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정을 느끼는 건 신의 장난질처럼 인간의 계획 밖의 일이다.

남이 나서서 잘 되기를 꾀하거나 도와주려고 하면 되레 어깃장을 놓는 속성까지 있는 것 같다.”

                           (박완서, <그 여자 네 집>, 『그 여자 네 집』, 문학동네, 2013년, 194쪽

박완서 단편소설집 '그여자 네 집' 표지
박완서 단편소설집 '그여자 네 집' 표지

청춘 남녀의 사랑이 '신의 장난질처럼 인간 밖의 일'이라니요? 사랑은 인간끼리 주고받는 더없이 고귀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을 둘러싸고 생기는 문제가 인간을 떠난 신의 영역이라는 건가요?

박완서의 단편소설 <그 여자 네 집>은 일제 강점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시대의 비극을 다룹니다. 작가의 고향인 황해도 개성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했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작품입니다.

곱단이와 만득이라는 청년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풋풋한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참 기구합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만득이가 일본군에 징병으로 끌려갑니다. 곱단이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수 없이 신의주에 산다는 어느 중년 남성의 재취로 마을을 떠납니다. 만득이는 해방 후 돌아와서 고향 마을에 사는 순애라는 처녀와 결혼해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곱단이와 만득이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랑하면서도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데 그치지 않고, 언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하는 곱단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장 결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재취 자리라도 마다할 수 없던 것은 분명 개인의 아픔이자 시대의 아픔이었습니다.

신이 곱단이와 만득이의 사랑을 질투한 건 아닐까요? 신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닐 텐데, 장난이라도 친 걸까요? 신의 장난이 불러온 결과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나라를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자 들이었습니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 남녀의 비극이자,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종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에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려고 합니다.)

흔히 사랑은 자기가 하는 건 줄 압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랑에는 상대가 있지요. 상대가 없다면 짝사랑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먼저 상대편을 끌어들여 내 맘 한구석에 주저앉히려고 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다만 내 욕심일 뿐인데,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편이 끌려오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서로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끌려오도록 하려는, 밀고 당기는 이른바 ‘밀당’을 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슬픈 이별’로 귀결 나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지요. 다행히 이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더라도 이를 잘 극복하면 서로 깊은 사랑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완성 단계로 가기는 쉽지 않지요.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를 떨쳐 버리는 게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나’를 고집할까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상대는 얼마 가지 않아 싫증을 내고 짜증을 내다가 성격을 탓하거나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그만 만나자’ 라거나, ‘헤어지자’ 하는 것이지요. 만약 이럴 때 누구에겐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떨까요? 잘 해결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국면에서 제삼자가 개입하면, 오히려 상대가 어깃장을 부리는 바람에 될 일도 망치게 된다는 것을 박완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설파합니다.

우리는 박완서 작가의 <그 여자 네 집>에 등장하는 곱단이와 만득이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바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어쩔 수 없이 겪었던 아픔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대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베르테르의 입을 빌려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신이 우리를 환상 속에 헤매도록 친절하게 내버려 둘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해진다.”

괴테의 여성 편력은 아주 유명하지요. 예를 들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샤로테와의 연정부터,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시의 주인공인 울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던 -괴테가 72세 때 17세인 레베초를 사랑해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던-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괴테는 한평생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며 살았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은 베르테르의 입을 빌려 한 말이기는 하지만, 괴테 역시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신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 속마음을 표현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남녀의 사랑에 신이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둘 때 가장 완전한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느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둘 만의 사랑에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요. 부모나 친한 친구라 해서 원하지 않는데도 끼어드는 것은 당연히 꺼리는 게 인지상정일 겁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죠? 사랑하고 사랑을 이루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사랑하면서 살다가 사랑을 다 이루고 생을 마치는 게 우리 네 인생 역정이 아닌가요? 우리에게 가장 큰 일이요 중요한 일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 혼자만의 생각과 판단보다는 부모나 친구의 조언이나 도움을 어느 정도는 허용하는 여지를 두거나 그런 아량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며, 나아가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춘 남녀의 사랑은 당사자들의 의지에 신의 뜻이 함께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복된 것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가수 노사연의 ‘만남’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첫 구절이지요.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우리의 만남은 서로의 ‘바람’이면서 또한 신의 섭리라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요?

박완서 작가는 그의 소설에서 말합니다. ‘치미는 욕심이란 늘 삼가는 마음보다 우세하기 마련’이라고. 사랑 앞에 치미는 욕심 때문에 망치지 않으려면 마음을 삼가야 합니다. 마음을 삼가려면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수련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절실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어디를 다니다가 멋진 광경을 만나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향과 맛이 뛰어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다가 상대방을 떠올리며 따뜻한 말 한마디 SNS로라도 주고받는 것, 기회를 만들어서 그곳을 함께 찾아가서 함께 누리는 것, 이런 것은 기본적인 사랑의 표현이고 상대를 배려하는 행위입니다.

아주 사소하지만 이런 것들을 게을리한다면 신은 당장 가혹한 장난을 걸어올지 모릅니다. 만일 신이 장난을 걸어온다면? 그럴 일이 없도록 늘 조신하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진행 중인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고 앞으로 이룰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나를 낮추고 죽이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기본이요, 신의 뜻이 당신께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왕도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 완성과 행복을 위하여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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