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강 이범석 평전>(허영섭. 채륜출판사). 1983년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때 살해된 외무장관 이범석(李範錫)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2018년 8월 출간됐다. 내용도 충실하고 문장도 매끄럽다. 매우 잘 쓴 책이다. 비명에 간 이 전 장관도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흐뭇해했을 것이다.

2017년 6월 <1983 버마>(박종철출판사)를 낸 이라면, 마땅히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일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쳤다. 버마 테러 사건을 직접 다룬 것도 아니고, 이 테러로 비명에 간 이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 뭐 새로울 게 있겠나 싶었다. 또 이 책이 비매품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책 보기를 쉽게 포기했을 것이다.

늦게나마 <초강... >을 통해 이 전 장관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테러에 시시각각 다가서면서 극심한 불안과 초조,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임동명 기자 ... “이날 오전 9시 45분쯤 ...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나온 이범석 외무장관이 표정은 무척 딱딱하기만 ... ‘원로에 수고가 많겠다’는 인사말에도 ‘수고는 무슨 ...’ 이라고 간단히 받아넘기고 ... 평소 소탈하고 명랑하던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월간조선 1983년 11월호) 환송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 장관은 비를 맞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 ... 환송 행사가 끝나자 다른 수행원들과 달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특별기에 올랐다.](40쪽)
 
[이범석은 특별기에 올라 탄 뒤에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순방에 동행했던 김병연 [외무부 아주]국장의 증언 ... “그날 출국 비행기에 오른 이 장관은 비를 털면서 굉장히 기분 나빠하셨다” ... ](40쪽)

[숙소인 [버마] 인야레이크 호텔로 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에 동승한 문화방송의 문진영과 코리아헤럴드 김기석 기자와 대화를 나누며 은근히 푸념 ... “이번에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며 ... ](43쪽)

이범석이 잇몸 치통을 핑계로 하루 늦게 순방단에 합류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범석으로서는 여러 상황이 겹쳐 있었다. 북한 화물선과 관련한 숙제만 해도 골치가 아픈 터에 KAL기 피격 사건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잇몸 치통까지 겹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하루 늦게 순방단에 합류하겠다는 얘기까지 꺼내야 했을까.](43쪽)

또 그가 버마에 가게 된 것이 어떤 이들 때문이었다는 말을 듣고 이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대통령을 따라 버마로 가기 불과 여드레 전인 1983년 9월 30일 저녁, 뉴욕 유엔총회 참석 일정을 마무리한 뒤 맨해튼 식당의 회식자리에서였다.

[김경원 유엔대사와 김세진 뉴욕총영사, 박수길 공사를 비롯한 현지 공관원들과 귀국 만찬을 하면서 ... 개인적인 분노까지 드러냈다. ... “개새끼들 때문에 미얀마까지 가게 됐어.” 취중에 불쑥 내뱉은 한 마디 ... 순방 결정 과정을 포함해 미얀마 방문에 대한 그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56쪽)

이런 증언들을 통해 이 전 장관은 버마 방문을 앞두고 매우 불안해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느낀 불안과 초조는 어쩌면 당연했다. ‘전두환의 버마행’은 매우 긴 시간(최소 1년)에 걸쳐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기획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1983...> 참조하시라. 이 전 장관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을 따돌리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음모를 체감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살인자들이 살금살금 자신에게로 다가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2. 이 전 장관이 이처럼 명확하게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예감한 이유나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초강... >은 그 해(1983년) 5월 춘천 인근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문제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다거나, 그 일처리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 치통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는 ‘사사로운’ 이유에, 북한의 화물선 동건애국호가 9월 22일까지 버마 랭군(양곤)항에 머물다, 또 다른 순방국 중 하나인 스리랑카에 들렀다는 첩보를 곁들인다.

