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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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영광
  • 김덕권
  • 승인 2019.10.2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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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영광

우리 앞에 시련이 닥쳐올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젊은 시절 저는 전 세계 원불교교당을 찾아 신앙과 수행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거의 안 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인지 모르지만 몇 년 전 그만 울릉도 둘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다리가 아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앓아온 당뇨병으로 인해 양쪽 다리의 동맥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즉각 시술(施術)을 받았습니다. 통증은 사라졌으나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재차 수술을 받아도 거의 걷지를 못합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일까요?

이제는 거의 다니지를 못하고 겨우 택시를 이용해 1주일에 한번 원불교 여의도교당으로 달려가 법회(法會)를 보는 것이 고작이지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 해답은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양(羊)을 사고파는 방식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양이 풀을 뜯으며 산비탈 위로 올라가면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내려갑니다. 위로 오르는 양은 목지(牧地)를 따라 넓은 산허리에 오르지만, 내려가는 양은 협곡바닥에서 굶어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 가지입니다. 인생의 험한 비탈길을 만났을 때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는 것이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길이 아닐까요?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유태 민족사에 큰 교훈이 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가고 있었지요. 날씨는 타는 듯 뜨거웠고 길은 지루하기 한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격려를 합니다. “아들아 용기를 내라. 우리의 선조들도 이 고난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 것이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때 그들의 눈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아요.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이다.” 이렇게 죽을 만한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은 무사히 그 사막을 지나갔습니다. 흔히 좌절해 버리기 쉬운 죽음의 상징인 무덤 앞에서 생명과 희망을 찾을 줄 아는 지혜를 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희망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교훈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유(香油)는 꽃이나 열매에서 뽑아낸 것이 아닙니다. 고래의 기름에서 뽑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건강한 고래가 아니라 병든 고래의 기름에서 더욱 향기로운 향료가 추출되는 것이지요. 우황(牛黃) 또한 마찬 가지입니다. 건강한 소에서 추출되는 것이 아니지요. 병든 소에서 우황이 나와서 우리에게 해열, 진정, 강심제 등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괴테가 ‘눈물을 흘리면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들은 대부분 고난을 통하여 대성(大成)한 인물들입니다. 음악가로 청각을 잃고도 이를 극복한 베토벤의 위대한 정신력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토벤처럼 시련을 극복하고 영광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하면 언제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주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를 좁다고 뛰어다녀도 멀쩡하던 제 다리가 이렇게 고통이 찾아온 연유(緣由)는 무엇일까요? 그것도 어떤 뜻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온갖 즐거움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같이 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덕화만발>이라는 글을 써 전 세계로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까지 이 메마른 세상에 이처럼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이 글을 쓰다 떠날 수 있으면 바로 그것이 진리께서 제게 부여한 사명(使命)이라 굳게 믿어봅니다.

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으면 영단(靈丹)이 모입니다. 꾸준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또 하면 심력(心力)이 쌓입니다. 그러면 매사에 자재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면 제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떠날 수 있지 않을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10월 2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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