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처럼 순할 것 같았던 을미년(乙未年)은 두 귀신으로 험악해지고 말았다. 늦봄이 채 끝나가기도 전에 메르스가 숨을 조여 오더니, 늦가을이 다 가도록 가뭄이 끝끝내 속을 태우고 있다. 이름난 몸 전문가와 최고의 물 관리자들이 안심도 시키고 긴장감도 주는 사이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鬼)가 늦봄의 향기를 앗아갔고, 가뭄을 불러오는 한발(旱魃)이 만추의 정취마저 삼켜버렸다. 두 귀신에 농락당하며 골병드는 사이에, 자연의 위력 앞에서 새삼 힘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처절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처구니없는 인간 처사에 막연히 품었었던 믿음마저 도려내며 치를 떨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통치자는 재앙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령, 제임스 프레이저의《황금가지》에도 실린 바 있는, 부여왕 마여(麻余)는 가뭄과 홍수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자연질서와 인간질서는 주술적으로도 혹은 도덕적으로도 상관된다고 여겼기에, 제왕은 늘 자연의 일탈과 재앙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무한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살을 에는 듯한 긴장 속에서 자신에게 모아지는 압박을 감내하면서 희망의 단초를 열어야만 했던 게 본디 재앙에 직면한 제왕의 처사였다. 제왕은 재앙을 일으킨 제일의 소이연(所以然)이요, 재앙을 넘어서는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그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질곡의 현장 한가운데에 늘 몸과 마음을 두어야만 했다. 우리가 불행을 겪을 때마다 청와대를 향해 원망(怨望)과 원망(願望)이 서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그 연장일는지 모른다.
 
  기회가 닿아 예의 두 재앙을 다룬 규장각 소장 기록물을 학생들과 더불어 읽게되었다. 가뭄이나 홍수에 대한 담론과 의례를 다루고 있는 《기우제등록(祈雨祭謄錄)》과 전염병에 대한 논의와 실천을 싣고 있는 《여제등록(祭謄錄)》이 그것이었다. 불행의 항목은 늘 상상을 초월했고 재앙은 홀로 오지 않았다. 가뭄과 돌림병에 한정하더라도 국정을 책임진 임금에게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가감 없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한 해에 시계를 맞춰보자. 1년 365일의 365배만큼의 과거, 즉 1650년으로 돌아가 두 책을 펴본다. 때는 효종 1년, 소현세자와 더불어 8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뒤, 갑작스레 맞이한 소현세자의 사망(1645)과 뒤이은 인조의 죽음(1649), 그리고 보위에 올라 비로소 자신만의 재임기를 시작한 31세의 초보자 왕에게는 모든 게 버거울 수밖에 없는 한 해였다.
 
▲《기우제등록》전 6책 모음.《기우제등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자료(奎12901)로서 인조 14년(1636)부터 고종 26년(1889)까지의 기우제, 기청제, 기설제 등의 기후의례와 관련된 다양한 담론과 실천을 총 6책 분량에 싣고 있는 예조의 기록물이다.
 
  1월 11일 황해도에 전염병(疫)이 돌아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2월 2일에는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약을 조제하여 보내게 할 정도였다. 또다시 3월 15일 서울 도성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동서활인서에 안치한 환자들에게 약물을 내려야 했다.《여제등록》은 12월 16일자의 기록에 평안감사가 보내온 도내의 전염병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평양, 자산, 함종, 삼화, 순안 등지에서 발생한 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한 가운데 급식과 구료는 물론, 볕 잘 드는 천변에 장막을 설치하여 환자를 분리시키고 무녀를 동원해 구료케 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조정에서도 향축(香祝)과 구료약을 현지로 보내 여제( 祭)와 치료를 병행하도록 독려하였다. 1년에 3회(청명일, 7월 15일, 10월 1일)에 걸쳐 무사귀신(無祀鬼神)에게 정기적인 여제를 거행하는 것이 공식적인 규례였지만, 각지에서 수시로 여역이 발생할 경우에 별여제(別祭)가 추가되기 마련인데, 평안도의 경우와 같이 여러 읍에 염병이 퍼지면 각읍의 중간 지대에 기양(祈穰)의 제장을 설치하고 여제를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이 전염병 지역에 내려준 별여제의 제문에는 자신의 부덕으로 인해 허물없는 백성이 괜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한탄어린 자성이 늘 중심을 차지하였다.
 
