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은 나의 복싱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날로 기억될 뜻깊은 날이다.

문성길 심영자 장정구 이경연 챔프 (좌측부터).

결론부터 말하면 전 88프로모션 심영자회장(43년 군산)과 두체급을 석권한 돌주먹 문성길(61년 영암)이 4반세기 동안 끌고간 길고긴 악연의 사슬을 끊어버린 날이다.

그날은 심영자회장의 77세 희수(喜壽)연 이 벌어지는 잔칫날이여서 기쁨은 배가 되었다. 그날 두사람이 상봉하던날 조금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마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만남처럼 감동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장정구 챔프와 함께 행사를 주관한 나는 며칠전 심영자회장의 중곡동 자택을 방문하였다가 깜짝 놀랐다 몇 개월째 거동을 못하시고 운둔생활을 하는 탓에 무려 15KG이나 체중이 빠진 쇠잔한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회장은 마지막 남은 유품인 앨범을 나에게 주면서 천국에서 보자는 말을 던질땐 가슴이 뭉클해 지기 까지 했다. 심영자 회장은 말년에 녹록치 않은 않은 삶을 사셨다. 그런 심회장을 위해 장정구 챔프는 칠순 잔치를 베풀어 드렸고 심회장의 오래전 작고한 남편의 경남고 후배인 롯데 신준호 회장에게 심회장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3천만원을 조달받아 전달해 드리는 조력자 역활을 묵묵히 수행했다. 이번 희수연 찬치도 장챔프 가 나에게 먼저 주최를 건의했고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서 치러진 행사였다. 결국 좋은 분위기 속에 잘 치룰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문성길 챔프와 심영자 회장이 25년만에 화해를 하는순간.

사실 문성길과 심영자회장의 영욕(榮辱)이 점철된 인연은 드라마틱 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두사람의 인연의 연결고리가 형성 되었을까? 아마추어 국가대표 문성길의 최종목표는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후 복싱을 접을 생각을 했었다.

이미 85년 서울 월드컵에서 밴텀급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문성길은 86년 5월에 있을 세계선수권과 9월에 있을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 평가전이 86년 3월 태능선수촌에서 펼쳐질 때 시발점(始發點)이 형성된다.

허영모와의 3차전 경기가 승패를 떠나 문성길의 프로행에 급물살을 타게 만든것이다.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사실 그 허영모와의 3차전에 숨은 비화가 묻혀 있다. 그간 2차레의 대결에서 문성길은 팽팽한 접전 끝에 신승(辛勝)을 거뒀다. 사실 졌다는 판정이 내려도 할말이 없는 경기였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와중에도 행사장에 참석한 KBI 이상호 회장.

하지만 3차전은 달랐다. 2회 중반 까지는 문성길은 허영모에게 열세를 보였지만 2분이 경과하면서 발동이 걸린 문성길의 공세에 허영모가 클린치를 하자 한차례 파올을 얻으면서 분위기를 반전 시킨다. 3회에 라이트훅을 명중시키자 허영모의 무릎이 크게 꺾이면서 스탠딩 다운을 뺏어내는등 1.2차전과 달리 5ㅡ0 판정승을 거둔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친 경기라고 써있을 정도로 문성길의 완승이었다. 허영모도 나와의 두차례 대담에서 그경기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라고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채점표가 문제였다 5명의 심판중 3명이 1점차로 문성길의 근소한 우세로 채점했고 2명의 심판은 동점을 준 상태에서 문성길의 우세승으로 판정을 한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문성길은 복싱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자신이 88서울 올림픽에서도 허영모에게 밀릴수 있다는 일말의 불안감에 빠진 것이다.

문성길은 당시 영향력있는 특정인을 지목하며 그가 허영모와의 경기에서 작업(?)을 했다는 의혹을 품은 것이다. 문성길은 과거 고교시절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번번히 패하면서 동메달만 6차례 획득한 예전의 트라우마가 재현될수 있음을 떠올리며 이같은 풍토에서는 더 이상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훈련을 할수없다고 생각한다.

탄다타 안상우대표와 장정구챔프 절친 이건동 사장.

그리고 행동으로 옮긴다. 86년 12월 그는 심영자 회장에게 연락을 취해 경남호텔에서 만남을 가졌고 즉석에서 심회장이 1차 계약금 3천만원을 건네자 문성길은 수락함으로 써 일사천리로 프로행이 일단락 되었다.

강철체력과 돌주먹으로 무장한 문성길의 입단은 88프로모션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보증수표였다. 드디어 87년 3월 문성길의 프로 대뷔전이 잡히자 방송 중계료만 당시 IBF챔피언 수준인 5천만원이 지급될 되었고 당시 파이트머니도 5백만원에 책정되는등 최초의 세계선수권자에 명성에 부응하는 대우를 쏠쏠하게 받았다.

이후 문성길은 밴텀급과 슈퍼플라이급에서 두체급을 석권하며 통산 11차방어에 성공한다. 하지만 운명의 93년 11월 13일 문성길의 WBC 슈퍼 플라이급 10차방어전에서 극심한 감량에 시달리던 와중에 어느날 모신문사 기자에게 걸려온 전화에 문성길은 이번 방어전이 끝나면 은퇴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할 정도로 당시 33살의 문성길은 지쳐있던 상태에서 경기를 치룬다.

결국 한차레 다운을 뺏고도 판정으로 벨트를 풀면서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94년 1월 매니져 김철호가 외국으로 떠나면서 88프로모션은 4월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문성길에게 지급되지 못한 파이트머니가 뜨거운 감자가 되어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후 파이트머니를 지급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양측이 합의점을 찾지못하고 의견충돌이 발생 결국 법정으로 연결되는 악연의 관계로 전환된다.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면서 흘러간 세월이 무려 25년이다. 나는 이번 심회장의 희수 잔치에 대척점에 있던 두사람의 불편한 관계에 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문성길에게 서로의 잘잘못을 떠나 이번 기회에 화해를 제의하면서 지난 과거를 묻어버리자고 설득하자 시멘트처럼 굳어있던 문성길의 마음이 봄눈 녹듯이 조금씩 풀렸다.

현역시절 문성길 챔프의 와 심영자회장(우측).

그리고 역사적인 7월6일 심영자 회장과 문성길은 많은 권투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포응하며 화해를 했다. 심회장의 면전에서 문성길이 축가를 부를땐 가슴이 뭉클했다. 사람의 맘이 옹졸해지기 시작하면 바늘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지만 넓게 생각하면 태평양보다도 넓은게 사람의 마음인가보다 심영자회장 희수연의 하이라이트는 장정구 챔프가 식대비를 계산하려 하자 거절한 안상우 탄다타 사장이다.

그는 오늘같이 기분 좋은날 식대비 일체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말하며 총총히 자리를 떴다. 요즘처럼 각박한 현실에 가슴 훈훈해 지는 미담이다 나를 위해 행하는 일은 그여운이 오래가지 않지만 오늘 하루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 여운은 두고두고 행복으로 다가온다.

그덕분에 각종 행사비용을 제외한 오백만원에 육박하는 축의금 전액를 심회장 에게 장정구 챔프가 전달해 드리는 모습을보고 발길을 돌렸다. 니이체는 말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은 오늘 단한사람을 위해서 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위해 기뻐하는일을 하는 것이다. 다음 팔순 잔치는 심영자 회장 사단의 맏형인 이일복 선배가 준비한다고 한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와중에도 먼길에서 왕림한 이상호 KBI 회장을 비롯한 참석하신 모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리면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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