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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대통령의 정신적인벗 송기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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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대통령의 정신적인벗 송기인신부
  • 김현태
  • 승인 2017.05.13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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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하자. 간다.”
 
지난 오랜기간 노무현전 대통령의 죽음을 믿지 못해, 아니 잊지못했던 송기인신부의 관계가 새로운 화재다. 8년전, 그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닭 쫓던 개가 이런 심정일까. 녹음기와 취재수첩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고작 한마디 붙여본다는 게, “어디로 가시는데요”였다. 사실 그가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터뷰 시간을 더 빼내는 게 중요하지. 그는 “모처럼 서울 올라왔으니 만날 사람도 있고…” 하면서 내가 자리에서 채 일어서기도 전에 잰걸음으로 계산대로 갔다.
 
한 40분쯤 이야기했을까. 만약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다면 나는 깊이 상심하고 어쩌면 절망했을 것이다. 이 직업을 계속해야 할지 심각한 회의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두 번째 만남이다. 첫 인터뷰는 8일 전 그가 사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의 촌구석에서 이뤄졌다. 밥 먹은 시간 포함해 두 시간쯤 얘기한 것 같다. 그때도 그는 몇 번이나 “이제 그만해” “할 얘기 없어”라고 수박씨 뱉듯 툭툭 내뱉어 많은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는 것이 직업인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꾸밈이 아니다. 타고난 성격이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하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 알고 나면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라는 송기인(宋其寅·71) 신부. 아마도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때 가톨릭 대표로 집례하지 않았더라면 인터뷰를 요청할 맘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노무현의 정신적 스승’으로 불린다.
 
1부
삼랑진 밤꽃향기
밀양역에서 내려 택시로 30~40분 갔을까. 송 신부가 산다는 삼랑진읍 용전리가 나타났다. 산지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그의 집은 노인회관 바로 뒤편에 있었다. 기와를 얹은 흙담집이 오래 묵은 간장냄새처럼 고향마을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저런 흙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성년이 된 이래 아파트라는 콘크리트집에 갇혀 지내고 있다.
 
송 신부의 집엔 아담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마거리트, 장미, 작약, 채송화, 그밖에 이름 모를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쩍쩍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앞마당 나무의자에 앉아 우리(나와 사진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그마하지만 단단해 뵈는 체구다. 첫 만남에 서로 인사하고 예절을 차리는 격식 따위는 무시됐다. 각진 얼굴과 안경, 날카로운 눈매, 짙은 눈썹… 차갑고 강한 인상을 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말수마저 적으니 편하게 대화하기는 애초 그른 것 같다.
 
“내가 이마에 물 부었잖아”
2005년 6월 사목(司牧)직에서 은퇴한 송 신부는 4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면서 묘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의 묘가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자칭 능참봉이다. 그가 삼랑진에 정착한 데는 그만한 연고가 있다. 1978년 삼랑진성당 주임신부로 임명돼 4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지금 내 머리가 비어 있거든.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머리가 뻥 뚫린 기분이야. 그래서 정리를 못해.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기억나는 대로 답할게.”
 
송 신부는 모 심다가 들어온 참이라고 했다. 자주색 반팔 셔츠를 입었는데 가슴에 흙 자국이 있다. 제시카로 불리는 중년여성이 음료를 내왔다. 송 신부에게 식사시중을 하는 신도였다.
   
 
▼ 언제 처음 사망소식을 들었나요.
“그날 아침(5월23일) 아는 부산시민이 연락을 해왔어. 9시 반께. 신부님, 뉴스 봤냐고. 대통령 돌아가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 바로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달려갔지. 여기서 승용차로 30분쯤 걸려. 검시(檢屍)한다고 좀 기다리라고 하더라고. 11시쯤 냉동실에서 시신을 살펴봤지.”
 
그가 자신의 어깨와 목 부위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멍이 많이 들었데. 얼굴은 깨끗하고. 내가 옛날에 이마에 물을 부었잖아. 세례. 이번에 다시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했지.”
 
“뭐라고 기도했냐”니까 라틴어로 뭐라 한참 중얼거렸다. 사람이 죽었을 때 하는 기도문으로 ‘편안히 하느님 품으로 가시라’는 뜻이란다.
 
▼ 처음 소식 접하고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사람이 멍해지지.”
 
▼ 나름대로 걱정된 바가 없었는지요.
“검찰 수사와 관련해 권양숙 여사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은 했지. 대통령은 전혀….”
 
▼ 대통령 얼굴이 평온하던가요.
“평온하고 깨끗하더라고. 평상시와 똑같아. 기분 좋게 자는 것처럼.”
 
▼ 자살은 기독교에서 큰 죄악 아닌가요.
“가장 큰 잘못으로 간주하지. 자살자에 대해선 교회가 영례를 박탈해버려. 성당에 시신을 모실 수도 없고 묘지에 다른 신도들과 함께 묻히는 것도 거부당하지.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경우는 극도로 고심하다 자살을 했다기보다는 문제해결의 방편으로 자살을 했다고 보기에 조금 다르게 생각하지.”
 