  5월부터 7월까진 가뭄으로 시달려야 했다.《 기우제등록》에 따르면, 5월부터 7월까지 6차에 걸쳐 기우제를 설행할 정도로 한발은 끈덕졌다. 물론 다급할 때 흔히 하는 방식대로 길일을 택하지 않고(不卜日) 서둘러 의식을 거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5월 18일 1차 기우제(삼각산, 목멱산, 한강, 풍운뇌우단, 우사단)와 5월 27일 2차 기우제(사직, 종묘, 북교)를 시행하였으나 만족스러운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시 달을 넘겨 6월 2일에 3차 기우제(풍운뇌우단, 우사단, 삼각산, 목멱산, 한강단)를 거행하였고, 특별히 한강단에서는 호랑이 머리를 침수시키는 침호두(沈虎頭) 의식을 곁들였다. 잠연한 부동의 용을 일으켜 비를 얻으려면 용호상박의 적대자인 호랑이로 용을 자극하는 것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가뭄이 극심한 때 메뚜기 피해(蝗災)가 더해지자 왕은 자신의 허물과 부덕을 자책하며 7월 1일 4차 기우제(양진, 덕진, 오관산, 감악산, 송악산)의 설행을 윤허한다. 이어 7월 4일 저자도, 용산강, 관악산 등에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5차 기우제를 거행하게 하고, 7월 5일엔 사직, 종묘, 북교 등처에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6차 기우제를 거행하도록 조처하였다. 정2품급의 중신이 파견된 5차와 재상급 대신이 파견된 6차 이후에도 효험이 없자 드디어 7월 10일 국왕 자신이 직접 거둥하는 사직의 친제(親祭)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사실 왕의 친제는 최고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마다않는 솔선수범이 될 수도 있었지만, 국왕의 의례에도 불구하고 만일 효과를 얻지 못 한다면 더 이상 격을 높여 의례를 거행할 수 없는 의례의 부재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종종 만류되기 일쑤였다. 그만큼 왕의 의례는 성패의 긴장감이 감도는 마지막 희망의 몸짓이었다. 다행히 친제를 거행한 이튿날 비가 내렸고, 영의정을 비롯한 동참 제관들에게 시상하며 지난한 한발귀신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 의례의 약발이 먹혀서가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한발의 고통이 나날이 누적될수록 비를 얻고야 말겠다는 정성과 인내가 질곡을 견디는 맷집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초에 시작된 극성스런 역병, 이내 찾아온 타들어가는 한발, 그리고 연말에 다시 시달려야 했던 염병 등으로 얼룩졌던 1년은 경험 없는 젊은 국왕이 감당키 어려운 혹독한 국정의 시험대였다. 그러나 아무리 무기력한들 맥없이 주저앉지 않고 분노가 치민다한들 무고한 희생양에게 헛되이 전가시키지 않았던, 참으로 꿋꿋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백성을 염려했던 젊은 국왕의 모습은 먼 후대의 노회한 위정자들보다 훨씬 침착해 보인다. 여름날 메르스 여귀가 일제히 떠나갔듯이, 이제 끈질긴 한발도 가을을 남기고 떠난 귀신이 되어주길 바라며 책을 덮는다.
 
▲ 최종성 교수(종교학과)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2004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학과장을 맡고 있다. 전공분야는 한국종교, 종교의례, 민속종교이다. 저서로는 Korean Popular Beliefs(2015),『역주 요승처경추안』(2013),『동학의 테오프락시』(2009), 『《기우제등록》과 기후의례』(2007),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2002) 등이 있고 역서로는 『국역 차충걸추안』 (2010),『국역 역적여환등추안』 (2010), 『세계종교사상사2』 (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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