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제공
[뉴스프리존=안데레사기자]'옥자'의 주인공은 일단 소년일 수도 있었지만 소녀였다. 영화는 슈퍼돼지 옥자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슈퍼소녀 미자의 이야기이다. 평화롭던 미자가 일생에 한 번 경험하는 거대한 사건이 스토리로 펼쳐지는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곰곰이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은 분명 변화 또는 진화를 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봉 감독은 상해버렸다. 전자 입장에서 (<설국열차> 때도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옥자>는 할리우드 영화의 보편성으로 접근했을 때 놀라운 작품으로 다가온다. 후자는 <살인의 추억> <마더> 시절의 감독으로 봉준호를 받아들였을 때 도출되는 결과다. 

봉준호 감독은 이에 대해 "사실 저는 소년보다 소녀가 강인했을 때 주는 아름다움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여드름이 잔뜩 난 소년보다 소녀가 더 아름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시작했다"라고 심플했던 시작에 대해 전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옥자>를 명확한 할리우드 작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봉준호 감독은 엄청난 진화를 한 것이다. 한국에서 만든 그의 영화들에는 사회적 통찰 또는 정치적 견해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살인의 추억>이 탐정 스릴러 장르에 1980년대 시대상을 반영했고, <마더>는 보편적 모성애에 한국의 특별한 정서를 덧붙였다. <괴물> 역시 그랬다. 한국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낸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영화 속 미자는 할리우드로 따지면 여성 슈퍼히어로라고 할 만 하다. 워낙 산에서 자랐기에 몸이 단련됐는데, 초반 이런 미자의 운동 감각을 절벽 위에 떨어질 뻔하는 위험한 상황으로 표현한다. 달리는 트럭 지붕 위에서 날렵하게 장애물을 피하기도 하고, 옥자를 싣고 달리는 자동차 뒤를 힘차게 쫓는다. 마치 히어로가 자신의 슈퍼카를 타듯 날뛰는 옥자의 몸에 가볍게 업히기도 한다. 전부 판타지 영화의 판타스틱한 무기나 기술이 없이 '맨 주먹'으로 해내는 것이다.  봉준호의 이러한 한국적 정서는 범인류적 담론과 교묘하게 맞물리는 지점을 생성했다. 되려 (원작의 내러티브가 너무 명징했던)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서 돌연변이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험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제작 시스템을 섞고 테스트했으니 말이다. 이제 그가 완전한 할리우드 ‘감독’으로, 그러니까 봉준호가 아닌 ‘Bong Joonho’라는 ‘디렉터’로 탈바꿈한 영화가 바로 <옥자>다. 이 같은 이유로 봉준호는 <옥자>를 조금 더 대중적이고, 조금 더 보편적이며, 조금 더 상업적인 영화로 만들어냈다. 

관객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기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자를 구하러 미국으로 향한 미자가 선한 편인 비밀보호단체 ALF와 손잡고, 악한 대기업 미란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이야기로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기에서 틀린 반쪽의 후자가 전면에 부각된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봉준호는 전작들에서 단 한번도 절대적 악을 구축하거나 형상화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옥자>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만들어내고 동물에게 극악무도한 실험을 하는 기업 미란도조차 당위성이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동물보호단체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옥자 구하기에 뛰어든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선이 아니다. 심지어 영화 속에 드러난 미자의 행위조차 (순수함 이면에 가려져 있는) 개인적 이기심으로 읽힐 수도 있다. 
▲ 넷플릭스제공
이런 미자가 바라는 것이 '거대한' 평화는 아니다. 단지 사랑하는 미자를 다시 찾는 것. 옥자를 찾는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그가 해내는 여정은 어마어마하다. 미란도 코퍼레이션 한국 지부의 단단한 유리문으로 달려가 온 몸을 부딪히며 유리를 깨는 모습에서는 액션스타로서의 박력도 넘친다.

미자는 한 마디로 '센 캐'이다. 할아버지와 둘이 살아 온 그는 고분고분한 소녀는 아니다. 할아버지가 옥자를 미란도 코퍼레이션에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을 가기 위해 저금통을 와장창 부수는 모습이나 슈퍼돼지 페스티벌을 앞두고 마주한 미란다 코퍼레이션 직원에게 주눅들지 않는 모습 등은 인상적이다.

더불어 영리하다. 그가 마지막에 옥자를 되찾는 방법은 하나의 반전으로 '산골소녀 미자'의 편견을 깬다. 영어란 언어의 장벽 역시 미자에게 넘지 못할 한계가 아니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옥자>는 각자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적 보편성 속에서 반려동물을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미자의 옥자’에 대한 내러티브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봉준호 특유의 페이소스는 전부 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놓치지 않는 봉준호만의 그것이다. 또 이 같은 정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은 자신의 전작에서 최고의 장면들이라 꼽을 만한 신들을 다시금 등장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플란다스의 개>의 저돌적 뜀박질, <살인의 추억>의 블랙 코미디, <괴물>의 혼란스러웠던 한강변 대피 신 등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가 배두나, 송강호, 김뢰하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이크 질렌할, 틸다 스윈턴, 스티븐 연, 폴 다노 등 어지간하면 전 세계 관객이 알 만한 이들이 그걸 해낸다. <옥자>는 한국과 미국의 공간적 이질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완전히 다른 공간을 내러티브 속 필수 공간으로 완벽하게 봉합해낸다. 각설하고 미자의 옥자를 구출하기 위해 서울에서 뉴욕까지 동분서주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근사한 조합 덕에 <옥자>는 봉준호를 한 번 더 도약시켰다. 봉준호의 차기작은 다시 한국 영화일 가능성이 크다. 이 <옥자> 덕에 나는 진화한 봉준호의 다음 영화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릴 셈이다. 더불어 악역으로 등장한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도 미자처럼 여성이란 면에서 주목되는데 봉준호 감독은 애초 여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등의 어떤 사명을 갖고 쓴 게 아니라서 어쩌면 더 의미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자, 옥자, 미란다가 모두 여성이지만 제가 일부러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엮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옥자와 미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빌런으로 틸다 스윈튼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는 성별이 중요했던 게 아니라고 전했다. 그는 “틸다가 반대편의 여성 CEO로 그려지는데, 시나리오 구상할 때부터 틸다로 상정하고 쓴 것이라 중년 남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국적 기업과 (옥자를 생산하는) 창조주로 틸다가 있는 것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앞서 봉준호 감독은 영화 '플란더스의 개', '괴물' 등에서 강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인 바 있는데, 미자는 좀 더 어려지고 전면적으로 주인공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 ‘옥자’를 보면 좋을 관객
① 애완동물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거나 채식주의를 선호하는 관객.
② 우리가 먹는 고기들이 다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 한 적이 있는 호기심 많은 관객.
③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 스티브 연이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관객.
④ 평소 자본주의에 대한 커다란 환상, 혹은 불신을 갖고 있던 관객.
⑤ 돈만 받으면 회사의 일 따위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는 20대 비정규직 관객.
⑥ 굳이 양갱을 먹으면서 ‘설국열차’를 감상했던 간 큰 관객.(이번엔 소시지!)

sharp22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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