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 선출, 자격, 제도 개혁改造해야... 부정不正 감지感知 못해 주체, 동력 상실. 계명대, 영남대, 대구대 등 진통. 경북대 70년사 불신不信 확산擴散.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손종남 선생님 사회로 ‘대학사와 대학개혁’ 주제로 열강을 하고 있는 주보돈 교수(경북대학교 명예) / ⓒ 문해청 기자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손종남 선생님 사회로 ‘대학사와 대학개혁’ 주제로 열강을 하고 있는 주보돈 교수(경북대학교 명예)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두목회(회장 송필경)는 최근 제55차 정기 강좌를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손종남 선생님 사회로 ‘대학사와 대학개혁’ 주제로 주보돈 교수(경북대학교 명예) 강의를 개최했다.

다음은 ‘대학사와 대학개혁’ 강의 전문이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은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로부터 학문(교육)의 自由와 自律이란 이념을 기본으로 현재 비중과 지향에 변화는 있으나 불변하다. 한국의 대학 약사와 경북대학교는 일제 시기 현재 대학의 일제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학제상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뿐이었다. 日本帝國이란 현실 정치에 절대 복종하고 복무하도록 유도한다. 해방 공간 속의 대학 설립은 해방 공간에서 대학 설립 운동으로 종합대학 출현했고 전문학교의 대학화. 국립종합대학 설립 반대 운동. 찬반 양론으로 1946년 9월 출범했다.

당시 특징은 이른바 종합대학은 모두 서울에만. 지방에서도 국립대학의 설립을 신청하였으나 모두 시설 미비 등 이유로 반려 됐고 당시 국립대학 운동 특징은 사실상 민간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지방 사립 단과대학 설립 이후 사립대학의 비중이 커진 이유로 당시 대구 지역은 일제 때 3개의 공립 전문학교가 있었고 각기 수준은 다르지만 해방 이후 1946년 각기 국(공)립의 전문학교로 전환했다.

현재 경북대의 紀年과 문제와 관련해 주목하며 한편 국립 종합대학 설립운동은 사실상 민립 중심의 국립 인 점이 특징이고 토지기증을 비롯한 기부 및 모금 운동 등이다. 경북대의 출범은 1951년 10월 종합대학 설립 인가 및 5개 단과대학이다. 단, 이때 기존의 3개 국(공)립 단과대학이 합쳐서 출발했고 2개만 신설했다.

1952년 5월 28일 정식 출범. 개교 기념식. 이후 1976년 5월 28일까지 24주년 행사를 진행. 1972년 20년사의 간행(1967년 15년사)했다. 그러다가 1977년 5월 28일 개교 31주년 기념식 행사. 바로 그날 행사장에서 『경북대학교 30년사』를 간행 배포. 본격적인 역사 왜곡의 출발. 총장의 치적을 과대 포장하는 계기. 이후 60년사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상이 이어졌다. 종합대학으로서 경북대학 설립이 가능하였던 것은 6.25전쟁과 1951년 4월에 시작한 戰時聯合大學 체제이다.

지방에도 종합대학이 필요하다는 인식 공유한 결과와 경북대학이 지방 국립대학으로서는 명실상부하게 전국 최초의 (國立 私立을 포함)종합대학으로 출발. 민립형 국립이다. 한국 대학의 현실을 보면 전국적 양적 성장은 엄청나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근본적 문제을 보면 대학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근본적 정신이 상실했다. 장차 대학은 어디로 갈 것인가? 과연 대학이 필요한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구의 대학은 어떠한 가? 대구의 대학 현실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국립과 사립 중 오랫동안 변함없는 사립이 문제이다. 그러나 국립대학의 역할 또한 문제이고 이제 대구는 대학의 도시, 학문과 교육의 도시란 외침이 공허하다. 경북대 70년사 편찬과 이후 편찬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 2016년 5월은 잘못된 개교 70년. 그 시점을 겨냥했다.

