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적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은 중국 북경(베이징)의 큰 세 별(大三星)로서 한반도 자주독립운동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 독립운동 강의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용학도서관(관장 김상진)은 17일 경북대학교 이재현 교수를 초청하여 1953년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과 실천’을 주제로 대구경북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개최했다.

다음은 [강의] 전문이다.

심산 김창숙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1879년(고종 16) 7월 10일(음)에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성주군) 대가면 사월리沙月里(사도실, 칠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아버지는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1842~1896)이고,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13대 종손宗孫이다.

김창숙의 자字는 문좌文佐이고, 호號는 직강直岡․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직강’이라는 호는 13세 때 마을 앞산의 직준봉直峻峰을 본받아 모든 일에 굳세고 굽히지 말라는 당부를 담아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널리 알려진 ‘심산’은 40세 때 󰡔맹자孟子󰡕 「공손추상 公孫丑上」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십 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否, 我四十不動心]’라는 구절에서 따서 스스로 지은 것이다. ‘벽옹’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을 직접 보자.

나의 성명은 김창숙이고 별호는 심산이라 한다. 내가 어려서 몹시 미련하더니 늙어서 더욱 어리석었다. 사람들이 “자네 이름을 우愚라 부르세”라고 하기에 나는 본명인 창숙을 두어두고 우가 좋다고 했다.

또 내가 어려서 잔병이 많더니,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네 호를 벽옹이라 부르세”라고 하기에 나는 그것도 좋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나를 ‘벽옹 김우’라 일컬었다.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

잔병이 많다가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겸허하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다가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그의 호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과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가 보겠다.

2. 성주지역의 학풍

조선 후기 영남 지역 사족(양반)의 주류는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파(영남학파)에 속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영남남인(남인)에 속했다. 성주지역 역시 남인과 퇴계학파가 사족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다만 붕당과 학파 형성의 초기단계인 16세기 후반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영남 지역 학문의 큰 연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南溟 조식曺植(1501~1572)이다. 퇴계와 그의 문인들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에 주로 포진하였고, 후에 남인南人을 이루었다.

남명과 그의 문인들은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에 주로 포진하였고, 후에 북인北人을 이루었다. 낙동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성주는 이들 학맥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고, 이 지역의 주요 학자들 역시 퇴계와 남명 모두에게 수학한 인물이 많았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떠오른 인물은 성주의 ‘양강兩岡’으로 불리는 동강 김우옹과 한강寒岡 정구鄭逑(1643~1620)였다. 김우옹은 19세이던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이어 28세이던 1567년(명종 22)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다.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선조를 호종하며 병조참판․이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599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했다.

정구는 이황과 조식의 제자로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573년(선조 6)에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하지만 1580년에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후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대사헌에 이르렀다. 정구는 제자 양성에 힘써 말년에 큰 학단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학단은 17세기 초중반에는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후대에는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과 함께 퇴계학맥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다. 근기남인에게 퇴계의 학통을 이어준 것으로 평가받았다. 시호는 문목文穆이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등지에 제향했다.

김우옹과 정구에게서 보듯이 이들은 학문적으로 남명과 퇴계를 절충하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1623년(인조 1)의 인조반정으로 서인西人에 의해 북인北人 정권이 몰락함으로써 지역사회 내에서도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17세기 중후반 이후 영남지역은 퇴계학파로 재편되었다. 성주 지역의 유림도 남명학의 향취가 남아있기는 하나 퇴계학파로 포함했다. 심산 김창숙의 가학家學적 연원도 이러한 바탕 하에서 형성했다.

성주의 의성김씨는 김우옹의 7대조인 김용초金用超(?~1407)가 성주로 입향入鄕하면서 시작했다. 김용초의 증손曾孫인 김계손金季孫이 사도실에 정착했다. 김계손의 증손인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1507~1560)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했다.

김희삼은 우홍宇弘․우굉宇宏․우용宇容․우옹 네 아들을 두었다. 이 중에서 우홍 ․ 우굉 ․ 우옹 세 아들이 문과에 합격했다. 사도실에 계속 세거한 김우옹의 후손은 성주를 넘어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개암開岩 김우굉(1524~1590)의 후손들은 17세기 후반에 안동 내성(현재는 봉화군 봉화읍)의 해저리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18~19세기에 걸쳐 관력과 명성이 영남을 대표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김우옹의 아버지인 김호림은 해저리 출생으로 김우옹 종가에 23세 때 양자로 오게 되었다. 즉 김창숙은 성주와 안동권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혈연적인 기반이었다.