[북한 화물선 애국동건호[동건애국호]가 20일 전 쯤 이곳 양곤 항구를 거쳐 스리랑카에 기착[기항]했다가 퇴거 명령을 받았다는 얘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서울을 출발하기 이틀 전 스리랑카 대사관으로부터 긴급보고로 날아든 전문의 내용 ... 출국 직전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이에 대한 답신을 받고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동건호 승무원들이 항구에 내려 생필품을 구입한 외에는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간단한 내용 ... 그래서 더욱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 ](25-26쪽)

[KAL 007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공군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추락 ...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서간의 신경전이 고조되고 ... 이런 상황에서 스리랑카 대사관으로부터 날아든 문제의 전문 ... 북한 화물선이 [버마] 양곤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지금은 [스리랑카] 콜롬보 항구로 옮겨가 머물고 있다니 ... 내용 자체가 어두운 음모를 암시하는 듯했다. ... 이에 대해 김병연 아주국장의 보고를 받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 사이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도착한 답신은 더욱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다. ... 진상을 파악해 보라는 지시에 “문제 될 게 없다”는 투로 달랑 서너 줄짜리 답변만을 보내온 것 ... ](39쪽)

[아직 동건호의 정체가 자세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으니, 미얀마 대사관으로서는 소홀히 다룰 만도 했다. 더욱이나 바쁜 탓이었을 것이다. 동건호가 특수공작 임무를 수행토록 위장한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무역선이라는 일말의 단서만 포착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40쪽)

[스리랑카 대사관의 보고에서도 처음에는 선박의 이름조차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통곤’(Tong Gon)이라는 이름이 처음 전해진 명칭이다. 이미 보안상의 이유로 스리랑카 당국으로부터 출항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현지 언론들조차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때였다. 특별히 두드러진 단서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범석으로서는 북한 화물선이 양곤 항구에 일주일이나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문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41쪽)

위 인용문들은 버마에서의 테러는 조선(북한)의 소행이라는 통설에 근거해 이 전 장관이 ‘북한의 공작’을 사전에 감지했을 것이라는 뉘앙스다.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초강 ...> 저자의 오해 또는 곡해다. 저자가 쓴 것처럼 동건애국호가 버마와 스리랑카를 오갔다는 것은 무슨 첩보가 아니었고, 그 사실이 버마행 출발 직전에 감지된 것도 아니었다. 이 배는 9월 8일 북한의 옹진항을 - (원산항이라는 설도 있다. 이런 간단한 팩트조차 통일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다) - 출발해 9월 17일 랭군항에 들어왔다 22일 출항했기 때문이다. 또 버마 주재 한국대사관도 이 배와 관련해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다고 보고했지 않나.

이범석이 버마행을 꺼린 것은 전두환의 청와대가 - 정확히는 청와대 경호실(실장 장세동)일 것이다 - 억지로 버마 방문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수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북한의 테러’가 무서워 대통령의 해외 순방 수행을 거부하는 외무장관이 있을까? 그것도 비동맹외교 역량을 키우네 어쩌네 하는 판에. 이범석이 ‘북한의 테러’를 염려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따라나서지 않으려 했다면, 그것은 외무장관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다. 파면당할 일이다. <초강 ...>이 정황 오독했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이범석 장관이 끝까지 대통령의 순방에 따라가지 않으려 했던 것은 청와대 쪽에서 무리하게 어떤 일을 추진하고 - 꾸미고 -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콕 집어 증언한 이는 없다. 전두환 정권에 부역하며 그 시절을 화려하게 보낸 이들이 감히, ‘전두환의 청와대 지시’ 운운하거나 그들이 어떤 일을 ‘꾸몄다’고 발설할 수 있겠나?

이런 무책임한 부역자들의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듣고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3. <초강 ...>이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독후감을 쓰게 된 계기가 매우 ‘부조리’하다. 이 부조리는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과 그것을 은폐하려는 시도 사이의 치열한 투쟁에서 연유하며,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놓고 마치 이념 대결을 벌이는 듯 하는 역사적 모순을 반영한다. 어떤 유튜브 방송이 단초였다. <아웅 산 테러, 5.18 종결판이었다>(김종환 라이브 3-17/https://www.youtube.com/watch?v=NdbxQVCjwfs). 2019년 3월 16일자로 인터넷에 올라 있다.

