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벌레와 메모광』은 제목 그대로 책에 미친 책벌레들과 기록에 홀린 메모광들의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은 책이다. 삶에서 책을 빼면 남는 것이 없고, 종이가 없으면 감잎에라도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아두었던 옛사람들. 그들에게 독서와 메모는 세속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이자 삶이었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읽는 자세는 소리를 내서 읽으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좋은 글에는 무엇보다 리듬이 살아 있다. 훌륭한 책은 내용도 좋지만 무엇보다 글의 가락이 자연스럽다.

책과 메모를 둘러싼 옛사람들의 이야기! 

[뉴스프리존= 이천호기자] 『책벌레와 메모광』은 제목 그대로 책에 미친 책벌레들과 기록에 홀린 메모광들의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은 책이다. 삶에서 책을 빼면 남는 것이 없고, 종이가 없으면 감잎에라도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아두었던 옛사람들. 그들에게 독서와 메모는 세속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이자 삶이었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1부에는 옛 책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묶었다. 돈을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용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용서로 생계를 꾸린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제일의 책벌레’였던 이덕무도 용서인이었던 듯 그의 편지에는 책을 베껴 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2부에는 일기, 편지, 비망록, 책의 여백에 써놓은 단상 등 옛사람들의 기록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았다. 연암 박지원의 경우 〈대용록〉이라는 빚장부도 남겼는데, 여기에는 남한테 외상으로 산 놋그릇, 심지어 요강 값까지도 상세히 적어놓았다. 하지만 후일에 쓸모없어졌다며 모조리 세초해버렸다는 이야기는 자못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외에도 책에 실린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옛사람들의 독서문화와 기록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벌레나 메모광 선인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재미만이 아니다.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던 책벌레들의 이야기와 숨쉬듯 읽고 밥 먹듯 메모하며 생각의 길을 내던 메모광들의 사연은 그 자체로 삶의 지혜요 든든한 문화적 유산이다.

저자소개저자 정민은?

저서 (총 70권)정민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다산 정약용이 창출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과 그 삶에 천착하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썼다. 2012년 8월부터 1년간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초빙을 받아 머물면서 그곳의 자료를 바탕으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을 썼다.

출판사 서평
책을 향한 사랑, 기록에 대한 열정 

삶에서 책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종이가 없으면 감잎에라도 스쳐가는 생각을 붙잡아둔 
책에 미치고 메모에 사로잡힌 옛사람들 이야기 
 
이 책은 책과 메모를 둘러싼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책에 미친 책벌레들과 기록에 홀린 메모광들이 주인공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을 책벌레와 메모광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과 메모는 도대체 무슨 마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대답과도 같다. 인문학 열풍 속에서 책과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고전 읽기와 글쓰기를 권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속에서 독서와 기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옛 선비들은 세속의 부박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독서와 메모는 일상이자 삶이었다.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담았다. 

고서를 통해 본 책벌레의 문화사 

장마철을 지나는 동안 꿉꿉한 방안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어 곰팡이가 피거나, 그 틈에 책벌레가 책 속에 복잡한 미로를 내면 책이 아예 못쓰게 된다. 다락방에 쌓아둔 책에는 쥐가 똥오줌을 싸놓기도 해서 냄새마저 고약하다. 이럴 때 시원한 선들바람에 책을 꺼내 마루와 마당 가득 펼치면 얼마 안 있어 바람결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챙챙댄다. 쇄서는 보통 초가을의 문턱인 칠석七夕에 했다. 이렇게 책갈피 사이에 시원한 바람을 한차례 불어넣어주고 나면 눅눅하다 못해 끈적대던 한지가 파닥파닥 되살아나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신명이 절로 붙었다. _33쪽 

1부에는 옛 책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묶었다. 먼저 장서인을 다룬 글이 눈에 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장서인 찍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한국의 옛 책은 장서인이 지워진 경우가 많다. 혹시라도 책에 남은 장서인이 훗날 가문에 누가 될까봐 살림이 궁해 책을 내다 팔 때면 책을 훼손하면서까지 장서인의 흔적을 지웠다. 조상의 책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본의 고서 가운데는 간혹 ‘소消’ 자 인장이 찍힌 책이 있다. 책을 입수하면 전 소유주의 장서인 위에 말소 도장을 찍고 그 옆에 새 주인인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던 것이다. 깔끔한 것이 일본인답지만 매몰찬 구석도 있다. 중국은 어떨까? 중국인들은 호방하게도 전 소유주들의 장서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넓은 천하에 네 책 내 책이 어디 있냐는 듯이. 중국 고서에는 책의 유전流轉을 보여주는 장서인이 가득하다. 한자문화권 안에서도 책을 간수하는 태도는 나라마다 이렇듯 달랐다. 