▼ 그게 구분이 됩니까.
“되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송 신부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워진 계기는 1982년 3월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일으킨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사건)이다.
“내가 노 변호사를 변론인으로 끼워 넣었어. 한 명이 모자라서. 박찬종을 빼고. 월요일마다 재판이 열렸는데 재판이 끝나면 함께 저녁식사를 했어. 그 자리에서 많이 가까워졌지.”
 
“자기 집하고 바꾸자고…”
그는 ‘노무현의 정신적 스승’으로 불리는 데 대해 “스승은 무슨, 친구지” 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큰 책임을 느끼지. 그렇게까지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했으니…. 봉하(마을)에 전화하니, 자기가 연락한다 하고는 안 하더라고. 그러다 저런 일이 벌어졌지. 내가 만난 지 꽤 됐어. 대통령 물러나고서 그 집에 세 번 갔어. 혼자 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양반이 여기 와서 점심 한 번 했고. 그게 다야. 이 집에 와 보고는 자기 집하고 바꾸자고 하데. 신부님 집이 더 좋다며. 아이구, 나는 그런 집 청소 못해, 했지. 내가 책을 보낸 적도 있어. 백낙청 전집 5권짜리. 나는 읽기 지루해서, 에이 너나 봐라 하고….”
 
그가 노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지난해 겨울. 검찰수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났지만, 이때쯤 이미 검찰은 커다란 올가미를 만들어 노 전 대통령 쪽으로 던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닌자의 은밀한 공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 당시 봉하마을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여남은 명이 가서 저녁을 같이 했지. 그때도 자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지방분권 문제였던 것 같아. 나는 반주를 하는데, 노 대통령은 술을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술대접할 줄을 몰라. 내가 포도주 갖고 오라고 하자 (사저 직원이) 뛰어가서 포도주를 사 왔는데, 한잔 따라놓기만 하고 마시지 않더라고. 사실 나는 소주를 더 좋아하는데. 내가 지금 한 가지 아쉬운 게, 검찰 수사가 불거진 다음에 한 번 가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는 거지.”
 
▼ 자살을 선택할 만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는 성격이지. 자신이 당하는 건 어렵지 않아. 내가 1970년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있을 때도 옆 사람 괴롭히는 게 더 견디기 힘들더군. 나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다친다는 생각에. 정보부에서 전화만 와도 끔찍하던 시절이잖아. 권(양숙) 여사에 대해서도, 애들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 같아. 그런 걸 참아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 봉하마을에 사는 김OO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 자살이 아니라고 우기더라고. 화장하면 안 된다는 거야. 부검해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유서 보면 이의를 달 수도 없잖아.”
 
▼ 경복궁 집례는 가족의 요청이었나요.
“천주교 예식에 들어 있지. 대체로 해당 지역의 본당 신부가 하는 건데, 장의위원회에서 높은 사람을 원치 않더라고. 나보고 하라기에 정진석 추기경한테 전화해 ‘추기경께서 하시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나보고 하라고 하시더라고.”
 
▲ 청와대에서 노무현대통령과

“저, 착하게 사는데요”
노 전 대통령은 1986년 송 신부한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유스토. 가톨릭교의 관습대로 유스토라는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유스토는 라틴어로 정의, 올바름이라는 뜻이다.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 학습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거꾸로 세례를 먼저 받고 학습에 들어갔다. 그나마 학습도 엉터리였다.  
 
“어느 날 재판이 끝나고 저녁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하도 머리가 비상하기에 내가 성당에 나오라고 권했어. 그랬더니 ‘대학을 못 나왔는데 성당은 받아줍니까’ 묻더라고. 내가 ‘성당은 문이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했지. 그래서 부인과 함께 입학했어. 6개월 동안 모두 52시간 가르쳐야 했는데, 그 양반 4시간 출석하고 끝이야. 당연히 심사에서 떨어졌지. 그래서 노 변호사 사는 동네(부산 남천동) 신부에게 전화해 ‘인수’하라고 했지. 다시 가르쳐 세례를 그쪽에서 주라고. 그랬더니 그 신부 말이 내가 먼저 세례를 주면 가르치겠다는 거야. 세례 받을 때는 대부 대모가 필요하거든. 마침 한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신도가 있어 대부 대모로 보내주더라고. 그래서 그들이 입회한 상태에서 세례를 주고 그 지역 성당으로 가서 신부와 함께 다섯이서 저녁을 먹었어. 그 신부가 바로 지난해 돌아가신 정명조 주교야. 노 변호사가 그 성당에 나간 건 그걸로 끝이었어. 그 뒤론 안 나갔으니까. 그래서 말이 많았지. 욕도 먹고. 한번은 노 변호사한테 얘기했어. 당신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른다, 사람이 그러면 쓰나 하고. 그랬더니 ‘신부님이 성당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하는 거야. 그러면서 ‘저, 착하게 사는데요’ 하더라고. 할 말이 없는 거라. 하여간 세례만 받고 성당엔 안 다녔어. 권 여사는 취미도 없었고.”
 
