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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현장에서 지켜본 광주민주화운동 확산 원인
[연재] 故 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이야기 3
  • 안호재 / 故 안병하 치안감 아들
  • 승인 2019.06.19 03:44
  • 수정 2019.06.19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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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안병하 치안감과 전남경찰관 참모들은 80년 초부터 시위 확산을 대비해 유용 가능한 병력을 광주로 집결시켜 임시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적응 훈련 및 대처 훈련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광주에서는 경찰 병력만으로도 광주의 학생들 시위를 진압할 수가 있었다는 뜻이다.

故 안병하 치안감은 상황 예측이 빠르고, 차분하며 치밀한 성격이다. 6·25 전쟁 발생 시 춘천지역에 주둔한 6사단 7연대에 복무 중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다른 모든 부대가 농번기에 많은 장병들을 귀향시켜 집안 농사일을 돕게 했는데, 7연대는 장병들의 휴가는 커녕 외박도 금지 시켰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진지공사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6.25 발생 시 유일한 승리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80년 5월 전남경찰을 지휘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일부에서는 80년 전남경찰관들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작자들이 있는데, 혐오스럽다. 시위 확산의 원인은 특전사의 살인적 과잉진압과 국민을 저버린 일부 공직자의 사욕 때문이다.

5.18이 발생한 지 39년이 지났다.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개인의 영달과 개인의 안위만 도모한 고위 공직자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역사적 심판을 받았을까? 자기의 목숨을 버리며 양심적 행동을 한 공직자는 과연 몇 명이나 국가적 예우를 받았을까?

광주 현장에서 지켜본 광주민주화운동 확산 원인

故 안병하 치안감은 1971년 전국에서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서울 서대문 경찰서장으로 근무하였다. 인근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나는 토요일이면 아버님이 근무하던 서대문 경찰서에 자주 갔다. 집에서 만나기 힘든 아버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갈 때마다 직원들과 회의 중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중국 음식을 시켜 먹고, 회의하는 곳 구석에서 회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커다란 지도를 걸어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들을 하고 계셨다. 대부분이 경찰들의 안전대책과 시위대의 안전 이야기였다. 예상 문제점을 물어보고 대책을 요구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무엇 때문에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동료 경찰분들이 시위 진압을 한다는 것을 알기에 학생 때 한 차례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故 안병하 치안감이 서대문 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 학생이든 경찰관이든 큰 피해가 없었음을 늘 자부하셨다. 시위진압 책임자로 첫 근무지가 서대문 경찰서였다.

80년 광주에서 시위 확산 원인에 대해 안국장은 <과도한 시위진압>을 첫 번째로 꼽았다. 과연 누가 5월 17일 광주를 평온의 도시로 만들었나? 학생들과 경찰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평온한 광주에 계엄군, 그중에서 특전사를 집중 배치한 사유가 무엇일까? 많은 전남경찰 정보과 요원이 광주 505보안사에 차출되었다고 한다.

왜 경찰이 할 일을 보안사가 진두지휘하면서 주요 인물을 체포하였을까? 물론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도 보안사가 지휘했다고 한다.

17일 자정 전국 비상계엄 확대 이전에 보안사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얘기다. 18일에 계엄군이 투입되어 시위 현장 일선에 나서고, 경찰이 2선에 나설 때는 경찰도 반겼다고 한다.

3월부터 학생들 시위 진압에 지친 경찰들은 계엄군이 지원군이라 여긴 것이다. 故 안병하 치안감은 소규모 부대라도 현장에는 지휘관을 앞세운다. 책임과 권한을 분명히 하여 현장에서 신속한 처리와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다.

시위현장 2선에서 계엄군 시위진압을 지켜보던 경찰 지휘관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안국장에게 보고를 하고 안국장은 계엄사에 시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계엄군은 시위진압에 경험이 많은 경찰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시위 진압을 하였다. 그들의 방식은 시위대 해산이 아니라 시위대 압박이었다. 해산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가 폭행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학생들의 잔혹한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과 경찰이 말리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은 시민 뿐만아니라 자제를 요구하는 경찰까지 폭행하기 시작하였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시위진압에 나선 경찰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전남경찰국 지휘부는 시민들을 지키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안국장은 현 상황을 치안본부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계엄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는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안국장은 목숨을 걸만큼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공직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지시거부

80년 5월 광주 시위가 악화된 원인 중 하나를 故 안병하 치안감은 악성 유언비어로 보고 있다. 기자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릴 수 없었고, 시내·외 전화도 불통된 상황에서 곳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시민들은 잘 알 수 없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이야기와 눈으로 목격한 일들만 알 수 있는 상태였다. 전남 치안을 맡았던 안병하 국장은 광주시내에 20여 곳 정보과 직원들의 상황보고로 현지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안국장이 시위 확산 원인을 악성 유언비어의 확산이라고 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지침을 내리면서 광주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하였던 이유는?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경찰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상부의 지침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전남경찰국을 지휘하셨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공직 생활 30여 년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였을까?
21,22일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서 유언에 가까운 말씀을 하였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이 “권력에 눈먼 자들 앞에서는 경찰국장이 말단 공직자다. 우리나라에서 공직자는 운이 좋아야 버틸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말들은 80년 전남경찰관들을 돕거나 동조하는 공직조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광주를 사랑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그들은 위급 상황에 어디서 무엇을 했나?

치안 본부는 경찰의 본분을 망각하고 신군부의 의중만 살피니 이 난국에서 광주시민을 구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된 안국장은 전남경찰관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고,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안국장 자신이 지기로 한 것이다.

당시 무조건 자신을 믿고 따라준 직원들에게 아버님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셨다. 이런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신군부의 눈치를 보던 치안본부는 안국장과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전남경찰관들을 강제 해직시켰다.

안호재 / 故 안병하 치안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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