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 신용하·'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누가 진실인가
'일제 토지조사사업.. 한국인들의 저항 막기 위해 실제로 학살 자행 사례 나와'

우리 국민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분노하는 이유 중 하나는 1910년대 토지 수탈과 관련이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명분으로 전체 토지의 40% 이상을 수탈했다는 사실에 일제에 대한 반감은 뼈속까지 박혀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수탈기지 군산항에 쌀가마니가 수북히 쌓여있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수탈기지 군산항에 쌀가마니가 수북히 쌓여있다. 자료사진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되고 혜택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40% 이상 수탈설'에 반박하면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토지 수탈은 없었고 일제의 토지조사는 농지 정비로 인한 근대화에 다가섰다고 주장한다.

한해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반일 종족주의' 논쟁이 일제 토지조사사업으로 옮겨붙었다. 신용하(82)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펴낸 그의 저서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에서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인 이영훈 (68)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신용하 명예교수는 "이영훈을 비롯한 일부 뉴라이트 경제사학도들은 일본 제국주의와군국주의자들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강점 수탈을 옹호하고 미화하기 위해 일제 식민지 정책 수탈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필자의 연구를 고의적으로 중상하고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쟁은 지난 7월 이영훈 전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에서 신 교수를 실명으로 비판하면서 점화됐다. 두 학자는 '엉터리 학설'이나 '패륜적 행위'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상대를 비판했다.

이 전 교수는 당시 "신용하라는 학자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일선 군청이나 법원에 있는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를 열람한 적이 없다"며 "심지어 그 일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했다"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각각 한국 사회사와 한국 경제사 분야의 대표적 학자로 꼽힌다. 신 교수의 입장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근대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강압에 의한 수탈에 다름없는 '수탈론'이고 이 전 교수는 일제가 한국인에 내세우는 주입 사관과 동일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번 논쟁도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신 교수는 1918년 말 기준으로 총독부가 농경지 27만 정보(町步), 임야 955만 정보, 기타 국유지 137만 정보 등 국토 총면적의 50.4%(1120만 정보)를 수탈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 국토의 50.4%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의 토지를 어떠한 대가 지불도 없이 식민지 통치 권력으로 약탈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이 전 교수는 "(1960년대 교과서에 기술된 것처럼) 토지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는 학설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비난했다.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부 토지의 소유권 분쟁이 있었지만 "전국 487만㏊ 가운데 12만㏊에 불과한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이었다"는 것이 이 전 교수의 입장이다.

이들의 문제 제기는 반일 종족주의 제2장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편에서 나타난다. 제2장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를 이영훈 전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전 교수는 "1982년 신용하 교수가 '조선토지조사사업 연구'라는 책을 썼다. 신용하는 국유지 분쟁에 관해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란 말을 지어냈다. 지금 이 글의 제목이 거기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 말의 뜻은 어느 민간인이 총독부를 상대로 해당 토지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면 총독부는 피스톨로 그것을 제압했다는 거다.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을 피스톨이 발사되는 폭력적 과정으로 묘사했다"고 했다.

결론은 이영훈 전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며 신용하 서울대 교수 등이 제기한 일제의 '40% 이상 수탈설'을 부정한다. 그는 근거가 전혀 없는 엉터리라며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그러면서 "어느 연구자도 이 40%라는 수치를 증명한 적이 없다. 검인정이나 국정이나 교과서를 쓴 역사학자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수치"라며 "어느 정도의 수탈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했기에 지어낸 수치에 불과하다. 최초의 누군가가 그 수치를 지어냈는데, 그 다음 사람이 그것을 인용하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의 진실이 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영훈 전 교수의 일제의 토지 수탈과 강압과 폭력이 없었다는 주장은 입증된 역사적 사례가 나오면서 오히려 수세에 몰리는 꼴이 됐다.

임호민 가톨릭관동대 교수의 논문 '삼척군 원덕면 일대 임야측량 사건과 산림자원의 약탈'에도 그런 실상이 소개돼 있다.

이 논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삼척군 역사서인 <삼척군지>를 토대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소개하고 있다. 1913년 4월 삼척군 주민들이 토지조사에 불만을 품고 화장(花藏)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측량기수를 살해하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진압 작전을 벌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란 국치를 당한 한민족의 일제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이 폭발될 찰나에, 삼척군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을 구분하기 위해 경계 측량을 하는데 울창한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임원리 김치경 지휘로 원덕면민이 궐기하여 재측량을 요구하며 수일간 시위를 벌였다"

"당시 면장 김동호가 일본인 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하기 위하여 임원에 왔는데, 이때 임원 뒷산에서 사진 촬영자를 발견하고 군중이 일시에 격분하여 당시 천여 명이 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화장을 죽였다. 일인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니 군중은 해산되고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 역사문화학회가 2016년 발행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9권 제1호.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명분으로 사유림을 국유림으로 편입시키자 한국인들이 집단 대항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을 다룬 또 다른 논문인 전영길·이성익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일제의 토지수탈 사례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발포로 한국인 3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이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를 겪음.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이락서·김문식·김평서 등 70여 명을 끌고가 옥고를 치르게 했는데, 함흥형무소에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이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함에 따라,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만 남게 되었음." - 한국지적정보학회가 2017년 발행한 <한국지적정보학회지> 제19권 제3호.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일제는 실제로 학살을 자행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영훈 전 교수는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의 학설을 엉터리라하며 일제의 수탈은 없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위원 등과 함께 '이승만 학당'을 비롯한 강연 등에서 상대에 주입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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