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해방 72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가 35년간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후 갑절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서울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지만 의외로 변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사실 서울에는 아직도 많은 일제시대의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허수 교수(국사학과)는 “일제의 잔재는 일제가 만든 것 이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은 우리 사회가 70년이 지나도록 방조한 면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리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해온 우리 사회의 태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 70주년의 의미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성찰이 아닐까.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던 시기가 100년이 넘었고 일제가 패망하고 쫓겨 간지도 68여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도 곳곳에 일제의 잔재들이 남아있어 을씨년스럽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시기가 1910년부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상 1905년 11월에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다섯 조문으로 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직후부터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를 만들고 전 지역의 옥토만을 골라 차지했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1910년에는 일인들이 17만 명이상 진출해 들어왔고 그중 8,460명의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한 것이 28만 8백여 정보에 달했다. 그들은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부터 토지조사령을 내려 본격적인 토지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사유권 확립을 위해 토지 소재지, 가격, 지형 등을 조사하고 측량한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지세부담을 공평히 하고 지적을 분명히 하여 소유권을 보호하고 매매와 양도는 간편히 한다는 구실이었다. 이 토지조사령이 내려지자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한 기한 내에 주소, 성명, 소유자의 소재지, 지목, 등급, 지적, 결(結)수를 토지조사국에 신고해야 했다.

그리고 토지 소유자나 그 밖의 토지 관리인들은 농토의 사방경계에 푯말을 세워 지목과 소유자의 이름을 적어놓아야 했다. 그런 다음 토지 소유 권리는 일본 정부의 심사에 의해서 확정을 받아야 했다. 이런 일방적인 조치로 인해 번거로운 절차를 잘 모르는 우리 농민들은 어물어물하다가 기한을 넘긴 경우가 많았다.

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신고하지 않았다가 논을 빼앗겨 버렸다. 이렇게 빼앗긴 농토는 전국적으로 수천수백 건이나 되었고 모두 일본회사나 일본인들에게 불하됐다.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1918년 말까지 25만 명이 추운 북간도로 고국을 등진 채 유랑했고, 호구지책을 위해 일본등지에까지 노동자로 떠나야만 했다.

식민지배의 흔적들

❶+❷ 창경궁 내부에 위치한 동물원 터(위)와 대온실(아래). 창경궁은 일제 당시 ‘창경원’이라는 동·식물원으로 일반에 개방되었다. 한 나라 왕조의 궁궐에 동·식물원이 들어선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지만, 현재 대온실 앞에는 그러한 설명이 없다.

❸ 1926년 건립된 경성부청 건물. 일제는 조선인들의 숭왕(崇 王)의식과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로 경성부청을 덕수궁 앞에 만들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서울시 청사로 이용되다가 2012년 신(新)청사 완공 이후에는 서울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❹ 한국은행 구 본관.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의 건물이었으며,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산이었다.

❺ 마로니에 공원 우측에 위치한 예술가의 집. 이 건물은 옛 경성제국대학 본부 건물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일제의 6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되었다.

❻ 남산 중턱에 위치한 백범공원. 과거 조선신궁의 터였던 이 일대에는 현재 백범공원, 안중근기념관이 위치해있다. 일제의 강요로 1942년 참배자는 약 265만 명에 달했다.

❼ 남산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자리는 러일전쟁의 일본 영웅으로 여겨지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기리는 노기 신사가 있던 곳이다. 사진은 당시 신사에서 쓰이던 수조이다.

❽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뒤편에 위치한 시구문. 일제는 사형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외부로 몰래 시신을 반출하기 위해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해방직전 일제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폭파했으나, 1992년에 복원됐다.

저항의 흔적들

❶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하기 전 남긴 유언이다. 나석주 의사의 의거 터인 외환은행 본점건물 화단에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❷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 건립당시 심어진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독립을 이루지 못한 원통함으로 통곡했다고 한다.

❸+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 거점이었던 서울연통부의 터(위)와 1995년 건립된 연통부 기념비(아래). 당시 동화약방의 사장이었던 민강 선생이 연통부의 행정책임자였다. 이곳은 2014년 동화약품본사가 이전하기 전까지 동화약품 본사 사옥으로 사용되었다.

70년 전의 일상, 그리고 오늘의 일상

❶ 서울역 옆에는 1925년에 세워진 구 서울역사(당시 경성역)가 여전히 남아있다. 경성역은 준공 당시 동경역사와 함께 동양 2대 건물로 손꼽혔다고 한다. 현재는 공연, 전시와 같은 문화 행사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❷ ‘명수대’라는 지명은 일제 시대 일본인 별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명칭은 현재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사용되고 있다.

❸ SC은행 제일지점. 1932년 국내 최초의 설계공모전을 통해 건축된 건물이다. 건립 당시 이 건물은 민영은행인 조선저축은행의 본점 건물이었다.

❹ SC은행 제일지점 옆에 위치한 신세계 백화점 본점. 본래 이 건물은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었다. 당시 미츠코시 백화점의 주 고객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일부 상류층이었다고 한다.

❺ 삼청동 정독도서관 뒤편. 전형적인 일본식 2층 가옥으로 동그란 창문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❻ 동국대 후문에 위치한 일본식 가옥. 기와지붕의 형태는 한옥과 달리 둥근 곡선이 아니라 직선이다.

❼ 부민관은 공연과 집회 등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부립(府立) 다목적 홀이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이다 현재는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❽ 1937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조선체신사업회관. 해방 이후 국세청 남대문 별관으로 운영되었으나, 서울시는 이번 5월부터 철거를 시작해 이곳에 시민광장을 조성할 예정이다. 오는 8월 15일 해방 70주년 기념으로 시민들에게 임시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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