▼ 인간 노무현의 매력을 꼽는다면.
“노상 촌놈이야. 기교가 없지. 꾀를 못 부리고. 직선적이야.”
송 신부의 평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매력 포인트는 반대로 결점이기도 하다.
“지도자로선 핸디캡이지. 자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할 뿐 돌려서 부드럽게 표현하는 능력이 없어. 한마디로 세련되지 못한 거지. 그것도 병이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만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다 알고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거지. 그런 건 대인관계에서 마이너스야. 하여간 책을 많이 읽어선지 많이 알긴 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노무현은 송 신부를 깍듯이 대했다. 송 신부는 말을 놓았고 노무현은 말을 올렸다. 송 신부는 “대통령 되고나서는 내가 호칭을 하질 않았다”며 웃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만남 외 사적으로는 만난 적이 없어. 인수위 시절 호텔에서 같이 아침을 먹었어. 그때 내가 말했지. 앞으로 특별히 잘못하지 않는 한 안 만날 거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몇 가지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어. 첫째, 돈을 절대 모으지 말라. 둘째, 친인척은 특수감옥에 가둬라. 격리하라는 뜻이었지. 셋째, 개혁은 끝까지 해야 한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중 그런 노력을 했고 대체로 잘 지켜졌다고 생각해. 박연차, 이런 건 상상도 못했고. 그런데 박연차 문제도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 조사단계에서 (검찰이) 떠들어버려서 그렇지.”
 
▼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권 여사에게 돈이 건네진 건 확인되지 않았나요.
“노 전 대통령이 알았는지에 대해선 증거가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까지…. 법적인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투박한 소주잔
동네 이장이 확성기를 통해 방송을 했다. 무슨 소린지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남자들보고 나눠줄 게 있으니 연못 양어장으로 모이라는 얘기 같았다. 언뜻 여자들이 목욕하는 날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송 신부에게 물으니, 동네에 조그만 찜질방이 하나 있는데, 홀숫날은 여자들이, 짝숫날은 남자들이 이용한다는 것이다. 송 신부에 따르면 이 동네 인구는 38명. 22가구라고 하니, 한 가구에 2명도 안 사는 턱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많아. 대부분 노인네지. 그래도 내가 여기서 나이가 가장 많아. 우리 나이로 72세인데, 앞집이 나와 동갑이야.”
어둑어둑 황혼이 드리우고 있었다.
“제시카, 기자들이 한양에서 와서 목이 마르다. 물 한 잔씩 더 줘.”
 
제시카가 “식사 준비됐다”고 대꾸하자 송 신부는 “밥 먹자”며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이 생각보다 넓고 깔끔했다. 38평(125㎡)이란다. 교구에서 관리하는 집인데, 송 신부가 죽으면 다른 신부가 살게 된다고 한다.
 
통나무로 들보와 서까래를 짰고 천장이 높아 시원하게 느껴졌다. 벽 쪽으로 중후한 느낌을 주는 오디오 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감미로운 피아노 소나타가 흘러 나왔다.
 
생선과 계란 튀김, 상추, 고추 따위가 어우러진 밥상이 소담스러웠다. 식사 전 송 신부가 대표기도를 올렸다. 제시카와 더불어 일손을 도와주러 온 중년남성 한 명이 합류해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식탁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넉넉한 소주잔이었다. 일반 소주잔보다 조금 크고 넓었는데 반의 반 잔가량 더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송 신부는 이 잔을 부산의 한 시장에서 직접 골랐다고 한다. 이 투박한 잔에 그는 부산 일대 소주시장을 주름잡는 C1소주를 쏟아 부었다. 우리에게도 잔을 건네고 술을 채웠다.
   
“자, 들어, 들어.”
 
칠순의 송 신부는 한두 번에 잔을 비웠고 나와 사진기자는 서너 번에 나눠 마셨다. 꼴깍꼴깍 그의 목울대 소리가 경쾌했다. 인터뷰할 때와 달리 목소리가 쾌활했고 정이 느껴졌다. 장난기도 있었다. 그는 “이 잔으로 마시니까 기분 좋지”하면서 연신 술을 권했다. 잠깐이라도 술잔이 비면 참지 못하는지, 앞사람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선지 자작(自酌)을 즐겼다. 식사가 끝나기 전 소주 2병이 후딱 비워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송 신부는 “벼 농사는 적자야. 그래도 땅을 놀리기보다는 모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하다가 영화 ‘워낭소리’가 화제에 올랐다.
 
“내가 영화를 자주 보거든. ‘워낭소리’는 한마디로 고집이지. 그런 지조가 있어야 해. 부산에서 스무 명 넘는 사람이 같이 그 영화를 봤어. 저녁 먹으면서 나보고 건배하라기에 ‘안 팔아!’ 했지.(웃음)”
 
“기득권층이 인정하지 않을 것”
식사를 마치고 술 진열장을 구경했다. 와인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위 아래로 위스키와 브랜디 따위의 독주가 밀착해 있었다.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피아노의 우아한 청음이 첼로의 묵직한 허스키로 바뀌었다.
 