진행자는 “버마 아웅 산 테러가 5.18의 종결자였습니다”라며 <초강... >을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했다. 감탄과 찬사를 연발하면서. 매우 놀랐다. 지금까지 아웅 산 묘소 테러가 5.18 광주학살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한 책은 졸저 <1983... >가 유일하기 - 그렇다고 믿기 -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튜브 진행자가 <1983... >을 보고 내 견해에 동조한 줄 알았다. 그 가 <초강... >을 들어 보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전까지는 ...  잠깐의 환희, 그리고 환멸!

그래도 나와 똑같은 주장을 한 이가 또 있나 하는 생각에 - 착각이었지만 - 매우 기뻤다. <초강 ...>을 주문했다. 실망스럽게도 <초강 ...>은 아웅 산 묘소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전두환식 어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또 이 책 어디에도 ‘아웅 산 테러는 5.18 종결자’라고 주장할 건더기가 없었다. 그런데 왜 유튜버 김 씨는 이 책을 선전하며 ‘아웅 산 묘소 테러는 5.18 종결자’라고 주장할까?

그의 이력을 살폈다. 김 씨는 ‘문재인은 간첩’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광화문 광장을 활보하는 이들과 같은 부류였다. ‘아웅 산 테러는 5.18 종결자’라는 그의 주장은 북한(조선)이 광주사태를 일으켜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뒤 적화통일의 기회를 만들려 했다는 지만원류의 주장과, 아웅 산 묘소에서 대통령 전두환을 살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을 시도했다는 전두환류의 주장을 이어붙인 것이었다.

정말로 이런 단순무식한 두 개의 선전선동에서 ‘아웅 산 테러는 5.18의 종결자’라는 놀라운 헤드카피(선전문구 또는 표제)를 뽑아냈을까? 그랬다면 김 씨의 놀라운 창의력을 칭찬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유 방식은 논리적 하자가 있다. 전두환 정권을 비롯해 남한 정권들이 - 및 그 추종자들이 - ‘북한의 테러’라고 규정하는 사건은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86 아시안게임 개막 6일 전 김포공항 테러(1986.9.14)가 일어났고, 이듬해 KAL 858편이 폭파 또는 실종됐다(1987.11.29). 이처럼 ‘남한 사회의 혼란 조장을 위한 북한의 테러’가 두 번 세 번 계속 일어났다면 맨 처음 것을 두고 ‘종결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웅 산 묘소 테러는 5.18 종결자’라는 테제는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반정부.반미 감정을 이북(조선)에 대한 적대감으로 치환하기 위해 미국과 전두환 정권이 아웅 산 묘소 테러를 조작했다’고 주장할 때만 나올 수 있다. <1983 ...>의 논지가 그것이다. 

유튜버 김 씨가 엉뚱한 책을 흔들면서 ‘아웅 산 묘소 테러는 5.18 종결자’라고 떠벌린 것은 <1983 ...> 테제의 역설(逆說)이다. 비슷한 주장을 펴면서 엉뚱한 결론을 유도하는 수법이다. <1983 ...>의 역사성과 그 테제를 희석하면서 ‘아웅 산 묘소 테러 = 북한의 소행’이라는 허구적 통설로 혹세무민하려는 것이다.

4. 앞에서 <초강... >을 평하며 “비명에 간 이 전 장관도 흐뭇해할 것”이라고 썼다.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그를 비명에 보낸 자들이 누구인지,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비명에 간 이들의 원혼이 편안히 잠들 수 있다.

“아웅 산 사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런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다만, 비굴한 시대를 산 자들이 여전히 몸을 사리며 풀어놓는 말을 나열하는 것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없다. 단순한 경험적 지식은 사건 또는 현상의 표피적 인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 경험에 의한 증언은 아무리 구체적일지라도 사건이나 현상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경험자가 자신이 경험한 사실과 관련된 정황 및 정세의 인과관계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어떤 사건의 표피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얽힌 다차원의 깊은 연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순 경험에 근거한 진술이나 증언 속에 감추어져 있고 또 그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연관을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웅 산 묘소 테러를 전후한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 한국과 버마의 관계, 미국과 버마의 관계를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넓고 깊게 파악해야만 사건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초강 ...>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초강 ...>이 모쪼록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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