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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잘모르는 인물] 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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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잘모르는 인물] 김충선
  • 김현태
  • 승인 2017.06.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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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선 장군 영정
사무라이 출신,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시니 유키나가를 선봉장으로 하는 20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공했다. 왜군은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하고 신속하게 북상을 개시했다. 이때 가토의 휘하로 참전한 무장 사야가(沙也可)는 종군 7일 만에 자신이 지휘하는 3천 명의 조총부대를 이끌고 경상좌영의 병마사 박진에게 항복했다.

투항 직후부터 그는 조선군의 일원이 되어 어제의 전우였던 왜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왜군은 상주전투와 충주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쾌속 진군하여 5월 초순 한양을 점령하고 6월에는 평양성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해 7월부터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흔들리고 때맞춰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면서 파죽지세의 행보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때 사야가는 후방에 남아있던 왜군들을 공격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조명연합군의 평양 탈환에 이은 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왜군이 남하한 뒤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벌일 때 사야가는 조선군의 전력 향상을 목적으로 항왜 김계수와 김계충 등을 각 도와 진에 파견하여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보급했다.

선조는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에 따라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 하여 김해 김씨라는 성과 함께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아울러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까지 내렸다. 이는 당시 귀순한 항왜 중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かとうきよまさ · 加藤正)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하였으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통해 조선에 귀화하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적을 물리치며 누차 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나라를 위해 66세까지 전장에 나가 싸웠다. 선조에게 친히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까지 올라 그 공을 인정받았다.

김충선

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했다. 왜군들은 명나라로 가는 길이니 길을 내달라 했고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중화의 본가를 치겠다는데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응할 리 없었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とよとみひでよし · 豊臣秀吉)는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대륙 침략전쟁을 명했다. 동아시아 전체의 맹주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뎃포(てっぽう)'(중국에서는 '조총'이라고 부름) 신무기를 앞세운 3천여 명의 왜군은 거침없이 몰려들었고, 칼과 창을 내세운 조선군은 신무기를 당해낼 수 없어 부산진은 함락되었다. 침략자들의 선봉에는 조총부대의 대장, 사야가(沙也可)가 있었다. 그런데 부산진 함락 후 그 공포의 인물은 몇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후, 한 과묵한 장수의 명령 아래 이번에는 조선군이 조총을 들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왜군은 당황했다.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몰고나가 왜적이 점령한 18개 지역의 성을 탈환했다. 훗날 사람들은 말없이 조선군을 이끌던 장수, 베일에 싸였던 그 인물이 바로 홀연히 사라졌던 스물두 살, 일본의 사무라이 사야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이름이 김충선이라는 것 역시 밝혀졌다.

일본인 사야가, 그의 행적
당시 사야가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 사야가 가문도 일본에서 사라졌다. 그의 글이 실린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도 사야가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사야가의 과거를 복원하려 나섰다. 그 결과 두 인물로 좁혀졌다. 스즈키 마고이치 또는 하라다 노부타네, 이들은 임진왜란 출전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들이다.

김충선의 시문집 <모하당문집>. 1798년(정조 22) 6대손 한조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842년(헌종 8) 중간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스즈키 마고이치라는 주장은 사야가가 조총 전문가였다는 단서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쏘는 철포부대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와카야마(わかやま · 和歌山) 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부대가 전국적으로 위력을 떨쳤는데 그 조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초토화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히데요시의 지배에 반발하는 영주와 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이카 부대의 대장이 스즈키 마고이치, 바로 사야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출정 이후 행방불명됐다.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주장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인연이 드러난다. 일본의 전통가문인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강압적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인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예속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를 원수로 여겼을 것이고,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전쟁으로 보았다. 그리고 왜군들이 무고한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고 큰 회의를 느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사야가는 전쟁중에 본인의 목숨보다 부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늙은 부모를 등에 업고 도망치는 조선인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5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조선인 편에 선다.

조선에 귀화해서 싸우겠다는 적장의 편지를 받은 병마절도사 박진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사야가는 왜군들에게서 가져온 조총으로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관군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들을 끌어들여 부대를 새롭게 훈련시켰다. 초총의 사용법뿐 아니라 조총과 화약의 제조기술을 전수했다.

김충선이 쓰던 조총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듬해 조선군이 왜군의 조총을 모방해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일본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의 군사들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항왜(항복한 왜인)의 역할이 컸다. 김충선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40명이 넘는 항왜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평화를 선택한 왜장,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곳곳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일본군을 놀라게 했다. 경상도의 의병들과 힘을 합쳐 경주의 이견대 선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과거 자신을 지휘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군대를 섬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사야가가 있었다. 사야가가 이끄는 군사들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다.

