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고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이야기 1

이 기록은 아버님 고안병하 치안감이 돌아 가시기 직전인 1988년 여름이나 초가을에 작성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님은 1988년에 있었던 5.18 청문회에 신군부측 증인으로 채택이된 상태였다. 그 당시 아버님은 혈액 투석으로 일주일에 2번씩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병원 다녀 오시는 날은 무척 힘들어 하셨다. 5.18 청문회를 시청하시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신듯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 오셨다. 그들 대부분은 5.18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을 시청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생전 하지 않던 기자와의 인터뷰도 몇 차례 하셨다.

이 기록 처음에 보면 ‘전남도민에게 감사’라는 구절이 있다. 사실 나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버님이 1979년 2월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 받은 것이 공직자로서 마지막 발령이고,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불명예스런 마감을 하셨다.

대부분 사랑이라면 전남의 인연을 원망할터인데, 감사하다고. 아버님 명예회복을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검토하다가 감사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경찰관이 광주시민을 지켰다고만 알고 있다. 경찰관을 시민이 지켜 주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르고 있다 .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경찰청이나, 광주시청이나, 5ㆍ18단체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올해에 강연이나 토론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많은 분들께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아버님을 대신해 전남인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린다. 그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님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하신다.

1) 을 보면 계엄군들이 시위 중 체포된 많은 시민들을 자기네 쪽으로 끌고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했다. 많은 시위 부상자를 인계한 전남경찰국은 그들에게 식사제공과 치료를 해주었고 보호하였다.

그 보답으로 광주시민은 21일 도청 철수 시 계엄군과는 치열한 투쟁을 한 방면 당일 철수한 경찰에게는 보호와 격려를 하였다. 이 사실은 80년 5월에 광주시민은 무조건적인 반정부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한 조직과의 저항임을 보여 준 것이다.

광주시나 5.18 단체, 경찰청 등에서 이 사실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무척 아쉽다. 광주시민은 정부기관의 부당한 처사에 저항권을 해사한 것이다.

80년 5월에 전남경찰관들은 부당한 상부의 지시에 양심적으로 저항권을 행사했으나,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예 회복은 커녕 제대로 된 평가 조차 못 받고 있다.

이래서야 공직자가 양심적 소신을 갖고 본분을 다 할수 있을까?

공직자에게 바로 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국민들 또한 공직자가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도 하고 바른 공직자는 지켜주어야 한다.

5) 를 보면 5월 22일 시위진압을 나가 있던 경찰 간부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참지 못해 항의를 하였다. 계엄군 장교는 진압 방식을 바꾸기보다는 아버지뻘 되는 도경과장을 부하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폭행하였다.

과장님은 울면서 시위 군부에게 호소하였다고 한다.

‘시민 여러분 해산 하십시요. 여기에 있다가는 죽습니다’

경찰과 일부 학자들은 80년 광주에서 고안병하 치안감의 지시에만 의해서 80년 전남경찰관이 시민을 지켰다고 평하는 것 같다.

5) 에서 보듯이 많은 전남경찰관들이 시위 현장에서 독단적으로 시민 보호에 나름대로 소신을 폈다는 사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80년 5월에 광주에서 안병하국장은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지시를 거부하기 전에 전남중정부장과 상의도 하였고, 참모분들과도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음을 결정한 후에는 가족들에게 유언에 가까운 연락을 하셨다. 내가 아버님 일과 아버님 참모분들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이유이다.

80년 광주에서 시민과 공직자의 명예를 목숨 걸고 지킨 것은 아버님 한 사람만의 공적이 아니다. 지금 아버님 한 사람만의 공적으로 축소하는듯하여 고안병하 국장의 아들로서 비탄스럽다.

80년 전남경찰관들에게 죄송스럽다.

【안병하 치안감 프로필】

○ 1928년 강원도 양양 출신
○ 육사8기 김종필 김형욱 강창성 윤필용 유학성 이희성 등과 동기
○ 한국전쟁 당시 포병 중위 시절 춘천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으로 화랑무공훈장 수훈.
○ 1962년 총경으로 경찰 투신
○ 부산중부경찰서장
○ 1968년 서귀포 간첩사건 육상작전 지휘, 중앙정보부장 표창 수상.
○ 화랑무공훈장 2개, 녹조근정훈장 3개 수훈.
○ 1971년 43세의 나이로 경무관 승진
○ 치안국 방위과장, 소방과장, 강원도경국장, 경기도경국장
○ 1979년 2월 운명의 전남도경국장 부임
○ 1980년 전남경찰기동대 안전수칙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학교 안으로는 진입하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잡혀온 시민들에게도 식사를 정상적으로 지급하고 가혹행위하지 마라.”라고 특별지시를 내리는 등,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 1980년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 앞에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발포명령 거부.
● 1980년 5월 26일 전남도경국장 직위해제 및 보안사 연행 후 8일 동안 혹독한 고문.
● 1988년 10월 10일 고문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 중 어느 내과병원에서 별세.
○ 2003년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선정
○ 2005년 국립 현충원 안장
○ 2006년 순직 인정
○ 2015년 8월 이달의 호국인물 선정
○ 2017년 11월 22일 경찰영웅 선정 및 전남경찰청사 흉상 제막
○ 2017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 추서
○ 2018년 국립현충원에서 치안감 추서식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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