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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아트센터 동숭소극장에서 극단 청맥의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 1933~) 원작, 양영일 번역, 윤우영 연출의 <코펜하겐(Copenhagen)>을 관람했다.

마이클 프레인은1933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킹스톤 그래머 스쿨을 다녔고, 캠브리지 엠마뉴엘 컬리지를 1957년에 졸업하였다. The Guardian 신문과 The Observer 신문에 칼럼을 썼으며, 연극과 소설을 집필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Noise Off>, <Chopenhagen>, Democracy> 가 있으며, 소설로는 <Towards the End of the Morning>, <Headlong>, <Spies>가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유머러스한 언어를 많이 스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단편 작품들로 <The Two of Us and Alarms and Excursions>, 철학적인 코미디극<Alphabetical Order>, <Benefactors>, <Clouds>, <Make and Break and Here>, <Donkeys Years>, <Balmoral>, <Noises Off>, <Hot Seat> 등을 섰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로는 <Headlong>, <The Tin Men, 서메셋마우함어워드 수상>, <The Russian Interpreter>, <Towards the End of the Morning>, <Sweet Dreams>, A Landing on the Sun>, A very Private Life>, <Now You Know>, <Spies, 위트 프리즈상 수상-2002> 등의 작품이 있다. 존 클리스 주연의 영화 <Clockwise>의 대본을 썼고, 엘리너 브론 주연의 TV 시리즈 <Making Faces>의 대본도 썼다. 프라이언은 <The Seagull>, <Uncle Vanya>, <Three Sisters>, <The Cherry Orchard>의 연극 작품 작업중이며, <Wild Honey>과 <The Sneeze>도 작업중이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0년부터 4년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며, 1923년에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24년에 괴팅겐에서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20세기 초 양자역학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중요한 업적으로는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또, 양자역학의 기술 방법인 '행렬역학'을 고안해 냈는데 이 업적으로 겨우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나중에 폴 디랙에 의해 행렬역학은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진다. 똑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 셈. 간단히 비유하자면 똑같은 과일을 놓고 한국에서는 사과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애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그 외에도 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이론도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고, 다체문제나 강자성 연구 등을 발표했다.

조머펠트(Arnold Johannes Wilhelm Sommerfeld, 1868-1951)는 하이젠베르크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재능을 일찍 눈치 채고 신입생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으며, 보어나 아인슈타인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조머펠트에게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배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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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머펠트의 도움으로 보어의 세미나에 참여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보어는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보어는 세미나가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하이젠베르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고, 나중에 자기와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입학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대학생이었는데,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대학자 보어의 눈에 든 것이다. 한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은 그 후 몇 년 뒤에 이루어졌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때의 토론에서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그 토론 내용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 자세히 나온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때때로 하이젠베르크를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소개하는 인명사전도 있을 정도. '물리학과 철학'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자서전격인 '부분과 전체'에서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되는 온갖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주제가 다루어진다. 그의 손자인 베냐민 하이젠베르크는 영화감독을 하고 있다.종전 뒤 나치 협조 관련에선 무죄로 처리되어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에서 소장으로 일했으며 늘그막은 평온했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덴마크 출신의 물리학자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물리학자로 평가된다.수소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면서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가설(보어 모델)을 내놓아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론을 도입했기 때문에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들 오게 보어도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평생 보어 연구소에서 소장 자리를 맡았다.

그가 원자의 구조 외에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모든 국가에게 개방정책 및 공동 관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원자력의 폐쇄적 이용에 따른 핵무기 무한 경쟁시대를 우려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인들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예견대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는 유대계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게 점령당한 덴마크에서 곧 수용소로 잡혀갈 입장이었다. 가까스로 스웨덴으로 빠져나간 다음 영국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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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만난 사건은 과학사가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만남에서 오간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고, 보어는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다, 독일의 핵무기 개발능력이 없으니 연합국의 개발도 취소해 달라는 등의 다양한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연극 <코펜하겐>은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교수의 만남을 극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어두컴컴한 무대, 흑색배경과 의자 세 개가 전부이고, 영상투사로 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조명 변화와 부분 조명, 대단원에서 2차 대전 종식 일본 원폭투하 장면은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관람한 연극 <코펜하겐> 공연 후기를 소개한다.

