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 기자]= 지난 심영자 회장 희수연때 귀한 손님들이 다수 참석해서 글을 쓰는 입장에선 나는 쾌재를 불러 일으켰다. 속된말로 좋은 먹이감(?)이 나타난 것이다. 

그중 배우 소이현의 부친인 국가대표 복싱선수 출신의 조주연(60년 전주)과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남의(한국체대)선배가 나란히 참석 자리를 빛내주었다.

2년 뉴델리 SH 급 국가대표 김현호(좌측) 와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

이 두 사람은 81년 킹스컵 선발전 최종결승에서 맞붙어 이남의가 판정승을 거둔 전력이 있던 호적수 관계이기도 했다. 이남의는 문성길과 같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윤영복(경희대), 장한곤(한국체대), 신준섭(원광대) 등 간판급 복서들을 제압하면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첫 태극마크를 단다.

이후  81년 킹스컵과 월드컵, 마르코스배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며 국위를 선양한 베테랑 복서다.

국가대표 출신의 이라는 이력보다는 배우 소이현의 아빠로 유명한 조주현은 81년  뉴질랜드 국제대회 금메달(미들급)과 제1회 마르코스배에서 이남의 와 태극마크를 달고 동반출격한 사우스포 강타자 출신였지만 부상으로 일찍복싱을 접은 복서였다.

그럼 시간의 수레바퀴를 37년전으로 돌려 뉴델리 1982년 아시안 게임 선발전으로 돌려보자, 당시 최종 선발전이 끝나자 메달박스 복싱에 적신호라는 기사가 뜬다 장흥민· 황철순· 황충재 · 김인창· 최충일· 박일천등 주력들이 대거 빠진 복싱 대표팀은 허영모· 김동길 · 박기철을 제외하면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82년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한 김현호와 김의진(우측).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L급 국가대표 이현주(목포대)가 고희룡(웅비) 에게 물리면서 중도 탈락했고 F급 권채오(한국화약)와 Fe급.박기철(한국체대)도 황동용(군산체)과 박용운(부산 금성고)에 힘든 사투 끝에 이름값으로 승선(乘船)에 성공을 했을뿐 아니라 82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LM급 김의진(63년. 군산대)도 고교생 이해정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다.

설상가상으로 미들급 대표로 선발된 대표팀 최고참 조용래(수경사)가 본선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손목부상으로 이남의로 전격 교체되는등 악재의 연속 였다.

이에 대해 모신문사 기자는 기본기도 재대로 갖추지 못한 선수들이 한심한 기량을 선보인 대표선발전 였다는 악평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숱한 파열음을 토해내면서 탄생한 12체급의 태극전사들을 살펴보면 LF 허영모(순천 금당고) F 권채오(한국화약) B문성길(목포대) Fe 박기철(한국체대) L 권현규(목포대) LW 김동길(한국체대) W정용범(동국대) LM 이해정(서울체고) M이남의(한국체대) LH 홍기호(청주사대) H소배원(원광대) SH 김현호(한국체대) 였다.

총12체급중 8체급이 호남선수들로 나머지는 서울 두체급 충청이 두체급식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최고참은 당시 한국체대 4학년 김현호(59년 군산)였다.

8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 허영모 문성길 김동길 정용범 이해정 이남의 홍기호.

그는 김명복배와 전국체전에서 7차례 우승을 차지했던 베테랑 였지만 대표선발전에서 만큼은 LM급에서 박일천과 나경민에게 에게 4연패를 당하면서 태극마크와 인연이 없던 복서였다

그런 그가 새로이 슈퍼 헤비급이 신설되자 한국체대 은사였던 박형춘 감독의 천거로 평가전에 출전 김남희(전매청)를 제압하고 첫 태극마크를 단다.

첫 출전한 82년.아시아 선수권에서 체육관 후배인 LM급의 김의진과 함께 동반출격 금메달을 획득하며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이어진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체육관 후배인 김의진이 복병 이해정(63년.대천)에게 좌초당해 동반출격이 무산되자  한쪽 날개가 떨어져나간 것 같은 허탈함에 빠진다. 

나와 40년 지기인 김의진은 이후 교수직이 보장된 아마츄어 생활을 청산하고 이듬해 프로로 전향한다.

