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열단 정만진 작가, 대구 지오그라피 박진관 작가 토크콘서트로 대구시민에게 대구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을 대담하다

맨 뒷쪽 좌로부터 대구역사탐방단 차우미 대표, 박진관 작가, 이헌태 위원장, 정만진 작가 대담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대구역사탐방단(대표 차우미) 주최 및 구구단(대표 이원호) 협력으로 21일 달서구 본리동 담장 허무는 엄마들(대표 전정순) 공동공간 ‘우분투 카페’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탐방’ 대구 의병과 자주독립운동사를 대담하는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다음은 기미년 3.1자주독립운동 100주년, 미완의 해방 광복절 74주년을 맞아 구한말 의병투쟁부터 일제식민지 치하 자주독립운동까지 자주 민족 민중 평화의 맥을 이어갔던 대구경북의 항일독립투쟁사를 정만진 작가와 박진관 작가의 대담했던 요약이다.

첫 째 대구 의병의 시초를 돌아보면 의병義兵은 민병民兵으로 관병官兵, 즉 왕병王兵에 대하는 사병私兵과 다르다. 사병은 평시에도 있었지만 의병은 전쟁이나 반란 때만 존립했다. 관병이 제 구실을 하는 경우에는 의병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병의 역할이 컸을수록 국가의 가능은 그만큼 마비된 상태였다.

대구의 의병과 독립운동 그리고 일제잔재를 강연하는 정만진 작가

우리나라의 대표 의병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민병民兵들이다. 창의는 옳음義을 외쳤다倡는 뜻이다. 이때 옳다는 것은 지금의 임금이 계속 임금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1592년 조선에 쳐들어 올 때 일본 집권 세력은 한반도에 의병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던 4대 패전 원인 중 한 가지였다.

일본 열도에서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동장군冬將軍의 치사율,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엄청난 전투력을 갖춘 이순신 등 조선 수군의 위력, 명군의 지원, 그리고 100년에 이르는 통일 전쟁 동안 일본에는 한 번도 의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에는 그것이 무수히 일어나 후방을 교란하고 무기류와 군량미의 보급을 차단한 일, 그것이 바로 일본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4대 요인이다.

대구는 의병이 늦게 일어났다. 인근의 경산만 해도 5월 7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대구는 그보다 두 달 지난 7월 6일에야 창의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팔조령을 넘어 와 4월 22일 대구성을 함락한 일본군이 1,000명 정도의 주둔군을 남겨두고 북상했기 때문이다.

대구 부민들은 늦게 일으킨 의병을 지휘할 의병소義兵所를 부인사에 둔 채, 동화사에 머무르고 있는 대구부사 윤현의 관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이 점이 임진왜란 대구 의병의 첫 번째 특징이다. 전국적으로 다른 지역에는 관군과 의병의 마찰이 극심했지만 대구는 그런 다툼이 없었다.

소설의열단] 정만진 작가

두 번째 특징은 대구의 의병과 관군이 왜적을 잘 막아내어 1592년에는 팔공산으로 피란 온 대구부민들이 모두 무사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의병장들이 각개로 움직이지 않고 모두가 하나의 부대 공산의진公山義陣을 조직하여 일사분란하게 왜적과 전투에 임했다는 점이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달성 현풍사람 문석봉이 전국적으로 첫 의병을 일으켰다. 공주성 장수로 있던 문석봉은 패전으로 투옥되고, 탈옥 이후 재기를 모색하지만 끝내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파급 영향은 대단했다.

그 이후 구한말 의병전쟁 시기, 대구 사람들은 영천 보현산 일대를 본거지로 활동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의병으로 가담했다. 당시 전국 주요 의병부대의 하나였던 산남의진은 정용기, 정환직 자부子父가 대를 이어 의병장을 맡아 순국한 의병진으로,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활약했다.

산남의진의 선봉장으로 왜적과 싸웠던 대구 성서 사람(경남 창녕 출생) 우재룡은 뒷날 광복회 결성의 주역이 된다. 아직까지는 의병이다. 나라가 망해야 비로소 독립군이 된다. 1940년 9월 17일부터 광복군도 생겨난다. 광복군은 독립군의 일부이다.

1907년 2월 21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정신적 의병 운동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짊어진 나라빚 1,300만 원(당시 조선정부의 1년 예산 버금, 현재 예산 비견 300조)을 국민들이 갚자고 나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모금운동이다. 민중들은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범국민적으로 이 운동에 동참했다.