▼ 노 전 대통령이 신부님한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나요.
“별로 그런 것 없어. 동아대나 부산대 교수들이, 학생들이 감옥에 가면 가장 먼저 나한테 연락해. 그럼 내가 변호사들한테 연락해 가보라고 하지. 김광일 이흥록 문재인 노무현 중에 누군가 걸리는 거지.”
 
▼ 그런 일을 제안받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촌놈이지. 거절 못하고. 알겠습니다, 하고 간단하게.”
 
▼ 수임료도 없었을 텐데요.
“물론이지. 학생들과 노동자들한테 무슨 수임료? 다른 사건에서 많이 버는 수밖에 없지.”
 
▼ 이른바 386참모들에 대해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어. 하지만 본심과 의욕은 순수했다고. 일하는 데 실수야 있었지만 심지가 곧았다고. 지금의 집권층, 기득권자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 의욕이야 좋았는지 모르지만 성과나 업적은 빈약하지 않았나요. 국론분열도 심했고.
“그 원인을 조 기자는 어떻게 생각해?”
 
인터뷰이가 곤란한 질문으로 되받아칠 때는 침묵이 제일이다.
 
▼ 노 대통령의 경우 국정 수행에 부적절한 언행도 많았습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될 때부터 발목이 잡혔잖아. 당선된 후 문재인의 첫마디가 ‘기득권층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어. 실제로 그랬지. 나는 대표적인 기득권층이 조중동이라고 생각해. 노 정권의 발목을 잡은 세력이 조중동 아닌가. 우리나라의 장래보다는 일류신문이 되는 것만 생각해. 그 문제로 조선일보 사장과 술 마시고 엄청 싸웠어. 당신들이 진정 나라를 생각하고 신문을 만드는 것이냐고. 그랬더니 자신은 신문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고 경영만 한다는 거야. 기업을 튼튼하게 키우는 게 자신의 일차적 책임이라면서. 여기 내려온 후에도 조선일보 사장과 만나 몇 번 술을 마셨어. 술만 먹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쓴소리를 많이 하지. 중앙일보 주필을 지낸 문창극 대기자와도 몇 번 만났지.”
 
그에게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失政)보다는 성과가 더 돋보이는 듯싶었다. 거듭 의도나 의지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역대 대통령 중 제대로 일해본 사람은 노무현밖에 없다고 생각해. 파격이랄까. 일반적인 대통령의 처신과 달랐지. 민심이나 국가경영 면에서 이명박 정부보다 나았다고 생각해. 노무현이 오기정치 한다고들 비난했지만, 운하 밀어붙이는 걸 보면 더하잖아. 국민과 어긋나게 가잖아.”
 
자살은 검찰에 대한 항의
그는 “김영삼 김대중 시대와 비교하면 노무현 때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컸다”며 노 정권에 대한 후한 평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이 하는 얘기지만, 권력을 손에서 놓았잖아. 그거야말로 혁명이야. 검찰, 너희가 알아서 해라. 국정원, 보고하지 말라. 국세청, 세무조사 알아서 해라. 역대 그런 대통령이 없었잖아. 그리고 돈 가지고 당선될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어. 정치자금 문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미국보다 낫다고 생각해.”
 
▼ 노 대통령의 비극은, 보수층의 공격이야 어차피 예상됐던 거고 지지세력의 상당수가 등을 돌리게 됐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내가 (이라크) 파병은 반대했지. 노무현도 힘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거야. 한국 대통령으로서의 한계지.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국민여론의 힘을 업고 미국에 맞서보라는 뜻에서 반대한 거지.”
 
▼ 대연정 제의는 현실성도 없을뿐더러 국론 분열만 일으킨 것 아닌가요.
   
“결과적으로 그랬지.”
 
▼ 여러모로 실망한 국민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나라가 정상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노무현의 모험과 의욕이 우리나라 발전에 바람직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
달빛과도 같은 바이올린 선율이 흐른다. 밖은 이제 어둠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도대체 노 전 대통령은 왜 그 칠흑 같은 죽음의 길을 걸어갔을까. 검찰수사에 대한 항의? 도덕적 자부심이 무너진 데 따른 자괴감? 더 이상의 수사를 막으려는 고육책? 판을 뒤집으려는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 송 신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항의지. 내 생각엔 검찰에 대한 불만 표시인 것 같아. 전직 대통령이니 집에 찾아와 조사하는 게 맞지. 게다가 증거도 없는데. 망신을 실컷 주자는 작전이었지. 그걸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거야.”
 
▼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다 불러다 조사하지 않았나요.
“그들과 같이 취급된다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겠지. 그 사람들은 몇천억 해먹었잖아. 그런데 노 대통령의 경우 옛날부터 후원하던 사람한테 돈 받은 건데…. 강금원 회장 말마따나 늘 도와주던 관계였지. 어쨌거나 이게 우리나라 발전의 한 단계인지 몰라.”
 