한편 허영모와 함께 유이한 고교생였던 그가 입촌하자 김현호는 허영모를 룸메이트 삼아 김의진이 빠진 허전함을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달랜다.

반면 군대 이등병 이해정은 각종 청소와 선배들의 빨래등 허드렛일은 자연스럽게 그가 담당하게 된다.

특히 저녁 간식 거리를 사러 선수촌 밖에 있는 편의점으로 먼길을 걸어갈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는 문성길과 허영모의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이여서 문성길 역시 허드렛일을 이해정에게 전가(轉嫁)시켰던 공범(?)이라는 울타리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문성길.조주연.이남의.(우측).

오래전 상계동 백병원에 근무하는 20년 지기 이해정(한국체대)이 체육관을 방문하여 문성길과 조우를 해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왠지 굳어있는 표정으로 일관한 해정이의 얼굴을 보면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가면 지난날들은 추억으로 채색되어 우리에게 감미롭게 전달된다 마치 군대생활이 회상되어 다가오듯이.. 각설하고 82년 아시안게임에서 북한팀은 그해 6월 평양국제대회에서 6체급을 석권하는등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LF급 고용환은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한 강자였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에서는 대표선수들을 남산으로 불러 북한선수들의 경기를 보여주며 필승의 의지를 고취시켰다.  한국에서는 김동길과 허영모 박기철 에게 금메달을 예상하고 있었다. 

열세를 인정한 코칭 스탶과 선수들은 유기체처럼 상호협응 하면서 대회에 출전한다. 경기가 시작되자  예상을 뒤업고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승전보에 전체급에서 준결승에 진출한다.

이중 9체급에서 결승에 올라 기적의 퍼포먼스를 이어가면서 무려 7체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양과질에서 비약적인 성과를 창출해냈던 대회였다.

특히 조용래의 대타로 출전한 M급 이남의(한국체대) 금메달도 인상적 이었다.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64년 동경올림픽 미국의 헤비급 대표인 버스터 마티스는 선발전에서 조.프레이져를 꺽고 본선에 진출 했지만 올림픽 선수단에 합류 훈련하던 마티스가 불의의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해지자 스파링 파트너로 동행한 조.프레이져가 대신 출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 금메달이 미국의 유일한 금메달 였다는 점이다

남북한은 총7체급에서 맞대결을 펼쳐 문성길·김동길·정용범·홍기호등이 승리를 거둬 4승3패로 우위를 점했던 대회였다.

여담이지만 출전당시 유인탁· 손갑도· 고진원등이 호화 멤버로 이뤄진 레슬링은 10체급에서 단한개의 금메달도 획득하지 못해 복싱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당시 대학졸업반 였던 김현호는 준결승에서 북한의 조봉길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2ㅡ3 으로 고배를 마신다. 

박형춘 대표팀 코치는 현호가 경기를 지배했지만 운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교직원 채용 순위고사와 아시안게임 일정이 겹쳐 시험을 응시할수 없었던 김현호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례적으로 그들에게 전원합격 처리해주는 혜택을 줌으로써 최대의 수혜자가 됐다.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문성길과 표정이 굳어있는 이해정(우측).

고교졸업반인 이해정도 대학입학 학력고사와 맞물려 양영자(탁구) 박미선(육상)등과 함께 현지에서 시험을 치뤘던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회였다. 김현호는 이듬해 10월 선린중학교로 교사 발령이 난후  34년을 교직에 봉직한후 올해 명예 퇴직을 했다.

그는 공무원 연금만으로도 노후준비를 등 따뜻하게 준비를 한셈이다. 그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허영모는 올초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김의진은 제주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인생살이나 복싱이나 천상병시인의 귀천에 나오는 시구절처럼 잠시 놀다가 떠나가는 소풍이란 생각이 든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세계챔피언이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팔자가 펴지는것도 아닌것같다.

예전에 최혜영이란 가수가 불렀던 ..그것은 인생.. 이란 노래의 가사가 생각난다  .. 인생이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수 없는 영원한 시간속에 잠시 서 있을뿐....저가는 세월속에 빈손으로 가는 것 그것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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