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사야가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로운 이름은 '김충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는 의미를 담아 김씨 성을 주었고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였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 하여 충선(忠善)이라 하였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승정원일기>는 젊은 장수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담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공손하고 삼간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며 살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서른 살의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녹촌(오늘날의 대구 달성국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했다. 임진왜란 후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김충선은 1603년부터 10년 동안 자원하여 북방의 국경을 지켰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이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했던 항왜 자손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군사를 모아 후금의 군대에 맞서 적군 50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우의 대의도 끝났구나" 대성통곡하며 다시 녹촌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그에게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했다. 평안히 살라며 논밭도 내려주었지만 그는 백성 된 도리를 했을 뿐이라며 사양하고 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조선에 온 지 50년이 흐른 72세에, 제2의 고향인 조선땅에 묻혔다.

영웅과 역적 사이,  

인도주의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충선의 존재
조선인 김충선, 일본인 사야가. 두 이름은 모두 일본 역사에서 지워졌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야가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자 반역자, 매국노 였다. 일제 사학자들은 김충선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했다. 지워진 이름이 복원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김충선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에는 동시에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를 실었다. 2012년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옆에 '한일 우호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본 관광객이 대구에 가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녹동서원 한·일 우호관' 조감도 

조선에 귀화한 抗倭(항왜)장군 김충선 예를 들며 韓·日우호 강조한 日 자민당 총무회장
韓·日 관계개선은 정치인 책무, 어려워도 도전해야
日, 임란때 조선에 귀순한 장수 기념비 건립해 눈길
 
김충선, 더 몰랐던 이야기

조선시대 '항왜'들의 활약
김충선은 권율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 왜군의 목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군수품을 탈취해 왔으며, 더군다나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100여명을 귀순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조선 정부의 왜군에 대한 귀화 및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 같은 항왜들의 공훈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위에서 본 사야가의 언급내용이 기록된 11월 22일(기유)자에도 "항왜 손시로(孫時老)가 전투에서 역전하다가 탄환을 맞아 생명이 위태로우니 별도로 시상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왜적의 머리 12급과 빼앗은 잡물은 항왜들이 모두 스스로 가지고 올라가기를 원하므로, 요구대로 줘서 올려 보낸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어 항왜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참고=한국콘텐츠진흥원)

마음 속으론 슬픔 안고, 후손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묻어난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술회가·述懷歌)"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南風有感)…"

그같은 설움 탓에 오히려 후손에게 더더욱 고향 이야기를 삼갔을 거란 추측이 많다. 장남 경원(敬元)은 아버지 행장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지으셨다"고 적었다. 또 "형제 8인중 가장 끝이라 남들이 형제가 많음을 보면 눈물을 흘려 부러워하셨다"고 했다. 

김충선이 되고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떨치지 못한 그는 술회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국가에 불충(不忠)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하나뿐인가 하노라"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충선, 전 생(生)을 바친 호국(護國)

김충선, 후대의 이야기
후손 김상보 종친회장

"한반도에서 일본인 시조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것이다. 후손은 11개 파로 7500명쯤 된다. 김치열 전 내무장관도 우리 문중이다."

최보식 기자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에서 소개된 김상보(68) 종친회장은 김충선의 12세손이다. 한일 우호관 건립을 추진해왔던 김상보 씨는 "한일 양국이 이제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씻고 새로운 우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선조 김충선과 한일 우호관이라는 건물이 양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일본 입장에서 김충선은 '역적' '매국노'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는 질문에 "1997년 일본 NHK는 '출병에 대의(大義) 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무사의 의로운 결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 일본의 양심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 김충선은 특히 일본 쪽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어릴 때 '쪽발이 후손' 놀림 받았지만… 훌륭한 始祖에 대해 자부심 있어"
▲ 김충선의 무덤.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소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구시와 '모하당 기념사업회'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에 건립한 모하당 김충선 기념관인 충절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안쪽으로 김충선을 시조로 한 '사성(賜姓) 김씨' 집성촌이 있다. 마을 입구에 황금색 복고양이 상(像)과 함께 '한일우호관'이 서있다. 문을 연 지 4년이 됐다.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 일본 정계와 학계 인사들의 필수 방문코스다.

녹동서원

1789년(정조 13)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하였던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885년 다시 지었고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사당인 녹동사(鹿洞祠)와 향양문, 유적비, 신도비 등이 있으며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임진년 4월 왜장 사야가는 조선에 투항,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해 전쟁에 참가.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명을 받고, 경북 우록동에 뿌리를 내리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왜장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군졸 삼천과 함께 동래성으로 상륙. 그리고 다음날로 조선에 투항.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 했다. 그리고 곧장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전쟁에 참가. 조선 왕실에서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과 이름을 내림.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음. 주요 후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 자, 400년 전 전쟁에 반대하며 조국을 등졌던 청년 장수의 믿기지 않은 이야기.

