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을 치룬 5일 영화 속에서 변종구가 경쟁후보인 양진주(라미란)와 벌이는 TV토론은 최근 열린 대선 후보들의 TV토론회와 포개지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정작 최민식은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누굴 선택할 지 결정했다”고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직업 때문인지 모든 게 관찰 대상입니다. 요즘 같이 정치나 정치인들이 회자되는 때에는 TV를 켜면 더 많이 나오잖아요. ‘저 사람들은 저런 게 있구나’ 하는 걸 습관처럼 관찰하고 습득하죠. 정치인들의 말에 집중하면, 말에 따라서 행동도 달라지더라고요. 눈을 보고 있으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한 눈에 알게 됩니다.”
선거가 끝났다. 선거만큼 매력적인 정치 이벤트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들이 공공연하게 충돌하고, 선거운동이라는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무대가 수시로 펼쳐진다.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므로 결말도 선명하다. 

영화 <특별시민>은 본격 선거영화다. 주인공 변종구는 서울 문래동 공장 노동자에서 변호사, 세 번의 국회의원과 두 번의 서울시장을 거쳐 이제 대권을 바라보는 지독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는 정치영화 주인공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 9단’이라는 수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닳을 만큼 닳았고 무섭도록 권력을 탐하며 때로는 끔찍하게 냉정하고 그럼에도 완전한 악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영화는 헌정사상 최초로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변종구의 선거 기록이다.

변종구 캠프 안팎으로 두 명의 주요 여성 인물이 있다. 캠프 외부의 인물은 경쟁 후보 양진주다. 양진주는 출마선언 기자회견장에서 일부러 허리를 깊이 숙여 가슴골을 노출시키고 ‘양진주 가슴’을 실시간 검색어에 올려놓는다. 건설사고 현장에 찾아가서는 피해자 가족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마음’을 강조한다. 여성 인권운동가 경력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서울시장 후보까지 올라온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려 한다. 양진주의 구태의연한 행보는 분명 아쉽지만 실제 여성 정치인들이 마주 싸워야 하는 편견과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 중반부, 변종구와 지지율 접전을 벌이던 양진주는 소신과 당선 사이에서 고민하며 묻는다.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정치하는 게 어떤 건지 알아?” 

= 서울시장 선거 이야기를 다룬 영화 <특별시민>에는 다양한 직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최초의 여성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정치인 양진주(라미란·왼쪽)가 유세현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가족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변종구는 공식적인 자리에 아내와 딸을 대동하고 나타나 가정적인 이미지를 챙긴다. 변종구의 아내와 딸에게서 개인으로의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변종구의 능력과 책임감을 증명하는 그의 부양가족이자 소유물로 존재할 뿐이다. 반면 여성에게는 가족의 존재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이 여성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문화에서 일하는 여성은 무능한 직업인과 나쁜 엄마 사이에 머물기 쉽다. 영화에 양진주의 남편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혼 문제가 또다시 거론될 수 있다”는 대사로 미루어 남편과 이혼했고, 그 이력이 그동안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해왔으리라는 짐작만 가능하다. 대신 양진주는 아들을 ‘정치 동지’로 소개한다. 그저 아들이 있기만 해서는 도움이 안된다. 그 아들이 미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훈남 변호사일 때 대중의 호감을 끌어올 수 있다. 

양진주는 자신의 선량한 직감을 믿는 사람이다. “이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며 아들을 선거운동에 끌어들이고, 사소하게는 시민들과의 사진촬영부터 크게는 후보 단일화까지 캠프 스태프의 조언을 듣지 않고 자신의 직감대로 움직인다. 그 결과 양진주는 번번이 변종구의 얄팍한 작전에 걸려든다. 지지율은 엎치락뒤치락 선전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녀의 성취가 아니라 변종구의 과실에 따른 반사이익이다. 

그렇다고 양진주가 무능하거나 부정부패를 일삼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 순진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선거는 똥물에서 진주를 꺼내는 것”이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캠프 내부의 주요 여성 인물은 박경이다. 영화는 변종구의 이야기지만, 화자는 변종구 캠프의 광고담당자 박경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거 캠프에 합류하게 된 스물여섯 살 사회초년생 여성. 박경은 정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정치판에 들어가고 싶고, 살아남아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자신이 뛰어든 그 세계가 무결하고 공정하다고 믿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도덕과 규율은 작동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하한선이 무너지는 순간 박경도 같이 무너진다. 박경은 계속 고민하고 생각과 태도를 발전시켜가는 인물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 인물들과 갈등 구도를 형성하며 영화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만든다. 

