이었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전애희는 그의 곁에 마음이 다가갔다.

상현의 방 쪽을 살피던 보람이 있었는지 잠시 후 그가 마당 쪽으로 다가왔다. 이때 곶감을 같이 먹던 옥순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고생처럼 귀엽게 조르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제 술 많이 드셨지요?”
“그래, 임마. 뭐가 어째서?”
그의 말투나 표정이 마치 자기 여동생에게 대하는 그런 다정함이 있으면서 튕기는 말투였다. 어쩌면 그의 이런 인간적인 다감한 모습에 옥순이는 친근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옥순이는 약간 토라지듯 그의 옆에 약간 떨어져 걸터앉았다.
“방에서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옥순이는 코를 막고 애교를 떨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냄새?”
“아, 이제야 알았다. 바로 발 고린내, 술 냄새, 그리고…….”
옥순이는 뭔가 표현하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상현을 흘낏 쳐다보았다. 상현은 조용히 웃어넘기며 옥순이의 재잘거림을 귀여운 여동생처럼 여기는 듯하였다. 이때 전애희는 맨 첫 방의 자신의 방을 청소하며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현은 잠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면서 눈은 전애희 쪽을 향하였다.
“저쪽 방 언니, 지금 뭐하냐?”
“보면 몰라요. 청소하고 있잖아요!”
옥순이는 김빠진다는 표정이다.
“우리 오랜만에 날씨도 더운데 딸기 파티 한번 해 볼까? 어때? 그동안 하숙집 식구끼리 너무 단합이 되어 있지 않고, 다들 너무 뻘춤해서 말이지. 얼굴도 좀 마주보고 대화의 광장을 열어보지!”
“어머! 좋아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옥순이는 그와 마주 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서 흔쾌히 찬성하였다.
“모임은 이달 말일 저녁 여덟시로 하고, 옥순이가 하숙생에게 소식통을 좀 넣어 보면 어떨까? 그리고 장소는…….”
자신의 방은 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상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딸기 파티는 방이 넓은 만오 씨 방에서 하고요, 이차로 커피타임은 저쪽 방 애희 언니 방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방은 분위기가 깔끔하고 로맨틱하거든요. 다른 방은 좁고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렇게 하지.”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세요?”
“싫으면 관두고…….”
“아, 아니에요!”
옥순은 오늘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제안하려다가 묵살된 듯해서 서운하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자제하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숙연해져 자기 방으로 돌아섰다. 이때 전애희는 걸레를 들고 헹구려고 하는 듯 마당 중앙의 수돗가로 다가갔다. 옥순이는 힐끔 상현을 한 번 쳐다보고 수업이 있다고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벌써 열한 시가 되어서 오월 하순의 날씨는 제법 무더워지기 시작하였다.
전애희는 수돗가 근처의 마당에서 서성이는 상현의 움직임을 의식하며 잠시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서로 목례를 하였다. 얼굴이 상기되었다. 더러워진 걸레에 물을 마구 퍼부어 씻어 내렸다. 마치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식혀버리듯, 수돗물을 더욱 세게 틀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는 폭포수의 계곡의 한줄기처럼 쏟아졌다. 그 쏟아지는 물을 바라보고 묘한 느낌에 젖었다.
갈색의 플라스틱 함지의 넓고 깊은 공간에 물이 점점 차오르고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떨어지는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마치 뒤 쪽에서 서성이는 상현이 자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와주기를 바라면서.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점점 차오르는 것일까! 저 마음 밑바닥에서 생기는 그리움이 넘치면 이 수도꼭지의 쏟아지는 물처럼, 언젠가 쏟아지게 되는 것일까!’
어느덧 갈색 함지에 물이 차올라 넘치기 시작하였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서 비눗물이 하얗게 일어난 걸레에 퍼부었다. 비눗기가 다 빠지자, 애희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러자 물소리가 멎으면서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는 담장 밖을 내다보며 발을 추켜세웠다. 고추잠자리가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그가 돌아서려 하는 찰나, 빨리 시선을 걸레로 돌리고 다시 한 번 물을 퍼부었다. 아직도 걸레의 때가 깔끔하게 빠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저 사나이를 남몰래 사모하는 맘이 이 걸레의 때처럼 여겨졌다.
때를 지우기 위해 세탁비누를 듬뿍 덧발라서 박박 문질렀다. 그것은 시골 엄마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화가 났을 때 더욱 빨래방망이를 요란스럽게 두들기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전애희는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부끄러웠다. 여자인 자신이 먼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다. 여학생들은 누구나 자신을 태우려고 다가오는 백마 탄 왕자를 꿈꾸었다. 남자가 먼저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다가와주기를 원하였다.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 달랐던 것이다. 남자들은 이 여자 저 여자를 탐색하면서 먼저 다가가 데이트 신청도 하고 먼저 프러포즈하는 것이 남자다움과 용기가 있는 멋진 모습이 되었다.
