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황교안 "사노맹 연루 조국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실체 조국 전 민정수석에게 연일 자유한국당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안 검사 출신인 황교안 한국당 대표까지 나서 조국 후보자의 사노맹 사건을 두고 색깔론으로 몰아 부치자 더불어민주당이 방어에 나선 모양새다.

황 대표는 12일 조 후보자를 향해 "과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관련 사건으로 실형까지 선고받았던 사람"이라면서 "사노맹 몸담았던 조국, 법무장관 앉는 것 말이 되는가"라고 직접 공격에 나섰다.

이에 대해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과도한 공격, 구태정치를 중단하고 역량 검증에 집중하라"고 지적했다.

홍 수석대변인은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검증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자유한국당이 예의 구시대적 '색깔론'을 제기하며 막무가내식 정치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황 대표를 향해 날을 세웠다.

이어 "군사 독재시대 전두환 정권의 공안검사로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고 수많은 젊은 청년들을 감옥살이 시켜왔던 공안검사 출신의 황교안 대표가 아니던가."라며 "황 대표가 착각하고 있는 권력에 자생해 없는 죄조차 만들어냈던 시대가 지금은 아니란 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노맹 사건은 1991년을 전후로 민중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결성했던 조직원들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체포되거나 수배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사노맹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으로 1988년 4월 1일 백태웅·박노해를 비롯한 약 200여 명의 조직원이 모여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1989년 11월 12일 정식으로 출범을 선언한 사노맹은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정권 수립, 그리고 사회주의적 제도로의 변혁, 진보적인 노동자정당 건설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91년 3월 10일 중앙위원이었던 박노해를 비롯해 11명을 체포했고, 1992년 4월 29일에 중앙위원 백태웅을 비롯한 주요 간부 39명을 체포·구속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 구속자들을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그 수괴 임무 종사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1992년 8월 14일부터 1993년 1월 27일까지 진행된 1심 재판을 통해 박노해·백태웅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노맹사건은 중앙위원 체포 이후 조직이 실질적으로 와해됐지만, 이후에도 사노맹 재건기도 사건으로 계속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공개적인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국가안전기획부의 과도한 검거였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이어진 대표적 공안 사건이다.

사노맹사건으로 기소된 인원은 총 300여 명, 총 구형량은 500년으로, 해방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노해·백태웅 등은 1998년 광복절에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사노맹사건 관련자들은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 면제의 특별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조국 후보자는 사노맹 사건으로 투옥 직후 국제 앰네스티 선정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된바 있다.

또 지난 2008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했다'며 사노맹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재평가했다.

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2012년 총선에서 사노맹 중앙위원장을 역임했던 백태웅 하와이대 교수를 영입하려고 했던 자유한국당이 이제 와서 조국 후보자의 사노맹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은 자가당착에 불과할 뿐이며, 정치공세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한편 조국 후보자는, 사노맹 사건 논란 등에 대해 청문회에서 충분히 답하겠다고 밝혔다.

조 후보자는 13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꾸려진 서울 적선동 적선현대빌딩에 출근하면서 사노맹 사건 관련 질문에 할 말은 많지만 인사청문회 때 충분히 답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조국 교수는 서울법대 82학번 출신으로 1992년 [사상과 자유]라는 책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을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다. 국가 전복을 꿈꾸는 조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른바 사노맹 이게 어떤 단체?

1989년도에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에 결성이 된 사노맹

정식 명칭은 사노맹.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에요. 남로당 이후에 최대의 사회주의 전위조직이라고 일컬어 진다. 여기에 산하에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라는 조국 교수가 소속돼 있었, 조국 교수가 1993년도에 울산대에서 전임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실형선고를 받다.

그래서 6개월 선고를 받았는데 아마 5개월 정도 구속 수감이 됐던 것 

그리고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1995년도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다.

조국 교수는 서울법대 82학번 출신으로 1992년 [사상과 자유]라는 책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을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는 이듬해 울산대 교수 재직시절이던 1993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노맹은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으로 그 조직원이 3500명에 달했다. 1989년 11월 결성된 사노맹은 발족 직후부터 삐라를 뿌린 것이 단서가 되어 3년 동안 대대적인 수사발표가 2차례 이뤄졌다.