▼ 노 전 대통령이 죽어서 살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래. 국가 차원에서 보면 득이 될 수도 있어.”
 
▼ 국민통합이나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자기 몸 던져서.
“문제는 그 가치를 어떻게 수렴하느냐지. 서로 양보해 그 뜻을 살려내면 국가발전의 좋은 계기가 될 거고. 그런데 민주당은 바득바득 자기 이득 챙기려고만 해. 한나라당도 양보할 수 없다는 거고. 이래서야 도루묵이지. 좋은 계기를 놓치는 거지. 국회의장한테 물병 던지고 대통령 화환을 짓밟고… 도대체 이게 뭔 짓인지. 막지도 못해. 문재인 말도 안 먹히더라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편을 가르면 안 되지.”
 
깨어진 티베트여행 약속
▼ 유서의 뜻과도 안 맞는 것 아닌가요.
“안 맞지.”
그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A4 용지 하나를 들고 나왔다. 유서 원본이라면서.
“이게 그날 노 대통령 집 컴퓨터에서 처음 뽑은 거야. 대학병원에서 봤는데 내가 가져왔지.”
윗부분에 ‘5시10분’이라고 연필글씨로 적혀 있었다. 누군가 유서가 작성된 시간을 기록해놓은 걸로 짐작됐다.
그가 갑자기 “그만하고 가!” “할 얘기 없어” 하면서 쫓아내려 했다. 서울에서 비싼 KTX 타고 왔는데, 이 정도로 물러설 순 없지.
 
▼ 예전 얘기 좀 더해주세요.
“노 전 대통령은 어느 시점까지는 인생을 즐기는 편이었어. 변호사로서 잘나갔지. 돈도 벌고. 그러다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거기에 몰입하게 된 거지. 거리 아스팔트 바닥에 나하고 자주 어깨를 겯고 앉았었지. 우리나라에서 현실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가장 빨리 생각해내는 사람이 한승헌 변호사야. 그 다음으로 노무현이 잘할 거야. 쉽게 핵심을 찔러 말하지.”
 
▼ 두 분의 인연이 또 없나요.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고. 이런 약속이 깨졌지. 2002년인가, 문재인이 운전하고 이호철(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안내해 넷이서 티베트 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런데 노무현이 청와대 가는 바람에 깨졌지. 내년에나 갈 생각이야. 노무현이 없어도.”
 
▼ 대통령 재임 중 끝내 부산시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되는데요.
“한나라당 조직이 무서워. 딱 틀이 잡혀 있어. 다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 학교동창, 집안사람 등. 다른 당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 그리고 노무현의 가치 지향점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야. 오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뜬구름 같은 얘기지. 미래지향적인 정견으로는 시민들 맘을 잡기 어려워. 사람들이란 현실적인 이해를 따지지, 이상적인 사회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거든.”
 
▼ 대체로 자기 지역 출신 정치인은 밀어주는 편인데, 부산과 노무현의 관계는 특별했다고 봐야겠군요.
“바닥에서는 좋아하는 정서도 꽤 있었지. 대통령으로서 바른 정치를 한다는 여론이….”
 
▼ 부산에서 변호사를 할 때 갈등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그런 것 없어. 변호사 자격정지될 때도 태연하더라고.”
 
1987년 8월 노무현 변호사는 대우조선 노사분규와 관련해 일시 구속됐다.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체부검과 임금투쟁을 돕다가 제3자 개입혐의로 구속되면서 변호사 업무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던 것.
 
당시 노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김광일 전 의원은 뒷날 정치노선을 달리했다. 김 전 의원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는 사이비 인권운동가, 위장서민, 지역감정 이용자로 대통령이 돼선 안 된다”고 비난해 눈길을 끌었다.
   
“노 변호사, 니는 국회의원 생각 없나”
김 전 의원 얘기가 나오자 송 신부가 일화를 들려줬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는데, 숨은 주역이 바로 송 신부였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나한테 전화했어. 부산 시민운동권에서 국회의원 후보 4명을 추천해달라고. 변호사 모임에서 내가 ‘국회의원 되고 싶은 사람’ 하자 김광일만 손 들더라고. ‘노 변호사, 니는 생각 없나’ 묻자 ‘저는 안 합니다. 지금 생활이 좋습니다’ 하는 거야. YS 쪽에서 한 사람 더 찾아달라고 해서 노 변호사를 일부러 만났지. 서울에서 활동하면 훨씬 더 효과적일 거라고 설득했지.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라고. 얼마 후 노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어. 출마는 하겠는데 선거운동하는 재미로 하려는 거지 당선될 생각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김광일은 중구에 추천하고 노무현은 남구에 추천했어. 당에서 그대로 발표했는데, 나중에 노 변호사가 나한테 찾아와 남구가 아니라 동구로 나가야겠다고 하는 거야. 안 바꿔지면 그만두겠다면서. 그래서 부랴부랴 최성묵 목사를 YS한테 보내 사정을 설명했지. 다행히 YS가 바꿔줘 동구에서 허삼수와 붙었지. 그런데 당선된 거야. 당시 감히 허삼수와 붙어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어. 그래서 정계에 나간 거지. 그게 나한테는 짐이 됐고. 이후 계속 떨어졌잖아. 변호사 잘하고 있는데 괜히 내보냈구나 싶더라고.”
 
