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독도

 -지난호에 이어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이규원(李奎遠) 울릉도검찰사 ‘고종실록’


조선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3년마다 1회씩 수토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19세기 말경에 이르면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입도해 삼림을 남벌하는 등 피해가 많았다. 조정에서는 1882년에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해 을릉도의 실태를 파악케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보고토록 했다.

 

*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檢察日記)

 

사진/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檢察日記). 한국. 이규원. 1882년. 제주도 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어부들의 불법어로와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벌채 행위가 울릉도에서 계속됐고, 일본 군함의 불법 활동이 증가하므로,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울릉도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그는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 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 본국인이 140명 살고 있고, 나리동을 비롯해 6-7곳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는 거주지가 있으므로 울릉도에 행정구역을 실시하고자 건의했다. 그의 건의대로 1900년 울도군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그곳에 사은 주민들은 송도, 죽도, 우산도 등을 모두 근방의 작은 섬이라고 당연시 하고 있었다. 청명한 날에 높은 곳에 올라 우산도를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고 독도를 찾을 수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편서풍이 불어 해무가 사라지는 11월에는 독도가 보이지만 그가 울릉도를 조사하던 4월에는 해무로 인해 독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도 항해금지 대형경고판


사진/독도 항해금지 대형경고판. 일본. 1839년. 시마네현 하마다. 향토자료관 소장

 

1839년 2월 나무로 만들어진 이 경고판에는 ‘하지 우에몬이라는 사람이 다께시마(竹島)로 도해한 사건을 엄밀해 조사해 우에몬과 그 외 사람을 처형했다. 다른 나라로 도해하는 것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배와 만나는 것도 엄하게 다스린다“고 기록돼 있다.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이 있은 후에 일본의 막부는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항해를 금지시켰다. 이를 어기면 처벌하겠다는 경고판이다.

 

*울릉도 도항금지 건의문(鬱陵島 渡航禁止 建議文)

사진/울릉도 도항금지 건의문(鬱陵島 渡航禁止 建議文). 일본 이노우에 가오루. 1882년 독도박물관 소장.

 

1882년 12월 16일 일본 외무성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시키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처벌하자는 내용을 태정대신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이는 조선 정부가 이규원을 울릉도에 파견해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보 제1716호 울도군 설치

 

대한제국 관보 제1716호로 칙령 제41호를 수록하고 있다. 내용은 울릉도에 울도군을 설치하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으로 울릉도 전역과 죽도, 석도를 규정하고 있다. 석도는 바위섬을 ‘독섬’이라고 부른데에서 붙여진 명칭이고, 이를 음역하면 ‘독도’가 되고 의역하면 ‘석도’가 되기 때문에 석도는 분명하게 독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칙령과 관보를 통해 한국 영토로서의 독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계하서계책(啓下書契冊)

 

1876년 고종 13년 4월부터 1882년 고종 19년 8월까지 일본 외무성에 발소완 서계를 예조 승문원에서 묶은 공문서철이다. 서명에서 ‘契下’라고 한 것은 관청의 상계(上契)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관련사항을 논의해 국왕에게 契聞하면 국왕은 계자인(契字印)을 찍어서 문서를 하달한다. 이것을 ‘계하’라고 하므로 이같이 붙인 것이다. 년 월 순으로 서계를 편집했고, 각 서계에는 제목, 본문, 년 월 및 작성자의 직함, 성명과 계하일자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예조판서가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삼림벌목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하는 외교문서가 수록돼 있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사진/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일본. 마쓰나가 부키치. 1906년. 독도박물관 소장.

 

1905년 2월 22일자로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하다는 시마네현 지사 마쓰나가 부키치의 고시문이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55분, 오키섬의 거리는 서북쪽으로 85해리 떨어져 있는 섬을 죽도라 칭하고 이제부터 본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의 문서는 대부분이 필사본인데 이 문서는 활자본으로 된 점으로 미루어 후에 제작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가 원래 한국의 영토임을 알면서도 ‘주인이 없다’는 억지 주장을 펼쳐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로 편입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숨겨오다가 1906년 3월 28일 ‘을사늑약’을 맺고 난 이후 간접적으로 우리 정부에 통보했으나, 일본의 끝없는 욕심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한낱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됐다./자료출처=독도는 보물섬이다 등

- 다음호에 계속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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