김창숙은 가학적 연원 외에도 성주 지역 유학의 학맥을 계승했다. 18세기에 다소 침체되었던 성주 지역의 유학은 19세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시기 성주를 대표하는 학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었다.

그는 퇴계를 사숙私淑했으나 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영남학파 내에 큰 파장을 불러 왔다. 생전에 그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후산后山 허유許愈(1833~1904)․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1844~1875)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1846~1906)․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1845~1908)․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1856~1918) 등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대표되는 많은 학자를 양성했다. 이들은 한말에 성주를 중심으로 영남의 대표적인 학단으로 떠올랐다. 김창숙은 이들 중 곽종석과 이승희에게 학문을 배웠다.

경북대학교 이재훈 교수 / 사진 = 문해청 기자

3. 김창숙의 배움

…(전략)… 나는 아이 적부터 성질이 거세어 결코 남에게 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무들이 모두 꺼려하고 피했다. …(중략)… 열 살 적에 아버님의 명을 좇아 동리에 사는 정은석鄭恩錫이라는 어른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는데, 늘 방종한 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놀았다.

정 선생은 가르치는 법이 아주 엄하여, 일찍이 “네가 너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사람이 되겠느냐”라며 훈계했다. 그때부터 차츰 분발하였으나 구속받기 싫어하는 기질은 전과 마찬가지였다.

열서너 살적에 비로소 사서를 떼었으나 아직 위기지학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아버님께서 몹시 걱정하신 나머지 친하게 지내던 이대계李大溪 선생에게 부탁하여 “우리 가문의 앞날은 이 아이에게 달려 있네. 자네가 각별이 지도해서 성취시켜 주기 바라네.”라고 했다.

내가 본래 성리설性理說을 듣기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그 문하門下에 가지 못했다. 내가 배움에 힘쓰지 않았던 것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

김창숙은 여섯 살 무렵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창숙의 아버지 김호림은 주변의 정은석, 이승희 등에게 아들을 부탁하였으나 김창숙은 배우기를 성리설을 싫어하여 결국 공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호림은 당시 영남지역 유학의 적통을 이은 학자였으나 상당히 혁신적인 사람이었다. 김호림은 서당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이들에게 직접 모내기를 돕게 하고 점심을 농부들과 같이 먹었다.

이때 그 자리에서 김호림 어른이냐 젊은이냐를 따져야지 귀천貴賤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이어 불평하는 학생들에게 천하가 크게 변해가는 때이니 처세하고 대세를 따를 방도를 익혀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교외에서 모심기를 할 때 아버지는 나와 같이 공부하는 학동 수십 명을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글을 읽는다는 것을 빙자하여 부모 밑에서 입고 먹는 일이 편안하고 즐거운 줄만 안다.

그러니 시대와 세상이 어떻게 변천되고 농사짓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 줄 알 수 있겠는가. 지금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어 편안히 하인들을 호령하여 앉아서 먹고 입기를 꾀할 때가 아니다.

너희들은 오늘 농사꾼들의 뒤를 따라 농가의 고생이 어떤 것인지 맛보라.” 점심을 먹는데 우리들에게 여러 농군들과 섞여 않도록 했다. 밥하는 하녀에게 앉은 순서대로 주라며 주인이라고 하인보다 먼저 먹지 못하게 했다.

“너희들도 오늘은 똑같은 농사꾼이다. 어찌 주인과 하인을 묻겠느냐” 실제로 얼마 뒤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갑오개혁(1894)이 실시되어 세상이 크게 변하자 김창숙은 “내가 아버지를 배우지 않고 누구를 배우겠는가?”라며 학문에 침잠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비분강개하던 김호림이 별세하고 말았다.(1896) 부친상父親喪을 당한 김창숙은 상제喪制의 예법禮法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보다 못한 김창숙의 모친이 김창숙을 꾸짖었다.

너는 이제 과부의 자식이다. 네가 대현大賢의 종손으로서 상을 치르면서 예절이 없음이 이와 같으니, 네 아버지의 혼령이 있다면 어찌 자식이 있다고 기뻐하시겠느냐?

어머니의 꾸짖음을 듣고서야 김창숙은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곽종석․이승희․장석영 등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게 된다. 특히 이승희에게 특히 심복했다고 한다.