다시 함지의 물을 몇 번 퍼부어 헹구어내니 어느덧 많이 깨끗해졌다. 더러운 것을 깨끗케 씻어주는 물의 신비,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 새삼 신비스러웠다. 부끄럽던 감정도 어느덧 씻긴 듯, 마음이 담대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상현이 자신의 쪽으로 바싹 다가왔다.
“자, 좀 실례합니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은 이 남자! 애희는 아찔하듯 어리둥절하였다. 순간적으로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며 빠른 동작으로 걸레를 짜기 시작했다.
“짤순이 없어요? 요즘 하숙집에 다 짤순이가 있던데요?”
“…….”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좀 멋쩍었는지 수도꼭지를 세차게 틀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기지개를 크게 하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에 두 손을 모아 물을 모은 후 시원하게 얼굴을 씻더니 성에 안 찼는지 아예 굵은 물줄기에 머리를 대고 흔들었다. 그리고 비누를 머리에 칠해서 거품을 내고 물로 헹구어 내었다. 잠시 후 그의 짧은 머리는 금세 물에 세척되어, 머리에 수건을 댈 것도 없이 고개를 흔들고 손으로 턱턱 쓸어 물기를 없애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가 밤송이처럼 쭈뼛쭈뼛하였다.
전애희가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그는 갑자기 수도꼭지의 물에 손을 대고 애희 쪽으로 흩뿌렸다.
“어머, 아, 차가워요 왜, 왜, 이러시죠?”
그는 말없이 웃었다. 전애희가 물을 털어내면서 돌아서려 할 때,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 물장구를 치듯 흩어 뿌리며 말했다.
“좋…… 좋아 하니까 그러죠!”
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쑥스러운 듯 자기 방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전애희는 그 소리가 꿈에서나 듣는 듯,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먼저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적이 없는 냉담하였던 사람이었다. 방금 그 말은 천만뜻밖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문득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숲 속에서 서로 술래잡기를 하듯 하나가 쫓고 하나가 도망가다가 큰 나무에 서로 맞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활짝 웃는 모습들! 그 한 쌍의 연인들의 즐거운 유희! 그의 방을 쳐다보니 그는 겸연쩍은 듯 걸터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방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뭐라고? 김 추기경이 전두환에게 서부극 같다고 비판하였다고? 그게 정말이냐?”
서울의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였다. 그는 무슨 급한 볼 일이 있는지 서둘러 잠바를 걸치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애희를 휙 돌아보았다. 눈시울이 적셔왔다. 그는 손을 흔들며 다녀오리라는 듯 그렇게 살짝 웃고 급한 걸음으로 돌아섰다. 자신이 눈물을 적시는 모습을 그가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빛에서 애처로운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저 사나이, 알 수 없는 우수에 젖은 사나이! 그 때문에 이토록 깊게 타오르는 그리움으로 향하는 것이 괴로웠다. 토방에 그가 읽던 신문이 떨어져 있었다. 애희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중앙일보의 일면에 검은 테 안경을 낀 순박한 남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 다음날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상현은 떠났고 그에 대한 그리움은 차오르는 그믐달처럼 날로 깊어만 갔다.

전애희는 눈을 감고 쌍화차를 다시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때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문득 이십 년 전 상현과의 이별의 고통이 밀려왔다. 남편이 없는 시간에 다소 자유분방해지는 분위기라 그런지, 갑자기 학창시절의 추억 속에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오른쪽 맨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의 안쪽의 깊은 곳에서 빨간색이 표지이며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노트를 꺼냈다. 그것은 비밀 사진첩과 같은 중간 크기의 앨범과 나란히 있었다. 그는 그 일기장의 중간에 끼어놓은 봉투를 폈다. 잉크 펜으로 쓴 편지였는데, 글자가 번져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아!’
전애희는 가슴이 애달파 눈물이 쏟아졌다. 글씨는 색이 바래 희미하지만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상현 씨! 정말 저를 사랑한다면 그런 식으로 저를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요. 모두 제 자신의 착각이었어요. 좋아요. 전 깨끗이 당신을 잊어버리죠.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나무에 제가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절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랑의 나무, 그 나무를 기다리겠어요.’
전애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비극적인 첫사랑의 결말의 편지는 그녀의 가슴에 다시 소용돌이치듯 옛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수를 불러 일으켰다.

