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하 미인도)' 단체사진_박창기(나경민), 이성원(김한종), 유진모(성열석), 황재헌 연출, 조성원(정승혜), 윤예나(박희정), 김미주(김소정), 김희정(김지현) /ⓒ권애진

[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젊은 작가의 냉철한 시선과 드라마적 완성도를 높인 노련한 연출의 만남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위트 있게 보여주며 지난 시즌보다 더욱 탄탄해진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하 ‘미인도’)이 지난 3일부터 18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2017년 '아르코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초연된 바 있으며 이번 무대는 두산아트센터와 연출가 황재헌이 이끄는 '곰곰' 의 공동기획으로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1991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은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사업을 통해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최초로 공개한다. '미인도'를 담당한 신입 학예사 윤예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으로 공개 채용한 학예사로,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다른 학예관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 정권의 부정부패와 폭압에 항의하며 대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던 그 때, 천경자 화백이 '미인도'를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예상치 못한 위기에 봉착한 제2학예실은 해결책을 강구하고, 제2학예실을 이끄는 학예실장 유진모는 윤예나에게 '미인도'를 진품으로 증명할 것을 지시한다. 모든 상황과 가치관이 뒤틀리는 혼란 속에서, 윤예나는 '미인도'를 진품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미인도' 무대사진_천장의 세 면은 스크린으로 사용되어진다 /ⓒ강희주(제공=곰곰)
'미인도' 공연사진 | 이 연극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특정 인물 혹은 특정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강희주(제공=곰곰)
'미인도' 공연사진_국립현대미술관 움직이는 미술관 대표작으로 걸릴 천경화 작가의 '미인도'를 보며 이야기 중인 박창기(나경민)와 윤예나(박희정) /ⓒ강희주(제공=곰곰)
'미인도' 공연사진_어색한 분위기 속 제2학예실 직원들_이성원(김한종), 윤예나(박희정), 유진모(성열석), 김미주(김소정), 조성원(정승혜) /ⓒ강희주(제공=곰곰)
'미인도' 공연사진_미인도의 진위여부를 조사중인 미술관 직원들_유진모(성열석), 윤예나(박희정), 이성원(김한종), 김미주(김소정), 조성원(정승혜) /ⓒ강희주(제공=곰곰)

작품의 희곡을 쓴 강훈구 작가는 2017년 창작산실에 이어 2018년 '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열전 연극 분야'에 선정된 젊은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마지막 황군(2017)>, <소년소녀진화론(2018)>, <폰팔이(2019)> 등의 독특한 철학이 담겨진 작품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해 1991년에 일어난 사건들이 궁금하던 중 두 사건을 모티브로 써내려갔던 작품 <미인도>를 통해 미술계와 정치계에서 벌어진 두 가지 진위 논란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구현해내며 젊은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황재헌 연출은 <피리부는 사나이(2012)>, <리타(2014)>, <그와 그녀의 목요일(2018)> 등 연극, 뮤지컬을 넘나들며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보여주었던 만큼, 이번 작품에도 특유의 드라마를 입혀 지난 시즌과는 또 다른 <미인도>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미인도' 출연진 컨셉사진_이성원(김한종), 조성원(정승혜), 김미주(김소정), 윤예나(박희정), 박창기(나경민), 김희정(김지현), 유진모(성열석) /ⓒ권애진

무대와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성열석, 나경민, 김한종, 김소정, 박희정, 김지현, 정승혜가 진지한 내용의 작품에 절묘한 호흡을 맞추며 적재적소의 위트와 연기로 작품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곰곰’은 각자의 영역에서 알아서 잘 활동하고 있지만, 개인의 역량이 모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고, 그 친구들과 함께 역사 속에 처한 한 개인, 그리고 다양한 인식들을 보여주는 균형 잡힌 작품을 하고 싶다는 ‘곰곰’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모아진다.

- MINI INTERVIEW -

1. 지난 시즌보다 빨라진 듯 한 템포와 3면에서 영상을 보여주는 기법 등 훨씬 작품이 탄탄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황재헌 연출님은 지난 시즌 공연과 어떤 차이점을 생기게 해야 하거나 색을 잡는 과정에서 치열한 고민을 하신 흔적들이 느껴집니다. 각색과 연출 그리고 캐스팅과정에서의 고민들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연극은 사람이 만나는 예술이기에, 배우가 인물을, 인물이 관객을, 관객이 작가를,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양 한다고 이야기하는 '미인도'를 각색/연출한 황재헌 연출가 /ⓒ권애진

A. 각색/연출 황재헌

초연 공연과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 주인공 '윤예나'를 기소하는 검찰의 공소장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쉽게 말해, ‘미인도’를 진작으로 만든 것에 대한 근엄한 질타처럼 느껴졌다는 얘기죠.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윤예나”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 보였고, 그 이유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보편타당’한 개인이 ‘특수’한 상황에 떨어졌을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부분을 관객들에게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윤예나'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즉, '윤예나'를 기소하는 검찰이 아니라, 변호하는 변호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 점이 지난 공연과 이번 공연의 가장 다른 점이고, 각색 과정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고자 했습니다.