▼ 부산에서 계속 낙선했는데, 출마를 말리진 않았나요.
“한 번도 말린 적 없어. 부산 강서에서 출마했을 때인가 자기 유세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더라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노’하고 거절하는데도 계속 권하는 거야. 가보니 시시하더라고. 촌놈들 보통 떠드는 것처럼. 다만 시민들에 대한 호소력은 있는 것 같더라고. 쉽게 얘기하니까.”
 
▼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보람을 느꼈겠습니다.
“애를 우물가에 보낸 것처럼 걱정되더라고.”
 
▼ 어떤 점이 걸렸나요.
“너무 함부로 얘기하는 것. 그런 게 늘 걸렸어. 결정은 마지막에 해야 하는데 이 양반은 늘 결정부터 해버리니. 설사 어떤 속셈을 갖고 있더라도 끝까지 숙고한 뒤에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성격이 아니었지. 경박함과는 다른데, 자신감이 지나쳤다고나 할까. 내치에선 실패한 게 많지만, 외교에서는 잘했다고 생각해. 미국에 우리가 뻣뻣할 순 없지. 그래도 할 말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해.”
 
시민단체들이 만든 통장 38개
▼ 대표적으로 욕먹은 분야 아닌가요. 자존심은 세웠는지 몰라도 실속은 없었다고.
“욕을 먹긴 했지. (전시)작전권 문제는 내가 옛날부터 주장했던 거야. 작전권도 없는 나라가 나라냐고. 그전에 평양과 얘기가 돼야 하는데…. 지금 가장 후퇴한 게 남북관계야. 완전히 단절됐잖아.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작전권 문제는 뒤집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남북관계를 이렇게까지 악화시키는 건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때 서글퍼. 이제 그만 얘기하자. 자꾸 쓸데없는 얘기만 하게 되네. 빨리 가!”
 
▼ 재산이 많던데.(그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초대위원장이던 2007년 신고한 재산액은 7억7000만원이다.)
“참 많아. 검찰에서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내 통장이 38개래. 다 시민단체들이 내 이름을 빌려 만든 통장이야. 그중 2억원이 어떻게 됐다는데, 검찰에서 부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어. 전화 온 적도 없고.”
 
▼ 대우건설 인수과정에 개입해 돈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대우건설에서 (부산)교구에 청소년회관을 지어준 적이 있어. 나하고는 상관없고. 대우건설 인수는 처음 듣는 얘기야.”
 
집밖으로 나오니 검푸른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다. 밤이슬과 꽃향기, 새소리에 심장이 한껏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한 남자가 자가용으로 읍내 가는 길에 삼랑진역까지 태워다줬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는 마지막 KTX를 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밀양역으로 향했다.
 
▲ 송기인신부

2부
인사동 사람향기
송 신부가 6월9일 모처럼 서울나들이를 한 것은 다음날 서울광장에서 열릴 6·10민주항쟁기념식에 초청받아서다. 그가 인사동에서 점심약속이 있다고 해서 식사 후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한낮의 인사동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의 뒤태가 여유로워 보였다. 인근 찻집에서 그와 재회(이런 표현을 쓰는 게 적당한지 모르지만)했다.
 
이날 만난 것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삼랑진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얘기만 나눠 아쉬움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의 은경축(사제서품 25주년) 및 회갑 기념문집인 ‘신부님이 거기 있었네’를 읽어봤다. 문인 교수 법조인 정치인 등 70여 명이 자신과 송 신부와의 인연을 소개한 이 책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는 데 도움이 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산 북구 구포동. 3형제 중 막내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신부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 12월. 부산중앙성당에서 ‘일어나 가자’라는 표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부산중앙성당 보좌신부이자 부산교구 학생담당 신부가 첫 보직이었다.
 
‘지 주교를 석방하라’
찻집에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송 신부가 대뜸 “물어봐” 하기에 신부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부터 물어봤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하고 싶어하지 않나. 이런 점에서 성직자가 다른 직업보다 낫다고 생각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성직자를 택한 거지, 거룩한 성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공부를 하면서, 이 길이 쉬운 길이 아니구나, 느꼈지. 자기 수련을 많이 해야겠다고.”
 
우리 나이로 33세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많이 늦은 편이다. 가정이 어려워 고등학교도 늦게 졸업한 데다 대학 재학 중 군에 갔다 왔기 때문이다. 공군에 사병으로 입대했는데 1년간 헌병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지금도 교통(신호)을 잘한다고” 하면서 수신호 시늉을 했다.(웃음)
 
1973년 부산전포성당 주임신부가 된 그는 이듬해 부산인권선교협의회를 만들었다. 내막은 이렇다.
 