변종구 캠프에는 광고담당자 박경이 있고 양진주 캠프에는 임민선이 있다. 같은 역할을 하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두 후보의 경쟁만큼이나 두 광고담당자의 경쟁도 흥미롭다. 임민선이 노출전략을 통해 양진주를 화제인물로 만들면 박경은 가짜 동영상으로 이슈를 만든다. 임민선이 성실하고 우직하게 양진주의 TV 광고영상을 내면 박경은 그 광고를 뒤집어 공격하는 방식으로 변종구의 TV 광고영상을 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후보들에게 진심을 전하지만 수용되는 정도와 방식, 결과도 다르다. 박경과 임민선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면서도 긴장을 유지하는 관계다. 

박경과 정치부 기자 정제이는 조금 더 복잡한 사이다. 대학 선후배인 두 사람은 공적이면서 사적이고, 학연과 애정과 필요로 얽힌 인맥이다. 박경이 젊고 패기 있지만 미숙하다면 정제이는 능력 있고 노련하지만 진심을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고민과 조언을 나누는데 사실 그마저도 계산된 감정들이다. 정제이는 박경을 통해서 캠프 내부 사정을 알고 싶고, 박경은 중요한 정보를 정제이에게 슬쩍 흘려 기사화시킨다. 완전한 적도 아니고 완전한 동지도 아닌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감돈다. 무엇보다 박경과 정제이는 한국 정치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다. 사회생활 중에 우연히 만난 대학 선후배. 공적인 자리에서는 직함을 부르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는 사이. 남성 인물들로는 흔하지만 여성 인물들로는 있었던가. 유흥업소 종사자가 아닌 두 명의 여성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장면이라도 있었던가.

영화는 얼핏 변종구와 양진주의 대결로 보이지만 사실 변종구는 양진주와 싸우고 있지 않다. 싸움은 변종구의 선거 캠프 안에서, 정당 안에서, 정치와 언론과 자본과 폭력조직까지 얽힌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벌어진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명력 있게 그려진 변종구 캠프에 비해 양진주 캠프는 비중 자체가 크지 않고, 양진주라는 인물 역시 평면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에 머문다. 양진주뿐 아니다. 영화에는 다양한 직종과 성격의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좌절하고 실패하고 상처받은 채로 조용히 사라진다. 그래서 잊혀져버린 중요한 질문 하나,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정치하는 게 어떤 걸까?” 

현재 대한민국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7%, 여성 장관은 여성가족부 장관 한 명뿐이고, 광역단체장 중에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 변종구의 입장에서 이 선거가 헌정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을 목표로 하는 선거라면 양진주의 입장에서는 최초의 여성 광역단체장, 그것도 최초의 여성 서울시장을 목표로 하는 선거다. 하지만 양진주의 선거는 영화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현실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남성이 절대다수인 사회. 남성 중심의 조직 구성, 남성 중심의 가치관, 남성 중심의 문화. 그 안에서 여성들은 날마다 ‘최초’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선거가 끝났다. 이변은 없었다. 줄곧 지지율 1위이던 후보가 예상대로 당선됐고, 2, 3위와 3, 4위의 순위싸움이 오히려 치열했다. 유일한 여성후보의 남편은 전면에 나서 아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정치하는 아내를 뒷바라지하며 전업주부로 내조에 힘썼던 일화들을 자연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동안 남성 후보의 아내들에게서 무수히 들어왔던 이야기지만 성별이 바뀌니 새롭게 느껴졌다. 선거 막바지에는 한 후보의 딸이 거리유세 중 성희롱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공개된 자리, 수많은 캠프 관계자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뒤늦게 신고와 고소가 있었고 피의자는 경찰조사를 받았다. 

영화 <특별시민>과 현실을 번갈아 들여다보게 된다. 실제 대한민국 정치에서, 선거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과 비중으로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온라인뉴스 newsfreezon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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