책벌레를 막기 위해 책장 사이에 끼워두었던 은행잎이나 운초芸草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을 사랑한 옛사람들의 그윽한 정취가 떠오른다. 100년도 더 된 책의 갈피에 압사당한 채 붙어 있던 모기 이야기는 「모기를 증오함憎蚊」이란 시를 남긴 다산의 사례와 더불어 웃음을 자아낸다. 판각을 마친 뒤 몇 부만 인쇄하여 저자에게 교정용으로 제공한 홍인본紅印本, 파란색으로 인쇄한 재교용 남인본藍印本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빨갛고 파란 책들은 요즘도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레어템’이라고 한다. 쓸 때는 선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오징어 먹물 이야기도 재미있다. 오징어 먹물은 주로 사기꾼들이 계약문서에 많이 썼다고 한다. 다산도 애용했는데 그가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가 일부 박락된 채 남아 있다.

돈을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용서傭書’라고 한다. 이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용서인들의 이야기는 애처롭다. 출판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용서로 생계를 꾸린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제일의 책벌레 이덕무도 그중 한 명이었던 듯 그의 편지에는 책을 베껴 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필수로 교육했다는 초서?書, 즉 베껴 쓰기에 대한 글과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덕무의 구서재九書齋 이야기에서는 옛사람들이 어떤 체계로 책을 읽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천재는 없다, 부지런한 기록자가 있을 뿐 

책은 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쓸 때가 확연히 다르다. 손으로 또박또박 베껴 쓰면 또박또박 내 것이 된다. 눈으로 대충대충 스쳐 보는 것은 말달리며 하는 꽃구경일 뿐이다. 베껴 쓰면 쓰는 동안에 생각이 일어난다. 덮어놓고 베껴 쓰지 않고 베껴 쓸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저울질해야 하니 이 과정이 또 중요하다. 베껴 쓰기는 기억의 창고에 좀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위력적인 방법이다. 또 베껴 쓴 증거물이 남아 끊임없이 그때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각성 효과가 있다. 초서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 _109쪽 

2부에는 옛사람의 기록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았다. 일기, 편지, 비망록, 책의 여백에 써놓은 단상 같은 것들이다. 밭일을 하다가도 항아리 속에 넣어둔 감잎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어두었다는 중국 선비의 고사를 본떠 이덕무는 자신의 메모집에 『앙엽기?葉記』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가 실려 있다. 그 바쁜 연행 길에서도 나비 날개만한 종이쪽에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로 보고 들은 것을 정신없이 메모해둔 글이다. 박지원의 「앙엽기」는 당연히 이덕무의 『앙엽기』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연암은 종이가 넉넉지 않아서 글씨는 가능한 한 가장 작게 썼다. 연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승두문자蠅頭文字’라는 것이다. 승두는 파리 대가리다. 가뜩이나 작은 공책이니 최대한 글씨 크기를 줄여야 종이도 아끼고 정보도 많이 채워 적을 수가 있었다. 크게 쓰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돌아올 때 짐의 부피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공책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손바닥에 펼쳐놓고 적을 수 있는 크기, 도보로 이동할 때는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크기였을 것이다. 앞의 글에서 연암이 말한 나비 날개만한 종이가 그것이다. _160쪽 

연암은 「대용록貸用錄」이라는 빚장부도 남겼다. 남한테 외상으로 산 놋그릇, 심지어 요강 값까지 상세히 적어놓았다. 돈 문제에 깔끔했던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눈이 어두워져 나중에 책으로 묶으려고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메모를 쓸모없어졌다며 모조리 세초해버렸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진한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메모의 왕은 역시 다산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다산의 메모는 하나하나가 소논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학문적 깊이를 갖추고 있으며 그 필치는 예술작품에 가깝다. 다산의 드넓은 학문 세계는 모두 치열한 독서와 끊임없는 메모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동잎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시와 그림과 인장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다. 그 밖에 책의 출전을 메모하는 법,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법,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재빨리 적어두는 질서법疾書法 등 선인들의 기록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옛 선비들이 일 없는 여가에 문을 닫아걸고 낡은 책을 수선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저자도 자신의 오래된 취미 생활인 ‘풀칠 제본’ 이야기를 실제 사진을 곁들여 상세히 들려준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집필한 저자의 독서와 메모 노하우가 이 풀칠 제본 이야기에 다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풀칠을 한다. 한 장 한 장 펼쳐 풀칠하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동안 책 한 권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좋다. 촬영이나 복사를 하면서 한 번 넘겨보고, 접지할 때 한 번 더 보고, 풀칠하면서 한 번 더 보면 책의 골격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풀칠을 마치고 무거운 책으로 두어 시간 눌러두었다가 뽀송뽀송해진 뒤에 짱짱해진 책장을 쫙 펼치면 마른 풀 기운이 당겨지면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난다. 이때의 기분은 더없이 개운하다. 한 손에는 붉은 먹을 찍은 붓이 메모할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붓방아를 찧고 있다. _244~245쪽 

책에 실린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옛사람들의 독서문화와 기록문화를 살펴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독서는 주변 분위기나 유행을 좇아 하는 일이 아니라 밥을 먹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생각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메모만큼 강력한 도구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도 메모의 위력은 변하지 않는다. 책벌레나 메모광 선인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재미만이 아니다. 옛사람들의 책을 향한 사랑과 기록에 대한 열정은 그 자체로 삶의 지혜요 든든한 문화적 유산이다. 이 책이 오늘날 독서 문화의 근본을 되짚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tyche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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