'윤예나'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그 녀의 행동에 근거들을 찾아내어 무대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방식은 보다 감각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야했으며, 동시에 현재의 '윤예나'가 선택하는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봤습니다. 지나친 설명이나 부연은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네마 형식의 영상과 색감, 영화적 장면 전환 및 무용적 움직임 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윤예나'에 대한 변호력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연극 자체의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미인도' 공연사진_윤예나 역 박희정 배우 /ⓒ강희주(제공=곰곰)

'윤예나' 역할 캐스팅 과정도 일반 공연과 달리, 긴 시간의 개별 오디션을 거쳤습니다. 저는 배우가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연출로서 도움을 주는 것에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윤예나'의 행동에 기저가 되는 감정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감정을 수치심, 부끄러움, 나아가서 르상티망 정도로 해석했습니다. 수치심이란 워낙 교활한 감정이라, 때로는 숨어버리다가도 전혀 알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나고 폭발하고 맙니다. 이런 감정을 단순히 연기 디렉팅만으로 배우에게 전달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디션 과정을 통해, 이 정도 깊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배우를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 강훈구 작가님은 '죽은 시인의 사회'와 이번 작품을 비롯해 '소년소녀진화론','폰팔이'등 독특한 시선과 대사들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습니다. 2017년 초연 이후 다시 만난 이번 작품의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특별히 요청하거나 바랐던 점이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관객과의 대화 중에 대답을 하고 있는 '미인도'의 희곡을 집필한 강훈구 작가 /ⓒ권애진

A.작가 강훈구

아무래도 초연을 한 2017년은 촛불시위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던 만큼 지난 세월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 했습니다. 재연을 준비하며 우리는 초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관객들과 함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미인도'...>가 1991년을 마주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라면, 새로운 작업에서는 2019년을 마주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격동의 2010년대를 살과 사랑, 그 속에 담긴 절망과 애환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각색 과정에서 유진모 학예실장에 대한 부분에서 변화가 많았습니다. 예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자, 그 사람 개인사를 보면 되게 불쌍한 사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서 다른 일을 선택해야만 했던 인물입니다. 유진모라는 인물은 우리 모두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인지부조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사실 감기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3.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정모씨(62)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고 지난달 18일 최종기각 처리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준비한 모든 배역 배우님들께 법원의 최종기각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듣고 싶습니다.

'미인도' 박창기 역 나경민 배우 /ⓒ권애진

A. 배우 나경민

지난 날 잘못된 일을 오늘에서야 인정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정과 반성을 통해서 다시 거듭나는 일이지요. 인정할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곳’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곳’일겁니다. 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에’ 살고 싶습니다.

'미인도' 김미주 역 김소정 배우 /ⓒ권애진

A. 배우 김소정

지금은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 모두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미인도' 윤예나 역 박희정 배우 /ⓒ권애진

A. 배우 박희정

공연을 준비하면서 관련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관적 견해를 밝힌 것이라서,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그 ‘주관적 견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같은 연극인의 주관적 견해. 이런 작은 주관적 견해가 가지는 힘이란 것은 장담컨대,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란 직함이 가지는 주관적 견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국가가 설립한 기관으로부터 운영권한을 위임받았으며 그렇기에 한국 미술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학예실장이란 권력의 주관적 견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견해를 짓눌러버릴 수 있고 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할 것입니다. 저의 연기는 그에 비하면 작고 약해보일지 모르지만 영혼을 담은 주관적 견해입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에 닿을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미인도' 김희정 역 김지현 배우 /ⓒ권애진
'미인도' 이성원 역 김한종 배우 /ⓒ권애진
'미인도' 조성원 역 정승혜 배우 /ⓒ권애진
'미인도' 유진모 역 성열석 배우 /ⓒ권애진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_포스터 /(제공=곰곰)

“우리 모두는 예술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예술은 진실을 일깨우는 거짓이다.(We all know that art is not truth. Art is a lie makes us realize the truth.)”라는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는 마주한 작품이 실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통해 진실을 느낀다......세잔의 말처럼, 예술은 정서로 시작해야 한다. 반성과 해석은 이 정서의 종착지이자 또 다른 정서의 시작이기도 하다."

- 조경진 저 『예술은 어떻게 거짓이자 진실인가?』 -

정치든 경제든 우리 삶 속에서 ‘이해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말하는 강훈구 작가의 말도, ‘연극을 통해 현실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약보다 잘 듣는 치료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작품을 통해 크고 작은 열병을 겪었다는 황재헌 연출의 말도 진실일 것이다.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감동 또는 어떤 의지가 생기거나 하는 것들도 모두가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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