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정현숙 기자] 국회 공전 못지않게 지난해 12월 시작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관련자들의 재판이 6개월이 지났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전히 제자리에서 공전을 반복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에 대한 재판 진행에서 이들이 시간 끌기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정황적 의심이 나오고 있다. 대법관 출신들이다 보니, 법리에 정통한 재판 전문가들이 혐의사실을 다투는 게 아니라 지엽적인 문제로 딴지를 걸어 공공연히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 개가 넘는 한글 파일 문서를 일일이 검증하고, 법정에서 쪽수까지 확인하는 이례적인 장면까지 등장했다. 검찰 증거도 거의 동의하지 않아 2백 명이 넘는 증인이 출석해야 하는 상황이다.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8월까지 재판을 늦춰 불구속 재판을 받기 위한 꼼수란 지적이 나온다.

18일과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에서 잇달아 열린 검증 기일에서는 ‘형광펜’ 공방이 벌어졌다. 변호인들은 출력물의 형광펜 표시가 파일과 왜 다르냐고 지적했다. 혹시 형광펜을 검사가 마음대로 칠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검사는 “검찰도 문건을 봐야 하니까 주요 부분을 표시해서 출력한 것”이라며 “원본 파일에 형광펜 표시를 저장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변호인들은 검찰이 법정에서 보여준 파일이 검찰 서버의 어디에 저장돼있는지, 과연 임 전 차장 USB에서 확보한 게 맞는지를 계속 따졌다.

이들의 재판에서 밑도 끝도 없이 지루한 검증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법정에서 온종일 원본 파일과 출력물의 차이를 대조하는 사이, 양 전 원장은 내내 눈만 감고 있었다. 지난 14일은 이들의 변호인들이 요청해 열린 검증 기일이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에서 확보한 법원행정처 문건의 한글파일과 이를 출력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한 자료가 동일한지를 믿을 수 없다면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출력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내용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사법농단의 핵심 증거인 임 전 차장 USB 문건의 증거능력 인정과 관련해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고, 재판부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절차”라고 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밤 9시 30분까지 무려 7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검증 기일에서 법원행정처 문건 내용을 검찰이 조작한 정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작 변호인들은 소극적인 태도로 지엽적인 지적만 했다.

대표적인 예가 ‘쪽수’ 공방이다. 박병대 전 처장 측 변호인은 검찰이 같은 문건을 2개 제출했는데 왜 하나는 쪽수가 1쪽이라고 돼 있고, 다른 하나는 25쪽이라고 돼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 설명에 따르면 이는 기술적인 문제였다. 문건별로 파일을 만들면 1쪽부터 시작하고, 여러 문건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면 쪽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 헌법재판소 주요 사건을 정리한 행정처 문건을 검찰이 제시하자 이번엔 고영한 전 처장 측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함초롬 바탕체로 된 파일과 검찰의 출력물 글씨체가 다르다고 했다. 검사는 “출력할 때의 컴퓨터에 함초롬 바탕체 폰트가 설치돼있지 않아서 다른 기본 글씨체로 출력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일반적인 피고인이라면 재판을 장기화해서 시간을 끄는 전략은 시간과 비용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엄두도 내기 힘들다.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형사법 취지가 사법농단 등 대형 범죄 사건에서는 오히려 딜레마가 되고 있어 제도 개선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도 비슷한 재판 지연 전략이 논란이 됐다. 1심에서 병원 치료를 이유로 수시로 불출석하며 재판부로부터 경고를 받았고, 항소심에서는 증인을 무더기로 신청해 일정이 지연됐다. 결국 구속 만기 전 2심 선고가 불가능해지면서 조건부 보석으로 풀려나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구속 기간은 1심과 2심 모두 최장 6개월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달리 상대적으로 인권을 강조하는 다른 나라의 경우 오히려 구속 만기가 없는 경우도 많다.

구속 뒤 보석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은 중형이 예상되는 범죄에 대해선 기한 없는 구금이 가능하다. 독일도 고등법원의 심사를 거치면 구속 기간의 제한이 없고, 일본은 한 달마다 법원의 허가를 받아 계속 연장할 수 있다.

삼성 양승태 행정처에 '족집게 홍보 강좌'

한편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19일 양승태,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재판에서 과거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삼성그룹 홍보조직 방문 결과' 문건이 일부 공개됐다.

이 문건에 따르면, 이민걸 당시 기조실장과 조병구 대법원 공보관 등이 2016년 3월 8일 삼성전자 5층 접견실을 방문해 삼성전자 임직원을 만났다고 한다. 이인용 전 사장과 백수현 전무 등 삼성전자의 홍보 업무를 총괄하는 경영지원실 커뮤니케이션팀이 그 자리에 배석했다.

문건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대법원 홍보 및 소통 담당 조직개편 관련 조언’ 내용으로 “인내심과 끈기 있는 홍보의 시간을 축적하라”고 강조했다.

행정처는 삼성그룹의 조언을 적극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관련 법안이 좌초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법원 비리까지 공론화되자, 효과적인 홍보전략이나 위기 대응 방안이 강구하려 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지난달 31일 등 서류 증거 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2017년 1월 17일 행정처 심의관이 서울중앙지법 형사공보관을 통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영장청구서 스캔본을 이메일로 전달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회장 구속 영장 발부 여부가 결정되기 전으로 이 부회장뿐 아니라, 최순실 씨, 우병우 전 민정수석, 박선숙 국민의당 영장청구서 등도 행정처로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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