고종도 담배를 끊었고, 부인들은 앞다퉈 반지와 비녀를 뽑아 의연했다. 하지만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끝내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일제는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한매일신보 양기택을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고, 양기택은 약 두 달 뒤 무죄로 풀려나지만 모금운동 활기는 이미 꺾이고 말았다.

당시의 유명한 일화를 한 가지만 소개하면, 기생 앵무가 모금운동 사무소에 와서 100원(현 시세 1,000만원)을 의연하면서 “만약 남자 중에 수천 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으면 나도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서 내겠습니다.”라고 호언했다.

역사서를 독서하는 추연창 자문위원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둘째 광복회 ‧ 의열단과 대구의 관계를 밝히면 초기 독립군에는 공화정의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려는 세력과 조선임금을 다시 왕좌에 앉히려는 복벽復辟주의자가 혼재했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명문가 출신으로서 외형상으로는 복벽주의자로 보이고 속마음은 공화정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초기 독립운동 세력을 이끌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독립전쟁론자였다. 그의 이론은 의병 출신의 우재룡을 광복회 건설에 투신하라고 설득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광복회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됐다. 앞산 안일사(안일암)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에 무장투쟁주의 생각을 갖고 있던 박상진, 영주 풍기에서 이미 결성되어 활동 중이던 광복단의 채기중, 의병 출신의 우재룡이 창단 중심 인물이다.

망국의 정신적 충격과 일제의 무단 통치에 짓눌려 아무도 무장 투쟁을 펼치지 못하던 1910년대에 광복회는 전국 각도와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하여 과감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일찍이 만주 지부장 김좌진에게 34억 원(당시 시세 7만 원)을 우재룡이 직접 전달하는 등 국내에서 거둔 군자금을 만주에서 왜적과 싸우는 독립지사들에게 지원했다.

경상도 제일의 친일부호 장승원을 처단하는 등 반역자들을 응징했다. 일제의 군사 시설, 중석광, 세금 수송 마차 등을 공격하기도 했다. 제6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단체는 광복회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918년까지 맹활약한 광복회는 이듬해 만세운동과 의열단 창단의 노둣돌이었다. 광복회의 활동은 의병의 후신이자 의열단의 전신으로서(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리 겨레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광복회가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해체되던 1919년 2월 즈음 만주로 탈출한 황상규, 김대지 등은 의열단 창단을 주도했다. 1919년 5, 6월 창단이 결의되었고, 11월 9-10일 창단대회를 가졌다.

의열단 창단의 초기 자금은 대구은행 주임 이종암이 부담했다. 이종암은 은행돈 10억 원(당시 1만500원)을 빼돌려 길림으로 가서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소유의 화성여관을 500원가량 주고 전세 얻었다.

3,000원은 김원봉에게 주어 의열단 창단 자금으로 쓰게 하고, 7,000원은 천도교에서 함께 활동했던 구영필에게 주어 의열단 자금 조달을 위해 사업을 하도록 했다. 이종암의 거처인 화성여관은 의열단 창단을 위한 회의 장소 겸 폭탄제조 훈련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원봉 등의 거처이기도 했다.

대구 지오그라피 박진관 작가와 대함하는 북구 갑 지역위원회 이헌태 위원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국사편찬위원회의『한민족 독립운동사』는 ‘이종암과 김원봉은 동거를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의열단의 창립 장소를 흔히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의열단 창립지는 길림성 파호문 밖 ‘이종암의 집’이다.

이종암이 그렇게 한 데에는 구영필의 소개로 김대지를 만나고, 이어 황상규를 만난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구영필, 황상규, 김대지 셋은 모두 밀양 사람으로, 황상규와 김대지는 밀양 동화중학에서 김원봉, 윤세주, 최상봉 등을 가르쳤고, 황상규는 김원봉의 고모부이기도 했다.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군사 투쟁과 의열 투쟁의 두 갈래 방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 황상규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던 김대지와 장건상 등은 김원봉, 이종암, 서상락 등에게 의열 단체 결성을 주문했다.

10여 명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고, 김원봉과 이종암 둘은 함께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산하 구국모험단에서 3개월 동안 합숙훈련을 하며 폭탄 제조 및 사용법을 익혔다.

창단 당시 단원은 10명이었는데, 밀양 4인, 대구 3인(이종암, 서상락, 고령 신철휴), 기타 3인(충청 곽재기, 함경 강세우 이성우)이었다. 김대지는 이종암이 순국하자 ‘의열단이 끝났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구사람들은 지금도 이종암 이름도 모르고, 그가 독립운동 자금을 가져간 대구은행 자리에 건물이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 아무 표식도 없고, 그가 죽은 집도 방치된 채 인근의 남산동 이육사 고택처럼 머지않아 파괴될 형편이다.