“어느 날 심응섭 목사가 찾아왔어. 시국이 어수선하니 부산에서도 성직자모임을 만들자는 거야. 서울에는 성직자들이 결성한 반유신 모임이 몇 개 있었거든. 선배 신부를 찾아가 상의했더니 미적미적해. 그래서 우리끼리 하기로 하고 신부 2명과 목사 2명에 평신도 댓 명을 끌어들여 부산인권선교협의회를 만들었지. 심 목사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가 나한테 물려줬어. 그게 부산 반유신모임의 씨앗이야. 그해 7월 지학순 주교가 정보부에 구속된 사건이 있었어. 우리가 선교회를 만든 건 12월이고. 1975년 정월 성당에 현수막을 내걸었어. ‘지 주교를 석방하라.’ 이것이 부산 반유신운동의 효시야. 정보부가 경찰을 시켜 철거했지. 그 복사본이 현재 부산민주공원에 보존돼 있어.”
 
현수막 사건 이후 송 신부는 ‘문제 신부’로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정보부는 툭하면 그를 연행했다가 풀어주곤 했다.
 
“전두환 때 (안기부 직원들이) 내 방에 있던 책들을 가져가고는 불온서적 소유 포기각서를 쓰라고 요구한 적이 있어. 내가 끝내 안 쓰자 되돌려줬지. 그때 알았는데, 내가 그동안 경찰과 정보부, 검찰에 연행된 게 모두 48번이더라고. 그 사람들이 기록을 해둔 거야.”
 
1978년 한국앰네스티 부산지부장을 맡아 양심수 지원운동을 이끄는 그를 박정희 정권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압력을 받은 부산교구는 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삼랑진성당으로 보냈다. 부산 지역 대학생들과 격리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산대 교정 내에 있는 수녀원에서 매주 월·화요일 두 차례 미사 보는 걸 활용해 학생들과의 접촉을 유지했다.
 
▼ 당시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했나요.
“전체를 모르고 한 가지만 아는 외골수, 성격 독한 독재자로 여겼지.”
 
▼ 뒷날 박정희에 대한 평가 중 바뀐 부분은 없습니까.
“도덕적으로도 매우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됐지. 일본군 시절 그의 머릿속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어.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여순사건 때는 동료를 고발하고 살아남았지.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부패해서 혁명을 했다는 건 거짓말이야. 5·16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두 차례나 쿠데타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지. 유신만 안 했어도 국민이 참을 만했어. 유신 치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살아갈 만한 사회가 아니었어. 겪어보지 않아 그렇지, 숨도 크게 못 쉬었어.”
 
광주민주화운동 때 자금 전달
▼ 박정희의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기에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평도 있습니다.
“박정희 아니면 안 됐다는 데 동의할 수 없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정권이 바로 박정희가 엎은 2공화국이야.”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음모를 꾸미다 실패해 처형당했다. 당시 송 신부 주변에는 본 회퍼를 본 따 박정희를 죽이려고 생각한 성직자도 있었다.
 
▼ 성직자가 사람을 죽여도 되나요.
“안중근도 죽였잖아. 그도 독실한 신자였지.”
 
▼ 가톨릭에서 그런 게 허용되나요.
“허용되지는 않지만 묵인은 돼야 해.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수 있다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미 그렇게 말했어.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건 묵인돼야 한다고.”
 
이 말을 끝내고 그는 “그만하고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조금만 더 얘기하면 된다”고 주저앉혔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그는 삼랑진성당에서 시무하고 있었다.
 
“광주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외지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5월24일인가, 차에 신부 둘을 태우고 내가 운전해 광주로 향했지. 섬진강 다리를 건널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군인이 서 있기만 하고 막지는 않더라. 순천성당에 들어갔다가 ‘광주에서 시민들이 경상도 사람이라면 다 때려죽이고 차도 때려 부순다’는 얘기를 들었지. 광주에 들어가 가톨릭센터를 찾아갔어. 벽에 걸린 대형 그림이 찢어지고 난간이 총탄에 맞아 깨졌더라고. 관장 신부를 만났는데 이 양반이 정신이 멍한 거야. 그 신부가 자신 있게 말한 게 광주에서 질서가 지켜지고 있다는 거였어. 200만원인가 300만원인가 전달하고 돌아왔지.”
   
1981년 9월 부산지역 민주인사 22명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 터졌다. 송 신부는 옥에 갇힌 구속자를 면회해 위로하는 한편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을 국내외 인권·종교단체에 알렸다. 이때 이들을 무료 변론했던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노무현이었고, 이호철은 구속자 중 한 명이었다.
 