<3회>

드디어 옥순이와 김종만의 활약으로 딸기파티가 벌어졌다. 하숙생들은 싱싱하고 맛이 든 딸기를 커다란 쟁반에 소복이 쌓아놓고 맛있게 먹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일차 모임을 끝내고 이차로 음악과 애희의 방으로 모여 들었다. 그 방의 책꽂이에는 박경리의 『토지』 전집이 꽂혀 있었다. 책상 위에는 놓인 단란한 가족사진, 예쁘게 꽂힌 화병의 장미꽃, 벽에 걸려 있는 클래식 기타…….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예술적 분위기를 자아냈고, 말끔하고 향긋한 꽃향기가 풍기는 정감이 어리는 방이었다.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쟁반 위에 놓인 맥스웰 커피와 쌍화차라고 쓰인 갈색 유리병이었다. 그 옆에는 스테인리스 커피포트가 전선줄에 이어져 있었다. 참석한 인원은 다섯 명 정도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나 급한 일이 있다면서 외출하였다.
“언니, 윤시내의 <열애> 테이프 있어요?”
“아, 아니, 없는데 그 노래 좋아하니?”
“그 노래 전주곡이 끝내주잖아요! 우우우 우우우 우…… 그리고 죽어도 죽어도 재가 되지 않는…… 사랑을 피우리라…… 그 부분은 얼마나 간절한가요?”
새침한 분위기에서 옥순이는 사랑타령을 늘어놓았다.
“우리 고등학교 때 음악수업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음악실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높은 4층 건물이었거든요. 어느 날인가 우리가 4층에 음악수업을 하러 올라갔는데 글쎄, 노처녀 음악선생님께서 이 <열애>라는 노래를 크게 듣고 있잖아요. 팔짱을 끼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창밖을 바라보면서요. 우리가 들어왔어도 동요 없이 먼 창밖의 정경 속에 <열애>를 감상하고 있었어요! 정말 그 노래의 가사에 자신의 사랑의 사연을 담은 듯 보였어요. 우리도 모두 그 노래를 조용히 들으며 미래에 진행될 열애를 예감하고 있는 듯, 다들 폼을 잡았거든요. 윤시내의 <열애>가 스피커를 통해 웅장하게 퍼져 울려서 정말 끝내 주었어요. 눈물이 나도록 열기를 뿜는 그 사랑의 정염! 음악선생님은 눈시울이 빨개지고 잠시 후, 제 정신으로 돌아와 살짝 웃었어요.
‘장미주, 너 가수가 소원이라며? 어디 <열애> 한번 불러 봐요!’
‘그래! 한번 불러 봐. 와!’
우리는 박수로 미주의 노래를 청하였지요.
장미주는 신이 나는 듯 자신의 노래 솜씨를 관중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마치 마이크를 잡은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윤시내와 같은 열광적인 목소리로 사랑을 맹세하듯, 그 열애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우 우 우 우……, 우우…….’
우리 모두는 전주곡 반주를 입으로 연주하였고 곧이어 부르는 열애의 도가니 속에 숨을 죽이며 미주를 부러워하며 황홀하게 들었어요. 우리는 얼굴도 예쁘고 거기다가 가수 뺨칠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미주를 선망대상으로 여겼죠. 특히 그 노래의 ‘태워도, 태워도……’ 할 때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음을 묘하게 잘 처리하는 미주의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였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럼 옥순이가 그때의 장미주가 되어서 한번 불러보지!”
상현이 신청하자 모두 박수를 치며 듣고 싶어 하였다. 이때 애희는 한쪽에 치워 둔 클래식 기타를 집어 들었다.
“아, 반주자도 있네!”
“어, 언니 기타도 칠 줄 알아? 아, 진짜 멋져 보인다!”
그 모습은 단발머리에 너무도 지적이고 매력 있게 보였다. 상현은 그런 애희를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났고, 좀 흥분한 표정이었다. 옥순이는 이 노래를 멋지게 불러서 상현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전주곡을 싣기 시작하였다.
“이 생명 다하도록……, 불꽃을 피우리라……,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애절하게 옥순이는 노래가사로 상현에게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상현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 노래가 전애희와 관계가 있을까 하며 애희를 가끔씩 훔쳐보았다. 애희는 중간 중간에 반주를 넣으며 옥순이와 호흡을 같이 하였다.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와와……, 앵콜……, 짝짝…….”
“와, 정말 옥순 씨! 가수의 재능이 보이는구먼유, 아주 짠하게 시리…….”
김종만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옥순이에게 흠뻑 빠진 듯하였다.
“와, 정말 노래 잘한다. 우리의 가수왕이야!”