이육사는 대구에서 주소를 17년 두었고 실제 생활도 10년 이상했던 제2의 대구고향 ‘대구 사람’ 이육사는 의열단원이다. 그는 대구에서 교남보통학교를 다녔고 약령시장 한약점원으로 일하며 석재 서병호 선생께 시詩 서書 화畵를 배웠다. 독립운동가 윤세주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김원봉이 설립한 군사정치학교를 윤세주와 더불어 1기로 졸업했던 독립투사이다. 일제식민지 형무소 17번 입출소 및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개혁적 사색의 은유적 문학으로 시창작 작품을 발표했다.

대구 지오그라피 박진관 작가 / 사진 = 문해청 기자

셋째 대구 학생독립운동과 대구형무소에 대하여 살펴보면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과 「청포도」이육사 사이에 공통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인’이다라고 할 것이다. 두 시인은 독립운동하다가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공통점도 있다. 다행히 두 분은 살아서 대구형무소를 벗어났다.

그러나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부산 경찰서 일본인 서장을 폭사시킨 의열단 박재혁 의사,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투탄 의거의 장진홍 의사 등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구는 역사 유적과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일에 무관심한 도시이다. 대구형무소 역시 남아 있지 않다. 대구형무소 사형장 자리에 세워진 삼덕교회 기념관 1층에 가면 형무소 배치도와 이육사 부조를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전부다.

대구감옥서는 본래 경상감영 안에 있었는데 1908년 7월 중부경찰서 옆에 다시 개청하면서 대구감옥이 되었다. 1910년 삼덕동으로 왔고, 1923년부터 대구형무소가 되었다. 대구교도소로 개칭된 것은 1961년이고, 화원으로는 1971년에 갔다.

1930년 6월 5일 장진홍 의사가 대구형무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 사실을 안 수감 학생들이 형무소 감방 벽을 때려 부수면서 “장진홍 의사를 살려내어라!” 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일제는 학생들에게 ‘건조물 파괴죄’를 추가하여 수형 기간을 8개월씩 추가했다. 1928년 11월 당시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으로 일제는 대구 시내 남자 중학생 105명을 구속했다.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이름을 얻은 데에는 학생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큰 몫을 했다. 다른 지역의 학생 항일 운동은 대체로 기간이 짧았지만 대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치열했다. 1929년에 개교한 대구사범학교는 1기생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해서 1941년에 한꺼번에 300명 넘는 구속자를 낳을 때까지 쉬지 않고 투쟁했다.

현준혁과 김영기 등이 대표적인 지도교사였고, 대표적인 조직은 다혁당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찬웅(1943년 6월 21일 옥사), 박제민(1943년 옥사), 강두안(1944년 옥사), 장세파(1945년 옥사), 서진구(1944년 옥사) 등 5명이 순국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맹휴학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 계성학교의 혜성단 등의 항일 투쟁도 유명했다. 1919년의 만세운동은 계성학교 학생들이 주도했고, 신명여학교와 대구고보 등이 크게 동참했다. 하지만 당시 만세운동 준비물을 제작한 계성학교 아담스관, 그 앞의 기념탑, 신명여학교 교문 안 기념탑이 있을 뿐 당시 현장 청운맨션 안과 대구상업학교 건물 앞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구관 1층에는 박정희 상이 벽에 붙어 있는데, ‘가난한 농민의 아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으로 ‘1937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모교를 위하여 이 교사校舍를 세우다’라고 명기되어 있고 ‘조국의 미래’ 비석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구 지오그라피] 박관진 작가

넷째 대구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는 ‘대구 일제 잔재’ 인터넷을 검색하면 ‘대구에서 반드시 없애야 할 일제 잔재’ 가 무수하게 나온다.

다섯째 대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유적으로 1890년대 문석봉, 1900년대 김광제 서상돈, 1910년대 우재룡, 김진만 가족, 1920년대 이종암, 1930년대 현계옥, 장진홍, 1940년대 이육사, 이현수 가족, 이상정 이상화 가족 / 빼앗긴 들, 달성, 대구형무소 터, 이종암 이육사 고택터, 이현수 집, 계성학교 아담스관, 신암선열공원, 조양회관, 장진홍 의거 터, 1919년 만세운동 90계단 등이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구한말 의병투쟁부터 일제식민지 치하 자주독립운동까지 자주 민족 민중 평화의 맥을 이어갔던 대구경북의 항일독립투쟁이 중국으로 가서 항일투사를 했던 과정에 대한 박진관 작가의 대담했던 요약이다.