당시 강한 외적이 나라를 위압하여 국사가 날로 글러지고 있었다. 나는 세속 학자들이 한갓 성리의 오묘한 뜻만 고담高談할 뿐 구국의 시급한 일을 강구하지 않음을 탄식하여 ‘성인의 글을 읽고 성인이 세상을 구한 의리를 알지 못하면 가짜 선비라 할 수 있다.

지금 무엇보다 먼저 이런 가짜 선비를 제거해야 치국평천하의 도를 논하는 데에 참여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듣는 이들이 모두 떠들썩했다. 여기에서 보이듯 김창숙은 학문을 하면서도 그것의 실천적 면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행동주의의 원천은 이 무렵 확고히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4. 일제의 침입과 애국계몽운동

김창숙이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에 나서는 시기는 1905년이다. 이해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했다.

11월에 이승희는 서울로 가서 박제순朴齊純(외부대신)․이지용李址鎔(내부대신)․이근택李根澤(군부대신)․이완용李完用(학부대신)․권중현權重顯(농상부대신)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목을 베고 조약의 파기를 청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이때 김창숙도 같이 상경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아무런 비답을 얻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대궐에 통곡하고 하향下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이승희가 12월에 대구 형무소에 구속되어 문초를 받았다.

상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희와 김창숙은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뜻을 같이하게 된다. 1907년 2월 대구의 서상돈․김광재․박해령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창설하여 운동을 시작하자, 성주에서도 ‘성주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가 설립되어 이승희가 회장이 되었다.

당연히 김창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이 운동은 일진회一進會의 방해로 좌초되고 말았다. 몇 차례의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희는 해외로 나가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이승희는 1908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는 데에 힘을 쏟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김창숙은 노모로 인해 국내에 남아 계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1907년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해산되고 후신인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설립되자 김창숙은 1908년 성주군星州郡의 향사당鄕射堂에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설치하고 총무를 맡았다.

우리가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다. 나라를 구하려면 마땅히 낡은 풍습을 고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하고, 낡은 풍습을 고치려면 마땅히 계급을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야 하고, 계급을 없애려면 마땅히 우리의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풍습의 개혁과 계급타파라는 혁신적인 주장을 하는 김창숙에게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형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창숙은 ‘일본 순경이 칼을 들고 문으로 오는 데, 이들에게 굽실되는 이들이 오히려 나를 꾸짖는다.

…(중략)…그대는 나를 꾸짖는 용기를 도적을 몰아내는 데로 바꿀 수 없는가?’라며 이들을 질책했다. 그는 스스로 이때부터 수구守舊하는 유생들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고백했다.

1909년에는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와 성병준宋秉畯 등이 통감 이토 이로부미[伊藤博文]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방론韓日合邦論을 제창했다. 최종규․이원달 등이 이것을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고했다.

이에 김창숙은 ‘이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이들의 처벌을 건의하는 건의문을 중추원中樞院에 보낼 것을 주창했다. 이 때 성주에서 70여명이 모였으나, 김창숙이 쓴 건의서 초안을 보고 서명한 사람은 김원희金元熙․이진석李晋錫․최우동崔羽東 등 단 3인이다.

이용구․송병준 등을 처벌하고 일진회를 해산시키라는 건의문은 중추원에 보내졌다. 또 여러 신문사에 보내져서 「황성신문」 1910년 1월 26일 자에 실리게 되었다. 이 건의문 사건으로 김창숙은 다른 3명과 함께 성주의 일본 헌병 분견소日本憲兵分 遣所에 연행되었다.

이들은 이후 헌병소와 주재소에 십여 차례 이상 오가며 심문받았다. 건의서 제출을 취소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결코 취소하지 않았다. 김창숙에 따르면 이때부터 헌병과 경찰의 밀정이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봄에 단연회의 기금 처리를 논의하는 모임에 김창숙은 성주군의 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서 일진회 대표인 김상범金相範이 전국에서 모금한 돈을 모두 중앙에 모아서 각 정당이 감독하고 관리할 것을 주장했다.

김창숙은 이것을 거절하며 탈퇴 성명서를 내고 하향했다. 성주로 돌아온 김창숙은 주변과 상의한 뒤, 기금으로 청천서원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 역시 지역 유림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김창숙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성명학교는 곧 국권이 상실되고 일제가 방해하면서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고 말았다.