이듬해엔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도 송 신부는 교도소를 돌며 구속자들을 면회하고 격려했다. 1985년 부산당감성당 주임신부였던 그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우리가 만든 단체 중에 가장 잘됐다는 소릴 듣는 게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야. 거기서 훈련된 사람들이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부산국민운동본부(국본)를 주도했지. 당시 국본 집행위원장이 바로 노무현이었어. 민주시민협의회 이사였지.”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그는 한국에 없었다. 1986년 말 전두환 정권의 압력을 받은 부산교구의 결정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것. 명분은 신부 재교육이었다. 1987년 1월 보스턴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던 그는 전두환 정권이 끝난 이듬해 2월 귀국했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89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았고 1991년부터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부산본부 상임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엔 부산민주공원조성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역사적 유산으로 남기는 데 힘을 쏟았다. 2000년엔 민주화운동정신계승 부산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내 재산은 다 교구 것이야”
2005년 12월 그는 임기 2년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이력에서 유일한 정부 감투다. 그해 6월 그는 정년을 앞당겨 사목직에서 은퇴한 처지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무렵 그가 신고한 재산액은 7억7000만원이다.
 
내가 재산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자 그는 “고것밖에 안 돼?” 하면서 거꾸로 축소의혹(?)을 제기했다.
 
“양산 땅만 계산해도 그보다 많을 텐데. 가톨릭 정관에 신부는 부동산을 못 가지지. 내 재산 중에 토지가 많은데 다 교구 것이야. 과거사위원장 할 때 관계기관에서 세밀하게 조사했어.”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은 자동차가 유일하다고 밝혔다. 개인 통장은 하나인데 예금액이 150만원쯤 된다고 했다. 나는 “노무현 정권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편 가르기가 심했다”고 슬쩍 찔렀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잘하려다 그리 된 거지. 노무현의 생각은 다 잘살자는 거였어. 처진 사람들을 일으켜 괜찮게 살게 해주자. 그러려면 잘사는 사람에게 세금을 더 거둬야 했지. 현 정권은 가진 사람의 세금은 낮춰주고 없는 사람은 직장에서 쫓아내고 있어.”
 
내가 겪은 바로도 그렇지만 송 신부의 성격이 별나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1981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된 이호철씨는 1983년 시국사범 출소자 환영식 자리에서 송 신부와 첫 대면을 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송 신부한테 카드를 받은 인연이 있었다.
 
“송 신부님은 별로 친근하지도 않았고 연배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반말을 툭툭 하셨다.…내가 아는 한 신부님은 친절하며 아주 부드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특이하고 이상했다.…용건만 말해야지 주섬주섬 전후사정을 설명하면 말이 사정없이 잘리고 만다.”(‘신부님이 거기 있었네’)
 
1980년 7월 시국사범 수배자로 송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받았던 박계동 전 의원도 첫 만남이 불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니가 박계동이가? 정 신부한테 들었다.’ 이 한마디만 불쑥 내던지고 이내 잔디에 다시 눈길을 돌려 잡초 뽑는 일에만 신경을 쓰셨다.…‘아무 생각 말고 잠이나 푹 자는 기다.’ 어디다 숨겨주실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더군다나 주의 한 말씀 없었다. ‘푹 자는 기다’는 모든 것을 감당해주시겠다는 송 신부님 식의 표현이었다.”(‘신부님이 거기 있었네’)
 
송 신부는 칸트 뺨치는 시간 엄수로도 유명하다. 혼배미사 때 제 시각에 오지 못한 신랑신부 자리를 비워둔 채 그대로 진행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미사시간에 지각하는 신자는 아예 입장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저 여자 참 예쁘구나”
▼ 책(‘신부님이 거기 있었네’)에 보니 다들 신부님 성격을 좋지 않게 평하더라고요. 딱딱하고 정 없고 사람 무안하게 하고….
“못됐지. 거만하고 친절하지도 않고. 지금 보는 그대로야. 친절하게 하려면 한도 없이 길어져. 시간을 절약하려고 그러기도 해. 그러나 할머니들한테는 잘해. 할머니들이 나를 좋아해. 뭔 얘긴지 못 알아들으니.(웃음)”
 
▼ 독신으로 살아왔는데, 여자와 사랑에 빠진 적은 없나요.
“지금 그런 것 같아. 유혹을 당해.(웃음) 지금까지는 싸우느라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지. 정신없이 살았으니까. 지금은 어떤 사람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저 여자, 참 예쁘구나 하고.”
 
▼ 인간이 성욕을 누르고 사는 건 참 힘든 일 아닌가요.
“신학교 다닐 때 그런 훈련을 충분히 하지. 그래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지만.”
 
▼ 살아가면서 한 번도 사랑에 빠지지 못했다면 불행 아닙니까.
“비정상이지. 이제부터 해볼 생각이야.”
 
▼ 신부님 좋다고 쫓아다닌 여자는 없었나요.
“속으로는 모르지만, 나한테 전달된 건 없었어.”
그는 지금까지 650회가량 결혼식 주례를 섰다고 한다. 그가 즐겨 쓰는 주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임무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생텍쥐페리 ‘야간비행’)
 
그는 지난해 부산 국제신문에 연재한 ‘역사와 진실 앞에서’라는 글에서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욕심을 벗어던지고 가볍게 지내는 것은 아닐까”라고 늙음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내비쳤다.
 
그가 죽는 날까지 가볍기를 바란다. 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이 무겁게’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죽비가 되길 바란다.
   (끝)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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