먼저 경숙국치(8. 29) 이후 만주로 갔던 대구경북의 혁신유림은 구한말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던 대구경북 민족지자자이다. 특히 서간도로 정치적 집단망명을 결행했다. 이들이 백두산 기점 북쪽 북간도로 가지 않은 것은 이미 함경도 이주민이 그곳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서간도는 현재 중국 동북3성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량오닝성과 헤이룽장성의 중간지대인 지린성 유하 지린 창춘을 중심으로 하얼빈, 상지, 오상 등 헤이룽장성 일대 심지어 내 몽골자치구가 있는 북쪽으로 갔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경상도 이주민 후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서간도로 집단 망명을 이끈 인물은 주로 안동지역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안동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도곡마을 고성이씨 일가,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을 중심으로 천전리(내앞마을) 의성김씨 일가, 퇴계 이황의 후손인 도산 하계마을 진성이씨 일가, 무실, 박실, 삼산마을의 전주류씨 동산 류인식 일가, 황호를 원로로 하는 평해 사동마을 평해황씨 일가, 안동권씨 집성촌 남후면 추산 권기일 일가 등이다.

대구 지오그라피 책을 선물하며 서명하는 박진관 작가 / 사진 = 문해청 기자

석주 이상룡과 겹사돈을 맺은 선산의 왕산 허위 일가도 1912년, 1915년 집단망명해 이들과 합류한다. 이들은 대대손손 물려받은 전답과 고택을 처분하고 만주로 풍찬노숙의 길을 걸어 갔다.

1910년 12월 24일(음력) 의성김씨 일가를 필두로 이들 가족은 줄줄이 독립전쟁을 위해 조국을 떠났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린성 화전 횡로촌을 거쳐 통화현 삼원포에 도착, 1911년 4월 경학사(만주지역 최초 독립운동단체. 이후 부민단으로 계승 후 초대단장 왕산 허위 형 허겸이 맡았음)와 그해 6월 10일 신흥강습소(초대교장 김형식, 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1912년 7월 20일 신흥강습소는 삼원포 합니하로 옮겼다.

여준과 이상룡이 신흥학교는 교명을 바꿔 운영했다. 교관과 학생 중엔 대구경북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신흥학교는 수많은 독립군 요인과 지도자를 배출했다. 지청천, 신팔균, 김광서는 일본육사를 졸업했지만 탈출해서 이 학교 교관으로 활약했다. 신흥학교는 광복군의 전신르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생도는 3천 5백명이었다.

서로군정서와 만주에서 활동한 대구경북 민중은 3. 1독립운동 후 국내에서 망명객이 만주로 이주하면서 서간도의 한인 인구는 25만 명에 달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될 쯤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이 넘쳐났다. 이에 본부를 옮겨 분교를 두고 일종의 군사정부를 설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선 여운형을 만주로 보내 군정부와 통합을 시도했다. 이에 군정부는 1919년 11월 17일 임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군정부 대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개명했다. 이 당시 북로군정서도 탄생했다. 서로군정서에 참여한 경북 안동 사람은 최고 책임자 독판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략, 김응섭(법무), 김동삼(참모), 김형식(김대략의 차남, 학무), 김동만, 김규식, 김원식, 김만식, 류림, 류기동, 김창로 등이고 대구 사람은 양규열(군무), 최윤동(군무) 등이 활약했다.

경북 고령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문상직은 1920년 5월 학교 출신 서영균(대구), 송정득(달성), 김사용(상주), 등과 관공서 폭파계획을 하다 발각 되어 미수로 끝난 일명 ‘암살 음모단 사건’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대구 사람은 배천택, 서상락, 이종암, 최윤동 등이 있었고 경북 안동 사람은 이봉희(신흥무관학교 교장 역임, 석주 이상룡 동생), 김규식, 김성로(김규식 아들), 김성로, 이광민(석주 조카), 이덕숙, 이목호, 김사순, 권중봉, 권준(상주), 신철류(고령) 등이 있다.