사노맹은 89년 11월 서울시 경찰이 성균관대학교의 서울민주주의학생총연맹(서민학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노맹 출범선언문을 배포하려던 학생을 적발한데서 꼬리를 잡혔다. 경찰은 서민학련과 사노맹 사이에 굳은 연대가 있다고 보고 수사를 전면 확대하여 노동문학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1990년 10월 1차 수사중간발표를 통해 사노맹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하고 총책 이정로(본명 백태웅)와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본명 박기평)를 공개 수배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들은 1989년 2월, 불법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노동자 중심 정당을 조직하기로 모의하여 같은 해 11월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

백태웅의 가명 이정로는 ‘이것이 정통정치노선이다’의 준말이고, 박기평의 가명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무력혁명의 기반을 전국에 깔기 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이들을 세포분열식으로 확대해 나가며 ‘공장의 혁명 요새화’를 꾀했다.

PD계열 조국, 1993년 사노맹사건으로 징역 1년에 집유 1년 6개월...1993년 3월 정부는 특사 및 복권

조 후보자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이념체계 중 하나였던 PD(민중민주주의)와 이어지는 NDR(민족민주혁명)계열로 알려져 있다. 백태웅, 박노해 등 NDR주축이 사노맹을 결성했으며 조 후보자는 울산대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던 1993년 사노맹 산하 사회주의과학원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풀려날 때까지 6개월여 수감생활을 했다.

황 대표가 지적한 '선고'가 바로 이것이다. 조 후보자는 1999년 3월1일 김대중정부가 사노맹 관련자 전원에게 취한 특별사면 및 복권조치로 전과가 없어졌다.

김대중정부는 사노맹 사건이 6공화국의 불순한 의도에 따른 기획된 공안사건으로 판단했지만 황 대표는 아직까지 '국보법 위반'임을 확신하고 있다.

1989년 11월 백태웅, 박노해 등이 사노맹 조직...1991년 3월 박노해, 1992년 4월 백태웅 검거로 와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 대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재 국가정보원)는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사회주의 전위조직'이라고 알렸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사노맹은 1989년 11월  박노해(본명 박기평· 위 사진)등이 주축을 이뤄 결성했다.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유명한 박노해(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필명으로 채택)와 백태웅은 1989년 2월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의기투합, 같은해 11월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 당시 백태웅은 가명 이정로(‘이것이 정통정치노선이다’의 준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사노맹은 최고지도부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조직위 ,편집위, 각 시도 지방위의 체제로 편성됐다. 조국 후보자가 연루됐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을 비롯해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학생연맹은 사노맹의 산하조직.

공안당국은 1989년 말부터 사노맹 추적에 나서 1991년 3월 박노해 중앙위원 검거에 이어 1992년 4월 백태웅 중앙위원장과 은수미(현 성남시장) 등 주요 조직원 30여명을 체포, 사실상 와해시켰다.

박노해 무기징역, 백태웅 징역 15년, 은수미 징역 6년형 등

박노해는 1991년 9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재판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91년 12월 2심에 이어 1992년 4월 대법원도 무기징역을 내렸다.

백태웅(위 사진)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15년형으로 감형됐다. 무기징역이 15년형으로 감형된 예는 극히 드물어 당시 법조계에선 사실상 법원이 '죄없음' 판단한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돌았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6년을 복역한 뒤 1997년 출소했다. 사노맹 중앙상임위원이었던 남진현은 8년간 옥살이했다.

사면 뒤 박노해 사진작가, 백태웅 교수, 은수미 정치인, 남진현은 화가...최고위직은 조국

사노맹 관계자들은 1999년 3월 사면을 받아 정치·사회 활동에 걸림돌이 없어졌다. 박노해씨는 출소후 사진작가로 변신, 2014년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백태웅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박사학위 및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지금은 하와이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도소 인권' 등 유엔을 중심으로 인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 후보자와 대학동기로 친밀한 관계인 은 시장(위 사진)은 복학, 박사학위를 딴 뒤 19대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남진현씨는 그림을 그리며 교도소 독방생활을 버틴 것을 발판삼아 그림 전시회까지 여는 등 화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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