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베트' 포스터 /(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자베트' 포스터 /(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일상에 문득 찾아온 신비한 까마귀 이야기를 ‘프로젝트 내친김에’만의 색깔로 덧입혀, 기묘하고 환상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 연극 <자베트>가 지난 9일부터 19일까지 대학로 혜화동 1번지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배우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움직임과 세심한 사운드로 동화 같은 환상의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했다.

라이스키르헨의 교사 테레제 바이징어는 수업 중 웅성거리는 아이들에게 이유를 묻던 중, 엘리자베트가 사람처럼 말할 수 있는 까마귀가 있다고 말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엘리자베트의 집을 방문한 테레제는 아이의 엄마를 만나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후, 알 수 없는 존재를 조우하고...그만 기절하고 만다.

“사람처럼 말을 하는 사람만큼 커다란 까마귀, 자베트”

엄마와 엘리자베트는 테레제에게 자베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자베트와 만나게 된 테레제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답변만을 듣게 된다.

“자베트가 사라졌다.”

죽은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날아간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자베트가.

라이스키르헨의 교사 테레제 바이징어 역 최희진 배우 | 아이의 동심을 이해하고, 미지의 세계를 알려하며, 포용과 이해가 가득한 애정이 가득하다.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라이스키르헨의 교사 테레제 바이징어 역 최희진 배우 | 아이의 동심을 이해하고, 미지의 세계를 알려하며, 포용과 이해가 가득한 애정이 가득하다.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엄마 역 이미숙 배우 | 엄마에게 자베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귀 였을 뿐일까?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엄마 역 이미숙 배우 | 엄마에게 자베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귀 였을 뿐일까?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엘리자베트 역 김주희 배우 | 맑은 동심을 가졌기에 미지의 존재와 소통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녀의 눈과 마음은... 조금 더 자라서도 그대로일까?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엘리자베트 역 김주희 배우 |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에 미지의 존재와 소통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녀의 눈과 마음은... 조금 더 자라서도 그대로일까?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자베트 역 박종태 배우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자베트 역 박종태 배우 | 자베트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자베트가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박태준(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시인이자 방송시극 - 방송시극은 눈으로 보는 연극의 형태보다는 우리가 라디오로 듣는 드라마극장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방송시극은 극적 구성을 가진 사건과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를 높은 시적 정서로 표현하는 방송 문예 편집물의 한 종류로서, 시・대사・음향 효과를 기본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 작가 귄터 아이히의 철학 세계는 몽환적이면서 염세적이다. 하지만 비극적 세계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만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방송시극 “꿈”과 이번작품의 원작 “자베트” 등은 젊은 극단에 의해 무대에서 공연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또한 법학과 동양학을 전공한 그의 이력 탓인지 오히려 우리에게 더 이름이 친숙한 독일 작가들의 작품 세계보다 자연스레 우리의 사유 속으로 스며든다.

방송시극으로 쓰인, 작가가 전쟁 같은 일상 속에 써내려갔던 “자베트”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무대화한 ‘프로젝트 내친김에’의 연극 <자베트>는 한 편의 시를 듣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아마도 사람이 듣기에 가장 기분 좋고 더 나아가 신뢰감을 느낄 수 있는 ‘솔’음을 베이스로 하기에, 속삭이듯 노래하듯 배우들이 읊어내는 대사와 그들의 이야기에 취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1명씩 번갈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우들의 쉴 새 없는 독특한 움직임과 그들의 땀방울,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라이브 연주가 더해져 무대는 가득 차 보인다.

연극 <자베트>의 대사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생각들과 궁금증으로 생각의 물꼬를 트게 되는 것만으로도, 배우 한 명 한 명이 몸으로 펼치는 환상을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서양의 실존철학이나 동양철학들을 굳이 따로 공부할 필요없이 이 연극을 충분히 느낄는지 모른다. 아마 떠오르는 생각과 방향은 각자가 너무나 다르기에 <자베트>의 무대를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더욱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순수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미로이다. 당신은 어떤 한쪽으로부터 오면 그 길을 잘 안다. 당신이 다른 쪽에서부터 동일한 장소로 다시 오면 당신은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통해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지성의 마법에 대항하는 싸움’이라고 철학을 이야기한 바 있다. 언어는 당신의 지성을 완벽하게 대변 할 수 있을까?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공감은 불가능한 것일까?

장자(莊子) 외편(外篇) 제17편 추수(秋水)에서는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살아 있는 시간이란 살아 있지 않은 시간에 비길 바가 못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을 짧디 짧은 지식의 한 자락으로 크고 넓은 자연과 우주를 분석하려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저 오만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독일어에서 죽음에 대한 용어들 Verenden, Ableben, Sterben 들 중 귄터 아이히는 자신의 글에서 어떤 느낌의 ‘죽음’을 이야기했을까? 작품 속 사라진 자베트를 죽은 것이라 할 수도 또는 다른 세계로 떠났다고도 할 수 있다면 다른 세계로 떠난 것과 죽음은 현격하게 분리된 현상일까?

우리 모두 ‘탄생’이라는 ‘신비함’에 대한 아름다움과 가능성은 잊은 채, 사회라는 작은 틀에 우리 자신을 욱여넣으면서 작은 생각과 닫힌 언어로 세상의 많고 많은 ‘신비’를 추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낭만과 환상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미지의 존재들은 처형되거나 숨어버렸다. 그렇기에 연극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환상,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꿈꾸며 잃었던 ‘신비함’을 되찾고자 한다는 <자베트>의 김정 연출가가 구현하는 작품 세계는 처연하지만 너무나 멋졌다.

오랜만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만들어 준 연극 <자베트>의 무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상의 무거운 고민의 짐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에서처럼 우리는 작고 작은 ‘점’보다도 더 작은 존재일는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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