대구에서 남쪽 달성군 가창면으로 가는 911번 도로. 경북 시민들이 즐겨 찾는 주말 휴양지로 가는 길이다. 수성못 오거리를 지나 달성군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자연공원이 있다. 팔조령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시원해 냉천자연원이라 부른다. 숲이 우거지고 절벽, 폭포 등 자연경관과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시설이 조화를 이룬 가족공원이다. 공원 위편에는 댐이 가둬놓은 호수가 있다.

선조가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라는 성명을 내려준 사야가 장군 집성촌은 냉천에서 8㎞ 들어간 우록동(友鹿洞)에 있다.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셨죠.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는 성리학적인 질서를 흠모하며 지었습니다. 조선에게는 대충신이요, 일본에게는 천하 반역자일게요.” 14세손 김재석(67)씨가 말했다.

투항한 사야가는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전했다.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김충선의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따르면 그는 “걸음이 나는 듯하고 수염이 멋있고 키크고 활동적”이었다. 그리고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전부다. 그가 일본에서 나올 때 갖고 있던 호적에는 아버지가 益(익), 조부가 沃國(옥국), 증조부가 ?(옥)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8형제의 막내요, 부인 2명을 두고 왔다고만 말했을 뿐, 가문 내력은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일본쪽에도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천하의 반역자,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았을 것이다.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천하의 매국노’가 그곳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한다.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사야가의 일본 후손을 찾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아직 확실한 소식은 없다. “찾았다”는 소식에 후손들이 직접 일본을 찾아갔지만 증거가 없다. 그렇게 일본의 흔적은 하얗게 사라졌다.

사라진 인물, 사야가.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배여 있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술회가·述懷歌)”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南風有感)….”

그래서 그는 슬프다. 그같은 설움 탓에 오히려 후손에게 더더욱 고향 이야기를 삼가지 않았을까. 장남 경원(敬元)은 아버지 행장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지으셨다”고 적었다. 또 “형제 8인중 가장 끝이라 남들이 형제가 많음을 보면 눈물을 흘려 부러워하셨다”고 했다. 김충선이 되고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떨치지 못한 그는 술회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국가에 불충(不忠)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하나뿐인가 하노라”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 우록동은 후손들이 일궈낸 논밭으로 온통 녹색이다. 서원 윗편으로는 김씨 문중이 개발을 금지하고 있다. 서원 옆에 기념관이 서 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아우르는 훌륭한 역사교육현장이다. 뒷산에 있는 장군 묘에는 무덤이 3기 있다. 하나는 장군, 하나는 그 부인. 오른쪽 끝 무덤은 뭔지 모른다. “분명 유품이 함께 부장돼 있으리라 싶은데 시조 묘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우록동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광복절인 지난 월요일,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일본관광객들이 띄엄띄엄 찾아왔다. 아직 50세대가 살고 있는 우록동에 올초 17대손 아기도 태어났다. 일본인의 후손? 아니다. “어릴 때 친구들이 ‘쪽발이’ 욕을 하다가도 나를 보곤 눈치를 살펴요. 그러면 그냥 하라고 하곤 했지요.” 김재석씨 회상이다. “일제 때 총독부 관리들이 탐문나온 적이 있습니다. 반역자의 후손이라고 채근하더군요. 큰 불이익은 없었어요.” 해마다 1000여 명씩 찾아오는 일본 방문객들이 단골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때문에 대대로 칭찬받고 살고 있다고 대답하죠. 그 분 아니었으면 나라 없어졌을지도 모르잖아요?” 세상, 어지럽고 복잡하고 갈등과 분열 가득한 세상. 400년 전 한 젊은이가 걸어간 길을 되짚어 보시길.

*우록동과 김충선에 관한 정보는 www.sayaga.net에서 볼 수 있습니다.

17대까지 이어진 샤야가 김충선의 후손들. 대구 우록동에는 그의 후손들이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김충선과 조총

1590년 일본국 사자 히라요시(平義智)가 선조에게 조총 한 대를 진상했지만 조정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2년 뒤 그 코웃음친 무기를 마구 쏴대는 왜군에 쫓겨 선조는 빗속에 파주땅으로 야반도주하는 운명이 됐다. 당시 조선군 무기체계는 어떠했나.

유명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창도 활도 칼도 아니었다. 바로 아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랐던 짱돌들이었다. 임란 초기 육전에서 조선군이 형편없이 패퇴를 거듭한 것은 바로 무기체계 차이 탓이었다. 돌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원시적인 무기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라는 첨단 살상기계는 애초부터 싸움이 안됐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조선 육군 손에 조총이 쥐어지며 육전 전세는 바뀌게 된다. 학계에서는 임란 이듬해(1593)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모하당문집에는 아래와 같은 편지가 들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하여 벌써 각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이다. 그래서 신식병기로 무장한 육군이 탄생해 임란은 물론 재란, 병자호란에 투입됐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는 1998년 한일 양국 교과서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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