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과 세월호 참사

[뉴스프리존= 안데레사기자] 추운 겨울을 지나는 동안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시민들은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의 정치는 시민의 정치였고 당당한 요구였다. 탄핵 찬반의 갈등도 깊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나왔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대규모 인파가 몰렸지만 평화로웠다.

  ‘304개의 우주’가 떠나간 지 3년이 지난 올 4월 세월호가 목포항으로 돌아왔다. 3년 전, 참사가 벌어진 뒤 유가족들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하루빨리 세월호를 인양하기 위해 ‘416가족협의회’를 구성했다. 416가족협의회는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부모, 교사들의 유가족과 일부 일반인 유가족들로 이뤄졌다. 박근혜 탄핵과 세월호 선체인양으로 큰 변화가 기다려지는 3주기를 앞두고 안산을 찾았다. 이곳에서 참사를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싸우는 416 가족협의회의 모습과 목소리를 담았다.

유가족과 시민이 지켜온 안산 합동분향소와 광화문 천막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3월 10일 오후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유가족들은 탄핵심판 직후 모두 서울로 올라갔고 유가족 대기실은 비어있었다. 지난 3년 동안 항상 가족들이 지키던 분향소 대기실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변화의 시작과 긴 기다림의 끝을 예고하듯 조용했다. 참사 후 3년이 지났지만 사진 속 희생자들은 3년 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영정사진 주위로 분향소를 찾은 이들의 방명록과 편지가 놓여있었고 세월호 참사를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SBS>)’의 장면들이 분향소 한 편을 채우고 있었다.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는 안산시의 협조와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2014년부터 유지됐다. 유가족들은 분향소가 마련될 무렵부터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3년을 견뎌왔다. 희생 학생들의 부모들은 반별로 조를 짜서 분향소 앞에 위치한 유가족 대기실과 ‘기억과 약속의 방’을 지켰다. 특히 기억과 약속의 방에서는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과 유가족들이 대화와 위로를 나누며 세월호 참사의 슬픔을 기억하고 진실규명이 되는 날까지 지속적 관심을 갖기로 약속해왔다. 유가족 대기실 뒤편에는 416희망목공소가 있었다. 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자녀를 잃은 다섯 분의 아버지들이 목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함께 나무를 만지고 작품을 만들며 마음을 추슬러 왔다. 이밖에도 극단, 합창단, 시작(詩作) 활동 등을 함께 하면서 유가족들은 아픔을 견딜힘을 얻었다. 저녁 즈음 만났던 2학년 6반 김동영 학생의 아버지 김재만 씨는 “심리적 안정과 치유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었다. 혼자 있으면 금방 무너져 버리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우리끼리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버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광화문 천막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사회단체, 시민 등이 모인 416연대와 416가족협의회 유가족들이 분향소와 전시관을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피켓을 두고 서명을 받는 진실마중대, 노란리본공작소, 천막카페가 있는데 이는 온전히 시민들의 참여와 기부로 유지됐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3년 동안 공작소에서는 천만 개가 넘는 리본이 만들어졌고 천막카페는 추모객들에게 목을 축일 공간이 됐다. 천막은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수백만 시민들의 서명이 모인 장소이기도 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보수단체 등의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이 필요로 할 때까지 광화문 천막을 지킬 수 있도록 서울시 공무원들과 시장이 안정적 기반을 만들어 줬다”라며 시민들 외에도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을 고마운 조력자로 꼽았다.
▲합동분향소 앞 416희망목공소 외벽에는 희생자에게 보내는 나무편지 여러 개가 매달려 있다. 

 

 건립이 미뤄지는 기억 공간들

 

세월호 참사 이후 사건을 돌아보기 위한 공간들이 여럿 기획됐다. 그 중 기자의 첫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안산의 임시 ‘416기억교실(기억교실)’이었다. 단원고에 있던 2학년 교실 10개와 선생님들의 교무실은 2016년 8월 안산시교육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됐다. 김동영 학생의 아버지 김재만 씨는 “교실이 옮겨질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다. 아이들이 공부하던 공간 그대로 기억을 남기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단원고등학교와 교육청이 단행한 기억교실 이전이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교육의 문제를 회피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따랐던 학생들의 모습은 학생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현행 교육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처럼 교육 변화의 필요성이 드러난 지금 그 계기를 상기시키는 기억교실을 함부로 이전해서는 안 됐다는 지적이다.