당시 총장 부재 사태와 직무대행 체제 및 70년사 간행 의뢰했다. 몇몇 두 개 조건을 내세워 수락했다.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와 ‘편찬위원 구성은 위원장 마음대로 하도록 당부했다’. 사실 그때 마음먹고 기존의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려는 생각을 했고 평소 대학사 간행 자체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그리고 종합대학의 역사를 단순히 단과대학사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근본적 수정하며 기본 체제의 혁신을 생각했다. 그해 11월 9인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정식 출범시켰다. 이후 총장 직무대행에게 대학사 편찬을 계기로 대학운영을 위한 자료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차후 총장 직할 아래 상설의 사료편찬실을 두어 100년사를 내다보는 기획이 긴요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한편, 대학 구성원들이(교수와 학생)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이념과 이상, 현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교양 필수과목으로서 ‘대학(사)이란 무엇인가’를 개설함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피력하며 위원들에게도 그런 생각을 전달했다.

대학사편찬에 관련한 행정 일체는 본부 기획처가 관장하고 당시 예산을 비롯한 사항 일체를 담은 기획 제안서를 보았다. 예산은 10년 전과 같이 1억. 그 중 편찬에는 4천 5백, 인쇄비는 5천 5백. 1천부. 원고 제출 마감은 2016년 8월이었다.

매주 특정 요일에 위원회 개최하고 전반의 서술 방향과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본적으로 述而不作의 자세. 자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문 잡지, 국가기록원, 본부 회의록, 대담 등. 만약을 대비해 따로 마련했다. 시간과 재원 부족의 아쉬움. 3년 정도 소요하면 완벽에 가까운 자료 수집 정리 가능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체제는 紀傳體 형식의 방향은 시기 구분의 기준 요소는 대학의 자유와 자율성을 압박에 대한 저항으로 그를 위해서 중앙정부 대학교육 정책 추진과 연동하는 방식이다. 크게 1987년 기점으로 전후 두 시기로 구분. 교수회와 총장직선제가 기준이 되었다.

그 당시 대학원장 직접 선거는 내용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쓰는 直書主義 원칙과 기존 대학사로부터는 사실 외에 가능하면 참고하지 않기로 했다. 크게 總論과 各論篇의 두 그룹. 학과 및 단과대학을 묶는 방식을 지양했다. 총론은 위원장이 맡고 각론 편은 8편으로 나누어 각 위원이 전담했다.

예정된 원고 마감일을 1달여 넘긴 10월 초 완성된 원고 제출로 1인이 원고를 제출하지 못해 다른 위원이 작성했다. 이때 3개의 원고와 문서 파일을 넘김. 본문편, 자료편, 사진편. 後2者는 본부에서 간행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10월 22일 새로운 총장이 임명되는 변화. 당시 본부와 교수회의 합의로 구성된 ‘총장 부재 사태 해결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몇 달 동안 70년사 간행과 관련한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7년 초 부총장이 만나기를 요청했고 이후 두 차례 더 만남지만 내용을 문제 삼고 나왔다.

2월에 부총장실에서 내용과 관련해서 견해의 차이로 한바탕 설전이 있었고 이후 본부 인사를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으며 본부에 출입한 적도 없다. 몇 달 뒤 본부에서 공문서를 보내왔다. 변호사 2인이 검토한 내용을 수정 요구했고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다고 적시했으며 위원회를 열어 받아들이기로 하고 위원 중 한 사람이 담당하여 고쳐서 송부했다.

이후 몇 달 뒤 다시 공문을 보내어 이제는 동일한 변호사 가운데 1인만의 견해를 첨부해 수정 요구했다. 이어 다른 위원이 검토해 수정한 원고 송부.(2018년 1월) 2018년 2월로 퇴직했다. 이후 대학사간행과 관련하여 퇴직 전에 경북대출판부에서 당연히 맡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한 도중에 100부 간행 움직임이 있었고 출판부에 원고와 함께 공문을 보내었다고 했다. 이에 문제를 제기하여 1000부 간행하기로 수정했다. 그런데 10월에 100부 간행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대학사를 집필자에게만 3부씩 배포했다.

그 당시 위원들 가운데 항의하고 확인했다. 그 결과 대학사를 교수회에 10부 배부했고 나머지 대학사 출판물은 아직까지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경북대 70년 대학사 말살사건 과정을 담담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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