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의 화가 김홍도’ 펴낸 전기작가 이충렬씨
"굶주리고 병들어 먹을 것을 위해서 여기(전주)에 와 있다" 말년 기록 찾아내

겸재 정선과 더불어 조선후기 회화사를 대표하는 단원 김홍도(1745~1806?). 우리가 그에대해 아는 것은 정조의 총애를 받아 삶이 비교적 윤택했으리란 짐작뿐이다. 하지만 신분사회의 한계속에서 자식의 학비걱정을 했어야 할 정도로 말년이 궁색했다는 사실은 의외다. ‘거장’이라는 그늘에 가려진 이면은 들여다 본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실체를 들여다 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천년의 화가 김홍도' 를 펴낸 이충렬작가

전기작가 이충렬의 신간 '천년의 화가 김홍도' (메디치)는 가난한 바닷가 마을 소년이 임금을 그리는 어용화사가 되고 조선의 새로운 경지라는 찬사를 듣는 화원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러나 생의 마지막조차 기록되지 않을 만큼 쓸쓸이 삶을 마감한 중인출신 화가가 겪었을 파란만장한 60년 삶의 여정을 기록의 파편속에서 건져올리고 있다.

“단원은 단순히 조선시대 미술의 폭만 넓힌 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에는 그림의 격을 높이는 예술적 성취가 있었다. 신분제도에 갇혀 있던 평민의 삶을 화폭 안으로 불러들였고, 우리의 산천을 그릴 때에도 그 안에 인간의 마음을 담았다. 유럽 르네상스 이전 화가들이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탐구와 묘사를 했듯이, 김홍도가 추구했던 그림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에는 당대의 다양한 삶과 인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조선시대 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후대의 많은 화가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김홍도는 임금이나 왕실의 명에 따라 중국 화보에 바탕을 둔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 화원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자화상의 모범을 보인 공재 윤두서, ‘시서화 삼절’이라 불렸던 표암 강세황, 중국의 남종화를 조선 남종화로 재창조한 현재 심사정처럼 자신의 의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양반 사대부 화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화보나 왕실 기록화를 잘 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 핏속에 흐르는 천부적 재능이 그의 손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김홍도는 시대와 인간의 모습을 쉬지 않고 화폭에 담아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이었고,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위해 예술혼을 불태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성취였다. 조선시대 화가 중 이만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화가는 많지 않다.”

그는 김홍도의 그림을 볼수록 ‘그는 어떤 화가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동안 나온 책과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의 삶에는 알려진 부분보다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 어쩌면 김홍도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알려지지 않은 삶 속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도의 전기를 쓰게 된 동기다.

“화가의 삶을 정확히 알면 그림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는 믿음도 그의 삶을 추적하고 싶다는 생각을 부추겼다. 전기는 주인공의 삶의 행적을 따라갈 뿐, 평전처럼 주인공의 삶이나 남긴 업적은 평가하지 않는다. 전기에서 삶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전기작가는 독자들이 평가 할 수 있도록 삶의 행적을 하나의 행로로 만들어야 한다. 빈 공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인공이 남긴 것뿐 아니라 남기지 않은 것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했다.”

 사실 김홍도가 남긴 기록은 편지 몇 통 외에는 없다. 글보다 그림을 가까이하는 도화서 화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기록에 충실했던 강세황이라는 사대부 스승이 있었다. 탁월한 그림 실력 덕분에 양반 사대부들과도 교유했고, 그들 중 일부가 김홍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어용화사였고 벼슬생활을 한 덕분에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과 같은 조선시대 국가기록물에서도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김홍도는 국가 기록과 양반을 통해 삶이 기록된 중인이었다. 매우 특이한 경우다.김홍도와 연결되는 당대의 자료와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그의 삶이 평탄하지 않고 파란만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삶의 마지막은 가슴 아프기까지 하다. 1805년  음력 12월 30일, 전라도 관찰사 심상규는 한양에 있는 벗 예조판서 서용보에게 편지를 보냈다. 화사 김홍도가 굶주리고 병들어 먹을 것을 위해서 여기(전주)에 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원 생애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 심상규의 편지가 과장이 아니라는 건 김홍도가 한 달 전인 12월 9일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도 알 수 있다. 선생님께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탄식한다는 내용이다.

“초서로 쓴 편지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힘에 부쳐 쓴 글씨라는 표시가 역력하다. 김홍도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필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번 김홍도 전기에서 기존의 연구에서 확인하지 못했거나 오류가 있었던 부분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김홍도의 아호인 ‘단원’, ‘단구’, ‘서호’에 대한 새로운 사료들을 찾아 과정에서 그의 출생지를 안산 성포리로 추정했다.

“김홍도가 자신의 호(號)를 단원(檀園)이라고 한 이유는 성포리 뒷산 노적봉기슭에서 스승 강세황이 여주 이씨 문중 사람들과 시회를 했던 박달나무 숲이 `단원’ 이었기 때문이다. 단구는 단원 부근에 있던 언덕이다. 단원이 처음으로 지은 호 서호(西湖)는  안산에 살았던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시에서 유추할 수 있다. 동네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호를 바라보니 아득하더라"고 읊었다. 서호가 안산 앞바다를 가르키는 결정적 근거다.”

서호를 바라보는 동네는 현재 단원미술관이 있는 안산시 성포동이다. 단원의 그림에서 대장간 풍경이나 말 징 박는 모습이 등장하는 이유도 알게 됐다.

“울산목장의 감목관으로 재직했다는 사실을 미번역본 ‘승정원일기’로 알 수 있었다. 목장에서의 생활이 그의 그림 소재가 된 것이다.”

중인 신분의 단원은 양반 주류사회의 학식에 미치지 못해 수모도 당했다. 영조 어진(御眞)을 그린 공로로 1773년  궁중의 고기·소금 등을 관장하는 자리에 처음 올랐지만 넉 달 만에 파직되는 치욕을 겪었다. 사서삼경 중 두 책을 읽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책을 논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년 이후 단원을 괴롭힌 천식은 1781년 한겨울 한강 얼음을 채취·보존하는 동빙고 관직에 올랐을 때 걸렸다는 사실도 새롭다. 게다가 별제라는 품직으로 녹봉(월급)을 받지 못하는 ‘무록직(無祿職)’이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책을 쓰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료의 연구가 중요함을 절감했다. 예를 들어 강세황이 성호 이익의 조카들과 단원에 모여 읊었던 시를 모은 시집 ‘단원아집’표지에 찍힌 '성고'는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비로서 지금의 성포동(성포리)을 가리키는 옛 이름임을 알수 있었다.”

이충렬 전기작가는 그동안 ‘간송 전형필’,‘혜곡 최순우 ’‘김수환 추기경’,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등을 썼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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