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예술극장에서 김윤철 예술감독,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작, 로버트 알폴디(Robert Alfoldi) 각색 연출의 <메디아(Media)>를 관극했다.

 
세 명의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 중에서 에우리피데스는 가장 "현대적"인 인물로 꼽힌다. 현대적이라는 표현은 에우리피데스가 실제로는 소포클레스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으면서 그 보다 두세 달 먼저 타계한 점으로 더욱 부각되기도 하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 다른 작가들보다 사실주의적인 작품성이 탁월한 점, 비극을 멜로드라마 또는 희극과 혼합한 점, 그리고 그리스 신들을 회의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등으로 한층 현대적인 작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에우리피데스는 평생 "현대"적인 작품을 쓴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으며, 그러한 사실적인 작품 세계는 당시의 통념으로 비극으로 간주되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개별 작품들도 (상대적으로 나약한) 플롯의 사용이라든가 코러스 활용을 축소한 점, 그리고 구설수에 오를 정도의 주제 등으로 비난을 면치 못했다. (비록 훗날 멜로 드라마와 희비극의 귀감이 되기는 했지만) 그가 희극과 비극을 혼합한 작품을 쓴 것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항목은 그가 전통적인 도덕률에 입각하여 그리스 신들을 쉽게 타락하기도 하는 인간의 수준으로 묘사한 점이다.

에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와는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 정치나 사회 활동 등에 활발하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아테네 령의 살라미스 섬에서 부유층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 자란 부유층의 아들답지 않게 그는 기질적으로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이었고 바깥 세상에 한데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관망하기를 더 좋아했고 또 당시의 사회적. 철학적 운동들을 검토해 보기를 좋아했다. 그가 작품 속에서 거칠고 우악스러운 여성 인물들을 자주 다룬 것으로 미루어, 에우리피데스는 평온치 못한 결혼 생활로 인하여 여자를 싫어하게 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극작가로서 에우리피데스는 동시대 어느 작가보다도 더 그럴 듯한 여성 인물을 창조했고 또 여성에 대해서도 훨씬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 주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주 에우리피데스의 철학과 극작술 등에 대해 조롱조로 에우리피데스 작품 중의 장면들을 발췌하여 희화화했다. 에우리피데스는 평생에 걸쳐 완성한 총 92편의 작품 중에서 5편의 작품만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불운을 겪지만 그의 명성은 사후에 급속도로 커지게 되며 그는 작품의 독창성과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찬양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극작술 대부분은 시대의 고금을 막론하고 극작가들에 의해 모방되는 모델이 된다.

현존하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모두 18편이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 순으로 나열해 보면 <알세스티스>(Alcestis, 438 B.C.). <메디아>(Media, 431 B.C.).< 힙폴리튀스>(Hippolytus, 428 B.C.).<안드로마케>(Andromache, ca. 424 B.C.). <탄원자들>(The Suppliants, ca. 420 B.C.). <트로이 여인들>(The Trojan Women, 415 B.C.). <엘렉트라>(Electra, ca. 412 B.C.).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a in Tauris, ca. 410 B.C.). <헬렌>(Helen, 412 B.C.).<오레스테스>(Orestes, 408 B.C.). <바카에>(The Bacchae, ca. 406 B.C.).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a in Aulis, ca. 406 B.C.) 그리고 연대 미상의 풍자극인 <싸이클롭스>(The Cyclops)등이다.

 
로버트 알폴디(Robert Alfoldi, 1967~)는 1991년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 공연영상 아카데미 (Film and Theatre Academy of Budapest) 출신의 배우이자 연출가이다.

1998년 <베니스의 상인(Merchant of Venice)>으로 부다페스트 시 제정 그해의 최우수 연출가상과 비평가 상 (Critics’ Award and the Award of the City of Budapest for the Best Director of the year for)을 수상하고, 1995년 야사이 마리 상과 미래 상(Jaszai Mari Award and Pro Future Award)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헝가리 공화국 공로훈장 (Republic of Hungary Merit Neatcross)을 수상하고, 2012년에는 그 해의 예술가 상 (The Artis of the year)을 수상했다.

2008년에 부다페스트 국립극장 예술감독 (the Artistic Director of the National Theatre, Budapest)에 취임해 향 후 5년 간 헝가리 국립극장의 연극을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일부 우파 기독교 극장 연맹 (Right-wing Christian TheaterAlliance)과 좌파 자유주의 극장 연맹(Federation of left-wing liberal theaters)의 비판을 받았다. 2016년에는 방한해 국립극단의 <겨울 이야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메디아>에 관한 신화에서는 테살리아의 왕인 이올코스의 펠리아스가 조카 이아손에게 '황금 양털' 을 찾아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명을 내린다. 이아손은 황금 양털을 찾아 아르고 호를 타고 콜키스 - 지금의 조지아(그루지야) 지역 - 로 갔는데,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의 딸인 <메디아>가 이아손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다. 족보를 따져 보면 메디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이자 <오딧세이아>에 나오는 키르케의 조카로, 마법에 능하여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찾도록 도와주고 뒤에 그를 따라 콜키스에서 도망친다. 그 와중에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기 남동생을 살해해 시체를 토막 내 바다에 뿌린다.

그리고 이올코스에 왔는데, 펠리아스는 사실 이아손이 자기 왕위를 빼앗을 거라는 신탁을 받아서 이아손을 멀리 쫓아버리려고 불가능한 사명을 준 거였고, 진짜로 이아손이 돌아오자 입을 싹 씻는다.