이 밖에 만주에서 활동한 대구 사람은 이덕생(서로군정서, 의열단), 현정건(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의열단), 이일심(재민농민동맹), 송두환(의열단) 등이다. 그리고 최원택, 최춘택 형제, 최중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했다.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고경하 시인께 대구 지오그라피 책을 선물하는 박진관 작가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경북 사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북경)에서도 참여했고 이상룡, 김동삼, 김용섭, 안상길, 류림(안동), 김창숙(성주), 김정목(선산), 남형우, 김상덕(고령), 한지성(성주), 장건상(구미), 손진형(윤자영(청송), 백남규, 현정건, 이강희, 배천택, 이상정, 신공제, 이정호(대구) 등이다. 이 가운데 김동삼, 남형우는 29명이 참여한 첫 임시의정원 멤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을 기초할 때 함께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억울한 옥살이한 대구 사람은 달성군 본리동 남평문씨 세거지 문영박이 있고 동구 둔산동 옻골 경주최씨 최종응을 비롯해 송두환, 정동석 등이 있다. 소설가 현진건의 형 읍민 현정건은 연인 현계옥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화요보’ 주필로 독립운동에 힘썼고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를 역임했다.

대구 사람 이상정은 현정건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저항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1925년 중국 망명 후 허베이성 장가구에서 만주군벌 풍옥상 부대에서 항일전쟁을 했다. 이때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독립운동가와 결혼했다. 그는 30년대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로학교(소장) 교수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대구경북 사람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전쟁에 참전을 했고 의열단 무장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난 영화 ‘암살’ ‘밀정’ 으로 의열단이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MBC방송도 가세했다.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은 비운의 항일 독립운동가로 일제식민지 시기 임시정부 주석 김구 보다 수배 중 현상금이 높았다. 이 시기 제2의 고향 대구 남산동 고택에서 중국의 임시정부를 오가며 신흥무관학교 2기생 모집했던 의열단 핵심 단원 이육사는 민족시인이기 앞서 탁월한 독립투사였다.

그 당시 중국땅에서 불령운동에 관해서는 ‘경상도파’라 하여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고 여러 차례 암살과 파괴의 흉포 행위를 자행한 의열단 단원에서 본도(경상북도 지칭) 출신의 간부가 많았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 파호문 밖 반모(중국인)씨가 살지 않고 임대했던 대구 사람 이종암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모여서 결성했다. 이때 윤세주, 한봉근, 김상윤(밀양), 이종암, 서상락(대구), 신철휴(고령), 곽재기(충북), 강세우(함남), 이성우(서울) 10명이 모여 반빈족부일배 처단, 반민중수탈기관 척결을 목표로 ‘7가살 5파괴’를 모토로 창립했다.

이때 고문은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와 김대지였고 조선혁명선언을 쓴 단재 신채호 아나키스트 이회영,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성주) 등 베이징 3걸은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의열단창립멤버는 한봉인, 윤소룡, 배중세를 넣어 13명설. 권준(상주),이수택(칠곡), 등을 포함한 17명설이 있다.

의열단의 출신지역으로 배천택, 이덕생, 이상도, 이영록, 현정건, 현계옥, 서동일, 이현준, 이경희, 이기양, 이상정, 이상화, 이육사(대구), 김정현, 김시현, 김지섭, 김재봉, 김만수, 권정필(안동), 장진홍(칠곡), 류우국, 김재수(상주), 최재화(선산), 윤자영(청송), 이원재(영천), 김상덕(고령), 한지성(성주), 등이 참여했고 거쳤다.

대구역사탐방단 역사대담을 마치고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 시기 일제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의열단 단원은 1923년 11월 30일 70여명, 이듬해 1월 200여명이었다. 그러나 1923년 일제 조선군사령부는 150명으로 파악했다. 이들 중에 대구 출신 서상락은 4형제(상규, 상락, 상일, 상한) 독립운동가 중 둘째이다.

그는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출신으로 밀양경찰서 폭파를 계획하고 중국과 독일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확보하려다가 30세에 사망했다. 동생 동암 서상일(제헌의원)과 일본 도쿄 사이토 조선총독 폭탄 투척했던 동생 서상한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1896-1930)은 약산 김원봉과 함께 핵심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대구공립보통학교(대구초등)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 부산상고를 가난으로 중퇴했다.

이 밖에 동북항일연군에 활약한 대구경북 사람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역의 인물은 허형식, 류만희, 김영로, 배성준, 배성준, 강신태 등이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교도려가 편성되기 2일 전(1942년 8월 1일) 헤이롱장성 경안현에서 33세 일기로 전사했다.

이날 대구경북 자주독립운동사 대담을 진행했던 이헌태 위원장(더불어민주당대구 북구 갑 지역위원회)은 최근 동북항일연군을 연구하며 독립운동은 좌우이념논쟁이 아닌 진정한 자주독립운동의 실천과 헌신 그 자체에 집중해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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