5. 경술국치와 파리장서사건

1910년 8월 29일 결국 대한제국은 망하여 일제에 병합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자 김창숙은 ‘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큰 치욕이다.’라며 음주와 통곡으로 날을 보냈다.

이 당시 주변에서는 그를 광인狂人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는 낚시에 빠지기도 하고 술꾼․노름꾼 등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생활이 2, 3년간 지속되다가 결국 어머니의 호된 질책을 당하게 된다.

이후 4, 5년간 김창숙은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서울에서 3.1운동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불교계 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유림계의 협조를 구하고자 곽종석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를 받아들인 곽종석은 아들을 서울로 보냈으나 이미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뒤에 도착하여 서명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 서울에 있던 벽서碧棲 성태영成泰永은 성주로 편지로 보내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인 3월 2일에 큰 일이 계획되어 있으니 빨리 상경上京하라는 편지를 김창숙에게 보냈다.

2월 19일 편지를 받은 김창숙은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2월 25일에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김창숙 역시 이미 인쇄가 끝난 뒤라서 서명할 수 없었다. 김창숙은 「독립선언서」를 구해 본 뒤에야 그 속에 민족대표로 유림은 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분한 김창숙은 유림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곧바로 실행에 나섰다.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성태영 ․ 해사海史 김정호金丁鎬 등과 논의한 김창숙은 영남유림의 대표로 상경해 있던 이중업李中業과 류만식柳萬植을 만나 의논했는데, 이중업의 동의를 얻었다. 이후 각각 남인과 노론 학맥을 대표하는 곽종석과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를 추대하여 전국 유림의 결속을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노선 차이로 전우 측에서 거부하자, 영남의 유림들만이라도 힘을 합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3월 4일에 이들은 구역을 나누어 이중업은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길정호는 충청남도를, 성태영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맡았다.

유준근柳濬根은 전라남북도를, 윤중수尹中洙는 함경남북도를, 김창숙은 경상남북도를, 유진태는 평안남북도를 각각 담당하여 서명을 받고 3월 15일 경에 다시 서울에서 모이기로 했다.

김창숙은 상경한 곽종석의 조카 곽윤, 문인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을 만나 일을 논의한 뒤 먼저 내려가 곽종석에게 문안 작성을 요청할 것을 부탁했다. 3월 8일에 김창숙은 성주로 내려와 어머니를 뵙고, 이튿날 거창의 곽종석을 찾아 갔다.

곽종석은 문안은 장석영에게 맡겼으니 그를 만나서 문안을 받아오라고 했다. 김창숙은 이에 영주․봉화를 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장석영을 만나 문안을 받은 뒤 다시 곽종석에게 갔다.

장석영의 초고가 미흡한 부분이 있자 곽종석이 따로 초고를 만들었는데, 최종 선택된 것은 곽종석의 초고였다. 김창숙은 자신이 직접 파리로 갈 것을 결정했다. 이때 곽종석은 김창숙에게 원문을 외우게 하고, 곽윤에게 별도로 청원서를 쓰게 하여 그것을 미투리의 날줄로 꼬아서 숨기게 했다.

또 중국의 참의원 의원인 이문치李文治를 소개했다. 영남 유림 100여명의 서명을 받은 김창숙은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우연히 임경호林敬鎬(1988~1945)을 만났다.

그는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1860~1924)의 문인으로 충청도 유림 17명이 서명한 문안을 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했다. 양측의 문안을 비교한 결과 곽종석의 초안이 좀 더 간명하다고 하여 단일본으로 채택했다.

총 137명이 서명한 문안을 들고 김창숙이 파리에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3월 23일에 김창숙은 이 문서를 들고 중국 봉천奉天행 기차를 탄다. 4월 2일 성주에서는 만세운동이 있었다.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1869~1943)의 제자 송매근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곽종석 ․ 장석영 ․ 송준필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대구에 수감되었는데, 5월의 공판에서 곽종석 ․ 장석영은 2년, 송준필은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했다. 이후 최종적으로는 곽종석에게만 징역이 선고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파리장서사건/1차유림단사건)

곽종석은 7월에 신병을 이유로 풀려났으나, 10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김창숙은 봉천에 도착하여 머리를 자르고 중국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3월 27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여기서 김규식金奎植(1877~1950)이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휴대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이미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창숙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 ․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1869~1953)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등과 논의한 끝에 파리행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김규식에게 보냈다.