 

임시 기억교실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10개의 교실과 교무실 안 책상 위에는 기억교실을 찾은 유가족, 지인, 시민들이 남긴 선물과 편지, 메모가 놓여있었다. 교실 안 칠판에는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한마디들이 빼곡했다. 현재 반과 반 사이가 얇은 나무 판으로 구분된 임시 기억교실은 정식으로 ‘시민안전교육시설’을 건립한 후 그 내부에 복원될 계획이다. 단원고 인근으로 건립 예정지를 정해 사업이 추진됐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행정절차가 멈춘 상태다.

▲안산시교육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된 416기억교실의 내부 모습

 

416가족협의회는 또 다른 기억공간인 ‘416 안전 공원(가칭)’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안산시 안에 공원 형태로 만들어질 이 공간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봉안시설과 추모시설이 마련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2015년 9월 국무조정실에서는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안산시에 추모시설 부지를 마련해달라는 의견을 요청했다. 그 결과 2016년 7월 유가족, 시민단체, 건축조경 전문가, 국무조정실 등이 모여 ‘추모사업협의회’를 꾸리고 논의를 이어왔다. 하지만 7차례의 주민경청회와 토론회, 10차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확정된 내용은 없다. 일부 주민들이 분향소에 더해 봉안시설까지 생긴다면 시내의 공원을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기 어려워질 것이라 우려하며 시 외곽에 공원을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고민할 수 있는 곳이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원이 되도록 전문가와 논의 중이고 공원 건립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모두 공감하도록 설득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거리와 기억전시관에서 함께하는 기억투쟁

 

해가 져도 안산에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산시 상록수역, 중앙동 대동서적 앞, 선부동 동명상가 앞에서 단원고 학생들의 유가족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 6-8시에 피케팅과 서명운동을 해왔다. 금요일 저녁 6-8시는 3년 전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했던 시간이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대동서적 앞에는 피켓팅을 하거나 서명을 받는 시민과 유가족 대여섯 명이 있었다. 이날 서명운동에서는 ‘4.16 정신을 계승한 도시비전 수립 및 실천에 관한 기본조례’를 위한 주민발의 서명을 받았다. 이 조례는 생명, 안전, 인권 등의 ‘4.16 가치’에 기반해 안산시의 비전을 수립하고 희생자 추모, 사건의 진상조사, 공동체의 치유, 사건관련 교육 등을 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민발의 조례를 제정하기 위해선 2017년 3월 10일부터 6월 9일까지 안산시에 거주하는 성인 5,629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행인들에게 서명을 부탁하는 시민과 유가족의 목소리는 힘찼다.

 

안산에서는 이밖에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억저장소가 있다. 세월호 참사를 기록, 수집하고 보존하는 활동은 2014년 5월부터 안산시 시민기록위원회,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서울시 추모기록 자원봉사단에 의해 진행됐다. 이를 기반으로 2014년 8월에는 기억저장소 1호관이, 2015년 4월 2일에는 기억저장소 2호관이 개관했다. 기억저장소에는 단원고 학생들, 유가족과 시민들의 기록이 담겨 있는데 1호관은 기록물을 관리하는 사무공간으로, 2호관은 기록물을 전시하고 시민들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자는 서명운동이 진행되던 자리를 떠나 기억저장소 2호관으로 향했다. 시민과의 소통을 위해 마련한 기억저장소 2호관은 택시기사조차 위치를 알지 못할 정도로 찾아가기 어려운 장소였다. 지도를 보고 어렵게 찾아간 기억저장소는 단원고 근처 주택가의 상가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억교실 한 쪽 벽에 걸어둔 단원고 학생들의 달력은 여전히 2014년 4월에 머물러 있다.

기억저장소에서는 다양한 추모 활동과 전시를 진행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는 시낭송회가 있었다. 2016년 9월 23일부터 2017년 4월 14일까지 진행된 ‘금요일엔 함께 하렴’이란 이름의 시낭송회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희생자에 대한 기억시를 낭송하는 활동이 이뤄졌다. 기자가 방문한 3월 10일, 25번째 금요일 시낭송회에서는 20여 명이 모여 희생된 선생님들을 위한 기억시를 낭송했다. 선생님들을 위한 시를 낭송한 후 2학년 6반 이태민 학생의 어머니(416 기억저장소 운영위원)가 ‘어미의 말 - 세월호 넋들을 부르며’라는 시를 낭송했다. 어머니의 울음으로 숙연해졌던 장내가 이어진 연주자들의 노래와 연주에 다시금 웃음을 띠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눈물과 웃음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있었다.