캐나다 토론토에 들렀다가 연극 '코펜하겐(Copenhagen)'을 보았다. 영국의 작가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의 작품인 코펜하겐은 1998년 런던에서 초연한 이래 유럽의 각국에서 공연됐으며, 2000년에는 뉴욕에서 대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의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았다.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양자 물리학의 '메카'였다. 1920년대에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천재적인 젊은이들은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에서 양자 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만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었다.

시간이 흘러 41년이 되면 하이젠베르크는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핵분열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책임자가 된 반면, 보어는 점령국의 반(半)유대인으로 힘들게 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으로 옛 스승이자 친구인 보어를 찾아간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눈 대화는 보어를 무섭게 격앙시켰다. 연극 코펜하겐은 보어의 부인 마그레테의 독백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41년 9월에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찾아 코펜하겐에 왔는가?" 이 질문은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 반복된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옛 스승인 보어에게 "과학자가 핵분열의 결과에 대해 연구를 계속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가"를 물었을 뿐인데, 이를 오해한 보어가 벌컥 화를 내고 대화를 중단했다고 술회했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의문은 남는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런 얘기를 던진 의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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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가 미국과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던 보어로부터 미국의 원자탄 기밀을 캐내려 한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해석도 있으며, 정반대로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원자탄 개발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넌지시 알려주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설득해 독일과 미국 모두의 원자탄 계획을 지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41~44년에 하이젠베르크가 독일 점령지역을 여덟 차례나 방문, 독일이 승리해야 하는 필연성을 선전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해 41년 코펜하겐 방문의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연극 코펜하겐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연극의 묘미는 "왜 41년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으로 보어를 방문했는가?"라는 문제를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하이젠베르크의 동기와 행동에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발견한 원자 세계에서의 불확실성과 인간 삶에서의 불확실성의 기묘한 대비는 연극 전체를 관통한다. 작가 프레인은 "삶은 항상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묘하다"고 말하는데, 41년 9월의 코펜하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행동과 동기의 다층성.미확정성.비예측성이 관객을 연극에 몰입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코펜하겐은 단순한 '과학 연극'은 아니다. 과학자. 과학이론. 과학사의 사건이 연극의 소재로 쓰이지만, 연극의 핵심적인 모티브는 사람의 행동이 유발하는 수많은 해석, 이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가능성,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이 결국 하나의 현재와 과거로 귀결되는 인간사, 그리고 그렇게 닫혀버린 과거를 다시 열 때 갑자기 부닥치는 해석의 유연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연쇄반응, 상보성 이론, 불확정성 이론은 물론 독일 원자탄 개발에 대한 약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작가의 역량도 관객의 감상의 깊이도 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잡종적'인 소양에 달려 있는 것이다. (2004년 2월 19일)

극단 청맥에서는 2008년, 2009년, 2010년에 연극 <코펜하겐> 공연으로 호평을 받고 각종 상을 수상했다.

남명렬이 보어, 서상원이 하이젠베르크, 이영숙이 보어 부인 마그리트로 출연해 탁월한 기량과 성격창출로 호연을 펼친다. 독일어로는 하이젠베르크로 발음한다.

기술감독 김진홍, 무대디자인 최영로, 조명디자인 하종기, 영상디자인 김장연, 의상디자인 최영로, 음악 서상완, 분장 최정아 조미영, 무대제작 이영상(스테이지2040), 조연출 이지은, 조명보 장재익 신유진, 일렉트리션 김보미 이지은, 음향보 김성길, 영상보 김민조, 기획 최예지, 진행 백유진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노력과 기량이 일치해, 극단 청맥의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 1933~) 원작, 양영일 번역, 윤우영 연출의 <코펜하겐(Copenhagen)>을 기억에 길이 남을 명작연극으로 창출시켰다./박정기 문화공연칼럼니스트

온라인 뉴스팀, newsfreezon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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