영문본과 국한문본을 3,000부씩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 회장과 각국 대표, 중국 정계와 언론계, 외국 대사관 ․ 공사관․영사관 및 해외 교표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발송했다. 이후 김창숙은 한학 지식을 통해 중국과의 외교에 이용하자는 주변에 권유에 의해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6. 임시정부와 국외활동

상해에 머문 김창숙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임시 의정원議政院에서 경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3일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선포된 이후 김창숙은 적극적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에 참여했다.

국민당國民黨의 총리 순문孫文과 단독회담을 하기도 한 김창숙은 이후 광주廣州로 가서 국민당 각계의 인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광주에서 한국독립후원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위한 후원금 모금을 진행하여 성과를 보기도 하였다.

또 한국 유학생을 위한 학자금을 군정부軍政府 외교부 차장인 오산吳山과 국민당 중의원衆議院 의원인 凌越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당시 3.1운동의 여파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상해의 상해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였다.

난립한 임시정부의 통합 필요성이 제기되어 논의가 분분한 끝에 1919년 11월 상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이때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고 초대 대통령으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당시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행위를 문제 삼아 김창숙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1859~1925) ․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의 선출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 된 이후 편지로 이승만의 입장표명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만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결국 최창식崔昌植을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 법정이 열리고, 1925년 3월에 이승만의 탄핵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김창숙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에 추대한 안창호 및 의정원과 각료들을 성토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와 결별하는 단초가 된다.

1920년 4월 초에 국민당의 광동정부가 내분으로 붕괴되었다. 그 때 한국독립후원회 자금을 관리하던 이문치가 종적을 감추고 오산과 능월 마저 떠나버리자 김창숙은 유학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그때 이문치가 학생들을 매수하여 김창숙을 암살하려는 정황이 포착되었는데, 학생들 중에는 광주에서 교육받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무렵 어머니가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만주일보󰡕를 보고 알았다.

7. 국내로의 잠입과 2차 유림단 사건

임시정부가 활력을 일어감에도 김창숙은 잡지를 간행하고 중국의 혁명세력과 단결을 꾀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24년에 우당友堂 이회영李會英(1867~1932)과 손잡고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군벌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하였는데, 이에 3만 여 정보의 황무지를 빌리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이를 건설할 자금 20만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마침 곽종석의 문집 간행을 위해 서울에서 유림이 모인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모금을 위해 귀국을 결정했다. 김창숙은 송영우 ․ 이봉노 ․ 김화식과 모의하여 국내 잠입 계획을 세웠다.

송영우는 먼저 잠입하여 인물들을 접촉하고, 이봉노는 권총을 구입한 뒤 북경에서 연락을 맡고, 김화식은 권총을 갖고 김창숙과 함께 귀국하기로 임무를 분담하였다. 당시 김창숙의 장남 김환기金煥基(1908~1927)가 북경으로 왔는데, 김창숙은 아들은 신채호에게 맡겨 공부시키고 자신은 서울로 출발하였다.

1925년 8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김창숙은 모금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진척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진주의 어떤 부호는 총독부로의 귀순을 알선해 주겠다며 전향을 권유하기도 했다.

분노한 김창숙은 “친일 부호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걸지 않고서는 우리 한국이 독립할 날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1월에는 직접 영남에 내려오기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때 김창숙은 언양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모금한 금액은 3.500원이었다.

모금이 실패하자 김창숙은 독립운동 방향을 전환하기로 하였다. 1926년 3월 중국으로 떠나면서 김창숙은 동지들에게 “이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하기 어려우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맡겨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5월에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은 김두봉金枓奉(1889~1961)의 집에서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만나 국내정세와 향후대책을 논의했다. 김창숙은 의열義烈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의열단義烈團 참모인 류자명柳子明(1894~1985)과 상의하여 무기를 구입 후 6월 초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원 중 일을 맡길 사람을 물색했다.

한편 김창숙이 출국한 직후인 1926년 4월 국내에서는 송영우를 필두로 유림 인사들이 일경에 체포되기 시작했다.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경북경찰서 요원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특별조사반을 구성하여 사건 전모를 파악하고자 했다.