 

기억저장소 2호관의 시낭송회는 끝났지만 추모와 기억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기억과 약속의 길’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기억저장소 2호관을 비롯해 기억교실, 단원고등학교와 합동분향소를 돌아보고 분향소 앞 ‘기억과 약속의 방’에서 416가족협의회 유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일정으로 구성돼 있다.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 살던 동네와 거닐던 골목, 학생들의 기록이 모인 전시관, 영정사진이 있는 분향소를 비롯해 부모들이 학생들을 기다리던 방에서는 말과 글에는 쉽게 담기지 않는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김재만 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와 그 다음해인 2015년까지는 시민 분들이 꽤 찾아주셨지만 그해 말부터 지금까지는 방문객이 점점 줄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다행히도 취재 이후 세월호 선체인양이 진행되며 다시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이 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체인양 이후의 본격적 진상 규명

 

기억과 추모만큼이나 416가족협의회가 힘써온 활동은 선체인양 추진이다. 미수습자들을 수습하고 진상규명을 진행하기 위해 가장 시급했던 선체인양은 3년간 해양수산부와 인양 업체인‘상하이샐비지’에 의해 계속해서 미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자마자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세월호 인양은 지난 11일 선체의 육상거치가 완료된 상태이다.

 

세월호 인양을 목표로 유가족들은 다방면의 투쟁을 이어왔다. 시민들의 기억에서 참사가 잊히는 것을 막으려는 기억투쟁보다도 힘든 일은 정부를 상대로 한 진실 규명 투쟁이었다. 가령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바탕이 되는 제도를 개선하며 피해자를 지원할 대책을 점검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던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설립된 지 1년 9개월 만에 해체됐다.

 

그러나 2017년부터는 진상 규명을 위한 조직들이 활발히 운영될 예정이다. 선체인양과 함께 지난 11일 ‘선체조사위원회’가 공식 활동을 시작했고, 내년 초 즈음에는 ‘2기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이전보다 강한 권한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416가족협의회와 시민들로 구성된 ‘국민조사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법적 기반이 있는 선체조사위원회와 2기 특조위와는 달리 국민조사위원회는 완전한 민간임의기구로서 기존 특조위 구성원과 전문가들, 유가족들과 수백 명의 시민위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체인양 이후의 수습 및 조사를 위한 방안을 조사하고, 국회에서 토론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이 활동은 일부 연구원이 아닌 국민 모두가 조사위원이 되어 함께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대책을 공부하는 과정이고 이는 올해 선체조사위원회와 내년 초 특조위 활동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면서 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뜨거워졌다. 가족들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 다시 분주하다. 인양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만난 유경근 집행위원장에게 인양 후를 상상하며 416가족협의회의 활동 방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 3년간 참사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을 이어왔다. 그는 “적어도 새로운 정부는 전 정부처럼 의도적조직적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면서도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전까지는 숨긴 것을 찾아내기 위해 맞서 싸우는 역할이었다면, 새 정부에서는 더 협조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김동영 학생의 아버지 김재만 씨에게는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물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달라고 당부하며 “세월호 참사의 원인, 그 이후의 정부와 정치권의 행동 등을 자세히 알아야 언제 어디서든 세월호 참사의 이야기를 설득시키고 공감하게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선체인양 이후 바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유경근 님과 김재만 씨의 답이 같았다. “사람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나라가 아닌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한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라는 416가족협의회 유가족들은 아직도 언제나 같은 곳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세월호 인양도 함께 기다린다
 

스토리펀딩 두 번째 이야기는 나무에 불도장을 찍는 목공방 목수 고충환 씨 얘기를 담았다. 그는 나무를 다루는 능력을 발휘해 나무고리를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만들어 무료배포한 것 만 해도 4만개를 넘는다고 한다. 부러진 나무, 자투리로 남은 나무에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쓰며, 그는 세월호를 기억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304명의 죽음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나 먼 인연이 닿은 사람까지 모두가 힘들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기억을 반복하는 동안, 누군가를 기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동안,그들의 슬픔은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다. 떠남이 아니라 잊혀지기에 이별의 슬픔이 더 크다는 말은 죽음 앞에서 더욱 그렇다.

 

스토리펀딩의 인연은 분명 새로운 만남이자 소중한 응원이다. 펀딩 참여자 들은 취재하고 기록하는 일에 박수를 보냈다. 동참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니 이미 그들은 벌써 동참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토리펀딩이 끝나고 한권의 책이 나오면 취재 대상으로 만났던 이나, 인터넷으로 만났던 이들이나 모두가 세월호라는 비극의 우산 아래 모이게 된다. 창작자들이 스토리펀딩을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스토리펀딩은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되는 4월 16일 마감한다. 펀딩은 끝이 나지만 세월호 진실규명과 인양을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sharp22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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