만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기타를 치고 있는 애희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노래합시다!”
막걸리파 김종만이 한마디 나섰다.
“나는 트로트가 좋은디, 반주가 됩니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그들은 이어 메들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애희의 기타 반주는 막힘없이 문제없었다. 만오도 곡을 이었다.
“…… 너무 합니다, 너무 합니다, 당신은 너무 합니다.”
그 다음엔 옥순이가 선창을 하자 모두 함께 따라 불렀다.
“제이, 스치는 바람에…… 제이, 난 너를 못 잊어. 제이, 난 너를 사랑해. ……”
<제이>는 대학가요제에서 데뷔한 이선희의 히트곡이었고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중국어과 김종만은 눈을 지그시 감고 트로트 형의 노래를 잘 불렀다. 서천이 고향이라는 그는 언제나 텁텁한 막걸리를 즐겨 먹었고 젊은이답지 않게 겉 늙은이 분위기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그의 18번 <목포의 눈물>을 여지없이 불렀다. 그는 늘 세수할 때도 언제나 콧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그와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고 명석한 이미지의 물리과 수재, 호만오는 말없이 애희의 기타만 계속 주시하듯 하였다.
“상현 씨도 한곡 불러요!”
“나? 아는 노래 별로 없는데요.”
“석탄 백탄 타는 덴 연기만 펄썩 나고요, 이내 가슴 타는 덴 연기도 김도 안 난다…….”
“아, 민요라! 신나는데요!”
모두들 경기민요 <사발가(沙鉢歌)>를 따라서 불렀다. 호만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의 분위기에 빠진 듯하였다. 매일 도서관에서 학점의 노예가 되어서 공부만 하는 자기와 사귀고 있는, 선영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도 애희를 만난 후부터였다.
언젠가 하늘색 물방울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애희를 보았을 때, 그는 선녀모습을 보는 듯 여자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하였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 그녀의 의젓하고 이지적인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기타 반주를 하는 애희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후 애희를 사모하며 짝사랑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애희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도 차를 마시고 싶어도 쑥스러워서 접근 보류 중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황후처럼 감히 접근하기 힘이 들었다. 그녀와 마주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아침식사 때 그녀와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만오 씨는 우리 하숙생의 보석과 같은 인물이죠. 아, 이번에 물리과 수석을 하였는디, 애희 씨는 축하도 안 해주남요?”
“어머? 그래요, 축하합니다!”
예의상 반갑게 그렇게 표현하였다. 호만오는 자기를 우수한 학생이라고 홍보해주는 김종만이 고마웠다.
‘나의 이런 우수한 점을 애희 씨는 알고 있을까!’
그러나 애희는 그 시선이 상현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애절하고 간절한 어떤 눈길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선영에게 떠나려하고 애희에게 구애하고 있나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자신에게 별 흥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보기만 하면 긴장하고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느덧 노래하던 그들은 지쳤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자, 쌍화차나 한잔씩 드세요!”
전애희는 커피포트에 물이 끓기 시작하자 컵 속에 미리 덜어둔 쌍화차 액에 물을 부어 스푼으로 저어 건넸다.
“야, 꼭 쌍화탕 같아, 커피는 없어요?”
“응, 커피 드실 분 저쪽에…….”
테이블의 한쪽에 치워둔 맥스웰 커피와 크림, 설탕을 내어 놓았다.
“커피보다 이 쌍화차가 몸에 좋아요!”
“그래요? 그럼 한번 먹어 볼까요!”
옥순이는 약간 이마를 찡그리며 쌍화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상현은 쌍화차를 매우 반기는 표정으로 흔쾌히 맛있게 마셨다. 그는 모처럼 여유 있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애희를 바라보았다.
“전 집에 돌아갈 때면 어머님께서 늘 쌍화차를 진하게 타 주시거든요.쌍화차를 마실 때면 고향에 온 듯 매우 정겹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자주 마시러 오세요.”
“정말입니까?”
애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웬 고리타분한 쌍화차 타령인가. 그건 어른들이나 즐겨 마시는 것이잖아!”
두 사람이 많이 닮았다면서 방 안의 사람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자, 화제는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시국에 관한 약간 심각한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무슨 과 교수가 어용교수이고, 무슨 과 교수가 시국선언을 하여 검찰에 검거되었다는 이야기……. 이런 시국에 자신들의 미래 즉,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민형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호만오가 상현을 향하여 물었다.
“박종철 사건으로 연루된 듯 서울에 자주 올라가시던데요?”