그러자 메디아는 '펠리아스를 회춘시켜 주겠다' 며 펠리아스의 딸들을 속여 딸들이 펠리아스를 독살하게 만든다. 그리고서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로 도망치는데,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 (오이디푸스의 뒤를 이은 테바이 왕 크레온과는 동명이인) 이 딸 글라우케를 이아손에게 주겠다고 하자 이아손은 글라우케를 받아들고 <메디아>를 버린다. 복수심에 사무친 <메디아>는 독이 묻은 옷을 보내 글라우케와 크레온을 살해하고 아테나이로 도망쳐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에게 의탁하고 몸과 마음을 밀착시킨다.

자식이 없던 아이게우스 사이에서 아들도 낳는데, 갑자기 아이게우스의 잃어버린 아들 테세우스가 등장하자 테세우스를 독이 들어있는 술로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아들을 데리고 도로 콜키스로 도망친다. 거기서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은 삼촌을 살해하고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아 준 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훗날 아들이 콜키스의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메디아> 로 바꿨다. 

한편 이아손은 실의에 빠져 아르고 호 배 밑에서 자다가 썩은 뱃고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비명횡사했다.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메디아>는 코린토스에서 버림받은 메데이아가 이아손에게 복수하는 부분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작품에서 <메디아>는 글라우케와 크레온뿐 아니라,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두 아들마저 자기 손으로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원래 신화에서는 <메디아>가 아들들을 시켜 글라우케에게 독이 묻은 옷을 선물로 전해 주게 했고, 분노한 코린토스 시민들이 아들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에우리피데스는 <메디아>가 복수의 일환으로 이아손의 대를 끊고 가정을 무너뜨려 고통스럽게 살도록 만들기 위해 스스로 아들들을 살해하였다고 구성한 것이다.

이 '복수를 위한 자식 살해'가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또한 <메디아>는 자식 살해를 결행하기 직전, 유명한 독백을 통해 '자신의 '격정'이 '숙고'보다 강력하다' 는 대사를 읊는다. 이렇게 자신의 격정으로 인해 자신과 아들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결단은, 마치 <일리아스>의 첫 구절인 '분노', 아카이아 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준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모방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메데이아가 <일리아스>의 영웅들과 다른 점은, 메데이아의 내면 갈등과 고뇌가 훨씬 더 극명하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명예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단순무식하고 평면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에 반하여 메데이아는 자식들을 죽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들의 눈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결행을 결심하는 복잡한 내면 심리를 긴 독백을 통해 보여 준다.

'격정이 숙고보다 강력하다' 고 외치는 메데이아의 위 대사는 <일리아스>의 '분노'를 연상시키지만, 그 이면 깊숙이에 보이는 고뇌로 인해 메데이아의 분노는 더욱 묵직하고 처절하게 느껴진다.또한 메데이아는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비극적 운명을 선택한 성격창출이다. 예컨대 다른 명작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비극에 빠지게 되나, 출생의 비밀을 밝히려는 자신의 시도가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긴 독백을 통해 자신의 내면 갈등을 폭풍처럼 발산하고,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끔찍한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비극적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에서 다른 비극 주인공들과 대조된다.

무대는 백색벽면으로 둘러싸여진 일종의 회당이나 강당 형태의 공간이다. 천정에 거대한 원통형의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작의 코러스 대신 16명의 미모의 여인이 등장하고, 정면 벽좌우에 내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하수 쪽 중앙 벽면과 객석 가까운 무대 좌우에도 등퇴장 로가 있다. 십여 개의 의자, 환자이동침구, 단검이 사용되고, 후반에 천정에서 거대한 원통형 아크릴 통이 내려와 메디아의 자식 살해 장면에 밀폐된 공간으로 사용된다.

연극은 도입에 <메디아>의 비명 같은 외침에서 시작해, 16인의 여인 중 코러스 장 격인 여인의 대사와 여인들 간의 대에서 극적 상황이 객석에 전달되고, 훤칠한 미남 크레온이 등장하면서 극의 분위기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신화가 아니라, 현대 서양의 한 왕궁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구성되고, 원작의 내용을 답습했으나, 현대의 잔혹극처럼 연출된다.

이혜영이 <메디아>로 출연해 일생일대의 명연을 해 보인다. 의상과 착용하는 신, 구두 또한 작중인물의 성격설정이나, 극적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대사 하나하나 미세한 동작에 이르기까지 노력한 결과가 무대에 드러나 기억에 남는다. 김정은의 코러스 장 역은 물론, 황연희, 문경희, 최지연, 김민선, 김수연, 정혜선, 김수아, 김혜나, 황미영, 황선화, 최아령, 이은주, 박선혜, 최지혜 등 코러스 역마다 자신들의 성격창출과 연기력을 확실하게 드러냄은 물론, 남명렬, 하동준, 박완규, 손상규, 임영준의 탁월한 성격창출과 호연은 물론, 아역으로 출연한 배강유 배강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전체 출연자의 연기력의 조화는 극을 고품격 고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해 관객의 갈채를 받는다.

번역 우르반 일렉산드라, 공연대본 윤성호, 의상 진태욱, 무대 박동우, 조명 김창기, 분장 백지영, 소품 김혜지, 음향 유옥선, 레지던스 연출 정승현 등 스텝진의 열정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 국립극단의 김윤철 예술감독,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작, 로버트 알폴디(Robert Alfoldi) 각색 연출의 <메디아(Media)>를 명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박정기 문화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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