결국 600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었지만, 일제는 주범인 김창숙을 잡지는 못했다. 이에 다른 인물들은 체포되어 송영우 ․ 김화식은 각각 징역 3년, 이봉로는 징역 2년, 손후익은 징역 1년 6개월, 김창탁은 징역 10개월이 선고되었다.(2차 유림단 사건)

북경에서 선발된 사람은 한봉근韓鳳根․나석주羅錫疇(1889~1926)․이승춘李承春이었다. 김창숙이 이들을 천진에서 만나자 모두 흔쾌히 나서기를 희망했다. 이들은 즉시 위해威海로 가서 배편을 찾았으나, 7월이 되도록 구하지 못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석주 홀로 무기를 휴대하고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해 서울로 잠입했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경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자,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으로 가서 권총으로 경찰과 직원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다시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마저 불발되었고, 그는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가 자살을 시도하였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일경이 즉시 병원으로 긴급 이송하여 이름을 묻자, 자신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1926년 8월 다시 상해로 간 김창숙은 이동녕,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등과 함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진영의 군소 당파를 없애고 통합된 단체를 결성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이때 임시의정원이 개편되어 이동녕이 의장으로 김창숙이 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8. 수감생활

1926년 12월 김창숙은 지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상해 영국 조계에 있는 공제병원恭濟病院에 입원했다. 그런데 이듬해 2월에 아들 김환기가 병 치료를 위해 국내에 보내졌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숨지고 말았다.

병환과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김창숙은 6월까지 입원해 있었다. 그때 이전에 광주에서 김창숙이 주재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던 유세백과 박겸이 문병을 왔다. 김창숙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병원비를 청산하지 않고 떠났다가 한국인에 대한 신뢰를 잃을 까 걱정되어 더 입원해 있었다.

유세백과 박겸은 일제에 제보하였고, 일본 경찰은 6인은 6월 14일에 영국 총영사가 서명한 체포장을 들고 와서 김창숙을 체포하였다. 김창숙은 나가사키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에서 수갑이 채워지고 다시 대구경찰서로 이송되어 이송 다음날부터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피체된 지 1년이 지난 1927년 7월이 되어서야 예심이 끝나고 가족의 면회가 허락되었다. 이때 부인이 “장차 집안일은 어떻게 하느냐”며 울면서 묻자, 김창숙은 ”나는 집안일을 잊은 지 이미 10년이오. 당신은 나에게 물을 것이 없소.“라고 대답하였다.

재판과정에서 김용무와 손치은 두 사람의 변호사가 변호를 하겠다며 위임서에 승인을 부탁했지만, 일제를 부정하는 김창숙은 이를 거절하였다. 변호사 김완섭이 하루에 세 차례나 면회하며 변호를 거절하는 이유를 묻자 일본의 법률을 거부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맡길 수 없고, 또 자신은 포로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며 변호를 거절하였다.

1928년 12월 김창숙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 주동자로 인정되어 ‘살인미수’, 「치안유지법」위반, 「폭발물 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와 변호를 거부하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예심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다리가 불구가 되었고, 앞서 보았듯 ‘벽옹躄翁’이 되었다.

1929년 5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집행정지로 풀려나 대구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차도가 없자 성주 사월리로 옮겨졌다. 그러나 한 달 뒤 다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곧바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병세는 1933년이 되어야 겨우 호전되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일광욕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병감病監을 순시하던 일본인 전옥典獄에게 다른 죄수들은 일제히 일어나 절을 하였지만, 김창숙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병동에서 잡범들의 감방으로 옮겨 수감되었다. 이 무렵 대전형무소에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도 같이 수감되어 있었다.

일제는 각종 회유책을 시도하지만 김창숙은 절조節操를 꺽지 않았다. 한 번은 최남선崔南善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化論」 가져와 감상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이 일본에게 붙어버린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사람으로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으로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는다. 이렇게 대답한 김창숙은 계속해서 감상문을 요구하자 다음의 시를 남긴다.

예전에 독립을 선언하던 때에는 / 의로운 소리가 육대주에 진동하더니 / 굶주린 개 되어 원식을 위해 짖는구나 / 양의사의 비수같은 이가 어찌 다시없으랴

이 시를 본 간수가 오히려 14년 형을 받고도 이렇게 격렬한 말만 하다가 어찌 살아서 나갈 수 있겠냐며 만류할 정도였다.

9. 해방

투옥된 지 7년째인 1934년 9월 김창숙의 병세가 악화되자 일제는 형집행 정지로 가출옥을 허용했다. 이에 김창숙은 대구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뒤에 대구 시내에 있던 둘째 아들 김찬기金燦基(1915~1945)의 집에서 요양했다.