“네, 끝까지 투쟁하여 종철이의 죽음을 밝혀야 합니다. 분명히 고문치사사건을 은폐 조작한 것입니다.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5·18항쟁 희생자 추모미사가 열리고 끝난 후,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서울에서 여러 학생 동지들과 인권을 유린당한 종철이의 죽음의 진실을 알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진실이 밝혀지고 있으니 우리는 대규모 항쟁을 할 것입니다.”
“이곳 학교생활은 말이 아닐 텐데요. 학점관리도 그렇고요!”
“학점관리 해야 합니다. 아니면 학사경고를 받아 다음해 일 년을 유급 당하거든요!”
옥순이가 염려스럽게 말하였다.
“그렇죠. 그러나 이 어두운 현실에서 나만 점수 잘 맞아 탄탄대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양심이 허락지가 않는군요!”
상현은 결연해 보였다. 전애희는 그가 서울에 올라가 며칠씩 하숙집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동권이구나!’
쌍화차를 마시고 아쉽게 하숙생들은 그렇게 흩어졌다.
그 이후 하숙생들은 전애희를 ‘쌍화차 친구’로 불렀고 놀러가고 싶으면 ‘쌍화차 먹으러 가자!’ 하면서 삼삼오오 자주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상현은 계속 볼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하숙집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방문 앞의 댓돌에 그의 검정운동화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밤사이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일어나는 열 시경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방문을 열고 토방에 걸터앉았다. 늘 그러하듯 담 벽 쪽으로 다가가 금강 변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더욱 초라하고 절망적인 구름을 뒤덮은 듯 매우 암울하고 초췌해 보였다. 오른손에 큰 타박상과 무릎이 심히 상처가 난 듯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얼굴에도 좀 흠집이 보였다. 아마 데모를 하다가 몸싸움도 하고 경찰과 맞서 고문도 당한 듯하였다.
애희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얼굴이 수척하여 야위어보였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기지개를 펴고 애희 방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석탄 백탄 타는 덴…… 이내 가슴 타는 덴…….”
언제나 가끔 들리던 그의 노랫가락이었다. 눈이 움푹 꺼진 초췌하고 허해 보이는 모습은 애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는 다시 기지개를 켜며 저쪽 담벼락 쪽으로 몸을 돌리고 금강 변을 바라보았다. 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역성혁명의 기질이 어려 있다고, 아랫녘 사람들을 차별하였던 그 시대를 상기하였다.
조선 땅의 모든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유독 금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거슬려 흐르는 강! 사람들의 비리에 타협하는 것은 그저 순탄하게 살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의인은 고난과 역경의 역사 속에 개입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란 말인가! 그는 그런 종류의 상념에 취한 듯하였다.
‘모순덩어리……!’
상현은 애희의 기척을 느끼면서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나 우수에 깃들고 다른 세계에 젖어있는 그에게,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읽어줄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전애희는 넉넉한 머그컵에 쌍화차엑기스를 적당히 담고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잘 저어준 후, 달걀노른자를 얹었다. 뜨거운 갈색 액체 위 떠있는 노른자가 익어가면서 점점 작아져 오므라져갔다. 마지막으로 쌍화차 위에 대추와 잣을 고명으로 얹었다. 그는 여전히 담 벽 쪽에서 금강 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희는 접시에 컵을 받쳐 들고 그의 열려진 방 안에 쌍화차를 들이밀었다.
“쌍화차 좀 드세요. 많이 지쳐 보이시네요.”
그저 덤덤하게 한 집에서 사는 사람의 정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태연하게 과장하며 말하였다. 고개를 돌린 그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피곤한지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아, 예,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따뜻한 쌍화차 잔을 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쇠약해져 가고 있는 그의 몸 기운이 회복되기를 기원했다. 마치 그 쌍화차가 그의 원기를 돋고 활력을 찾게 해주는 특효약이라도 되라는 듯, 상처투성인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자신이 덜어주고 싶었다. 애희는 그의 아픔과 상처가 자신의 아픔처럼 여겨졌다. 상현은 쌍화차를 마시니 속이 풀어져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애희는 그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여자’로 인식되기를 원하였는지 모른다. 그는 어느새 다 마셨는지 쌍화차가 담겨 있던 흰 머그컵을 내밀었다.
“정말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움푹 꺼진 깊은 눈동자가 웃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삶의 활력이었다.
“몸조심하세요. 항상 아프시잖아요!”
오른쪽 발의 부상에 붕대가 감겨져 있다.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시간 있으면 영화 보러 갈래요?”
“네? 웬일이세요. 이상해요!”
“이상한 짓 좀 하면 안 됩니까!”
▲ 소설가 한애자“알았어요. 저녁도 사주시는 거죠?”
“그럼요.”

다음호에 계속,...
한애자: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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