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학교(총장 배덕효)와 세종연구원(이사장 이요섭)이 공동으로 2019년 6월 13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 전원경 박사를 초청해 “예술, 여행을 떠나다 : 파리”라는 제목으로 세종포럼을 개최했다.

세종대학교와 세종연구원 공동으로 13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 전원경 박사를 초청해 “예술, 여행을 떠나다 : 파리”포럼 개최/세종대

이날 강연에서 전원경 박사는 “파리는 유럽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도시다. 이 도시에 쌓인 숱한 역사와 문화예술의 유산들은 파리를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로 만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파리가 이처럼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는 나폴레옹이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군대가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공화주의자인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혜성처럼 등장했으며, 1793년 툴롱을 공격한 나폴리군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 준장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군인이었지 정치가는 아니었으며, 이 후 거듭된 승리로 인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 박사는 “스스로를 ‘나폴레옹 1세’로 칭한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로마 황제의 현신으로 여기며, 로마 제국의 부흥을 꿈꾸었다. 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주변국가들을 차례로 침략해서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지를 프랑스 제국에 편입시키고 자신의 형제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할양해 준 나라들에서는 곧 반란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이 된 것은 대륙봉쇄령의 한계, 그리고 1812년의 무리한 러시아 원정이었다. 1812년 러시아원정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제국을 지키는 조건으로 프랑스 황제 자리에서 퇴위한다. 자신의 운명을 건 1815년의 워털루 전투의 패배 후 나폴레옹은 영국군에 체포되어 아프리카 한가운데의 고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 보내진다. 이 섬에는 그는 7년을 버티다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1839년 나폴레옹의 유해는 세인트헬레나에서 파리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한 자신의 개선문을 지나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1806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건축되기 시작한 이 개선문은 당초 로마에 있는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이다. 자신이 로마 황제의 후손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나폴레옹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오늘날 나폴레옹의 개선문은 파리의 중심부에서 당당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며, “파리의 중심에 거대한 나폴레옹의 기념비가 선 것이다”라며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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