이듬해에는 대구 남산동에 거처를 마련하였지만 일제의 감시를 인해 답답한 생활을 했다. 연금軟禁이 1년이 넘어가자 오히려 감시자들이 요양을 권유하였고, 이에 김창숙은 사돈인 문암文岩 손후익孫厚翼(1888~1953)이 있는 울산 백양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 당시 일제 경찰이 심산 김창숙 자택을 찾아와서 며느리에게 일제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에 도장을 찍을 것을 몇 차례 요구했다. 이에 며느리는 도장이 없다고 계속 거부했고 일제는 죄 없는 며느리를 끌고가서 손가락에 막대기를 끼워서 비트는 혹독한 고문을 했다. 이후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고 나온 며느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걸어서 백양사까지 갔다. 백양사에 도착하여 대문을 두드리자 두 다리가 불구인 김창숙 선생께 기어서 나와 며느리에게 큰 절을 했다. 이 당시 심산 김창숙 선생은 “네가 나라와 나를 구했구나?”하며 참혹한 고문을 이겨낸 며느리를 격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백양사에서 5년을 지낸 김창숙은 연금이 풀리며 1940년 5월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에 도착하여 처음 한 일은 어머니 묘소에 성묘하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시묘侍墓살이를 한 김창숙은 1942년 8월이 되어서야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때이다. 일제는 김창숙에게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그는 이 또한 끝내 거부하였다. 오히려 해외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둘째 아들 김찬기를 중경重慶으로 보냈다.

김찬기는 이미 1927년에 진주고등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에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이 당시 격문 3천여 장을 손으로 써서 진주시내의 요소에 붙이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다. 이때 고국을 떠난 김찬기는 다시 귀국하지 못하고 이역에서 사망했다.

1944년 8월 서울에서 여운형 등은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 아래 전국 각지에 세포조직을 결성했다.

1945년 8월 4일 이들 중 일부가 탄로나 검거되었는데, 김창숙은 1945년 8월 7일 밤에 성주경찰서로 잡혀가 왜관경찰서로 이감되었다. 건국동맹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어, 이 때문에 예비검속 시 체포된 것으로 보여 진다.

10. 해방 이후의 활동

해방 이후의 김창숙의 활동은 크게 통일정부 수립운동, 유도儒道 개혁운동, 반독재 투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에 김창숙은 왜관에 수감되어 있었다. 옥중에서 해방을 맞은 김창숙은 다음날 성주로 돌아와 치안유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음날 상경上京 길에 올라 대구에 들렀다.

대구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대구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며 서울에 도착하자 건준위원장인 여운형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다. 여운형은 난립한 정당이 60여개나 된다면 혼란한 상황을 전해주었다.

이 무렵 영․호남에 기반한 지인들은 민중당民衆黨을 만들어 김창숙을 당수로 추대하였다. 김창숙은 이 모두를 거부하고 9월 6일에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도 반대하면서, 임시정부로 뭉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9월 8일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하지 중장은 군정軍政을 실시하며 모든 권력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10월 16일에 이승만이 귀국했지만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 때문에 김창숙은 이승만을 만났으나 이승만은 김창숙의 불신만 키웠다.

이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한민당)이 창설되어 송진우宋鎭禹가 조언을 구하자 김창숙은 친일분자의 숙청이 우선이며, 송진우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주문했다. 김창숙은 한민당이 친일부호들이 많이 붙어서 좌․우 양쪽에서 미움 받는 정당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1945년 말부터 정국은 신탁통치의 찬 ․ 반 문제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5년 신탁통치 안이 결의 되어 국내에 알려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김창숙은 1946년 1월 신탁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문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같은 달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자 김창숙은 이승만 ․ 김구 ․ 김규식 등과 함께 8인의 특별위원으로 추대되었다. 2월 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최로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는 28인의 최고정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기구가 미군정의 자문지관인 민주의원民主議員으로 전락하자 공개적으로 이승만을 성토한 뒤 탈퇴했다.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는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1947년 7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로 분단은 기정사실화 되어 갔다. 김창숙은 1948년 2월 5일 남북통일 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외국군 철수, 남북정치요인 회담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3월 12일에는 김구 ․ 김규식 ․ 홍명희 ․ 조소앙 ․ 조성환 ․ 조완구 등과 함께 ‘단정을 거부하고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창숙의 염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한 만의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북한 지역에는 9월 9일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김창숙은 근본적으로 유학자儒學者였다. 해방 이후 그는 유도儒道를 개혁하여 재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유림계는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성균관)을 무대로 친일활동을 벌였던 황도유림皇道儒林 세력이 횡횡했다. 또한 지방향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유림도 완강히 개혁을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김창숙은 1946년에 5월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던 유도회 조직을 정비하여 유도회 총본부儒道會總本部로 통합했다. 유도회 총본부는 유림총회를 소집하여 유교부흥과 각종 개혁사업을 의결하고 총본부위원장 겸 성균관장으로 김창숙을 임명했다.

이에 김창숙은 친일세력을 숙청하고 하여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김창숙은 유교문화의 확장을 위해서 성균관의 대학화가 급선무라 생각하고 문교부와 교섭을 벌여 1949년 9월 전국 향교 재산 및 성균관을 바탕으로 하는 재단법인 성균관 대학을 설립했다.

이후 1953년에 성균관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심산 김창숙 선생은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문묘文廟가 지나치게 허식적이고 사대적임을 개탄하고, 112위의 위패 가운데 공자 및 4성聖, 10철哲, 송조宋朝 6賢과 국내 18현賢의 위패만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에 묻었다.

이 조치는 일부 유림의 격렬한 반발을 가져왔고, 후에 친일세력과 연합해 김창숙이 축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김창숙은 이승만의 독재에 계속 반대하였는데, 1955년이 되자 부패한 유림세력들의 공격으로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었다.

결국 김창숙은 1956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유도회와 성균관은 자유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하부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창숙과 유도회는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4.19 이후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유도회 및 성균관, 성균관 대학교는 모두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김창숙은 기력이 쇠하여 성균관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령에 운신이 불편한 김창숙은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은 김창숙을 찾아와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선전 활동에 협조할 것을 강권하였으나, 그는 끝내 거부하였다.

김창숙은 1.4 후퇴 때 겨우 피난길에 올라 김창숙은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였다. 1951년 봄 김창숙은 이승만의 실정과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한 ‘하야경고문’을 발표하였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으나 이때부터 반이승만 투쟁에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직면한 이승만은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국회의원 간접선거로는 집권이 어렵다고 판단,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이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은 국회 해산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직선제를 강행하고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구속했다.(부산정치파동) 이승만의 재선 욕심으로 혼란이 계속되자 6월 20일 김창숙․이시영․장면 등 81명의 인사들이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는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발표회장에 난입한 괴한들의 습격으로 인해 발표는 무산되었고, 김창숙은 부산형무소에 40일 동안 수감되었다가 불구속으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발췌하여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하여 7월 4일 국회에서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3선이 가능해진 가운데 1956년에 3대 대통령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야당에는 신익희와 조봉암이 후보로 나섰는데, 김창숙은 두 후보를 만나 합작을 권유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정작 선거 전에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서하자 김창숙은 다시 장면과 조봉암의 합작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당선되자 김창숙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이승만을 비판하였다. 이후에 김창숙은 모든 공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1959년에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자 이 소식을 성주에서 들은 김창숙은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위한 총궐기연합체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대통령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서한을 내는 등 이승만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

주지하다시피 이승만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끝에 4.19 혁명으로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창숙은 이 소식을 병상에서 들었다. 자유당 정권 붕괴 후 김창숙은 민족자주통일 사업에 관심을 기울었다.

1960년 9월 여러 혁신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연합하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김창숙은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 사업에 나섰다. 이시기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묵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을 추모하고 현창하는 사업에 관여하여,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아 그들의 정신을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반독재 활동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말년에는 그는 서울에 거처할 집 한 칸이 없어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였다. 5.16 쿠데타 박정희 군부세력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미 83세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었다.

쿠데타 얼마 뒤 박정희 소장은 직접 중앙의료원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을 문병 왔다. 1962년 3월 1일에는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수여되었고, 독립유공자 중 애국지사연금을 최초로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84세의 노유老儒는 얼마 뒤인 5월 10일 서울의 중앙의료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 시대를 넘어 자주독립운동의 장렬한 투쟁으로 살았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 사무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우철처장(이육사 대구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은 "의성 김씨 종손 심산 김창숙 선생의 유해는 수유리 독립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또한 서울과 경북 성주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의 자주독립운동정신을 기리는 문화제와 학술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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