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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헌신하시는 모든 분들께 드립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역자 주

페스트 시대를 어떻게 마주 할까? 1
지금, 까뮈 『페스트』를 읽다 -

페스트가 갖는 “상징”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부조리’ 철학을 내세우며 등장, 실존주의적 작품으로 장 폴 사르트르와 나란히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이다. 1957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바로 3년 후에 교통사고로 사십대 중반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문학적 고전으로 생명을 계속 유지해 왔다. 2013년 11월 7일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며, 미완의 자전적 작품 『최초의 인간』도 영화화되어, 일본 여러 지역에서 상영되고 있다. 카뮈의 문학은, 현재도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페스트』를 바로 3ㆍ11[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이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페스트』는 불행과 절망에 빠진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 가능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 우리에게 새삼스레 뭔가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47년에 『페스트』가 출판되었을 때, 카뮈는 겨우 서른세 살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치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에서 『이방인』과 『시시포스 신화』를 간행, 주목을 받아 왔다. 여기에 더해 반反나치 레지스탕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신문 『콩바(전투)』를 대표하는 주필이며, 또 희곡 『오해』 『칼리굴라』의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페스트』 출판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3년째를 맞아, 전후 재건을 위한 정치적ㆍ문화적인 새로운 동향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전쟁 체험과 전후 상황이라는 제한된 배경 속에서 태어난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카뮈에게는, 가난한 집안 출신, 젊은 날에 앓았던 결핵 체험, 알제리의 정치적 지위, 스페인 시민전쟁 등, 많은 문제가 이 세계를 뒤덮는 이의성二義性이라는 그의 ‘부조리’ 사상에 관계되어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는, 일찍이 ‘흑사병’으로 공포에 떨었던 페스트를 가벼운 화제로 삼은 것은 분명 금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집단적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죽음이나 무질서 상태와 동의어이며, 이 치명적인 집단 전염병에 감염되는 것은, 사회 질서나 가치를 파괴하는 위험의 은유가 될 수 있다. 카뮈의 『페스트』도, 다양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페스트』는, 우선 의학적 의미의 전염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며,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확대되어 간다. 의사들의 필사적인 노력도 헛된 것으로 만든 후에, 점차 약해지고, 이윽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에 소멸한다. 페스트는, 아시아와의 교역 통로를 통해 14세기 유럽에 유입되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 유럽의 2/3 지역이 감염되고, 역사가 가운데는 (유럽) 총인구의 1/3이 사망했다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현대에는, 에이즈나 에볼라바이러스[고열과 내출혈을 일으키는 열대 전염병 바이러스], 그 밖에 새로운 전염병이 주목받고, 세계적 규모의 인구 이동이나 대도시로 엄청난 인구 집중, 제3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ㆍ의학적 황폐에 비추어 보면, 『페스트』의 호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도 곤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번째로, 카뮈의 『페스트』는, 전쟁과 점령을 의미한다. 『페스트』의 무대인 오랑시市 주민 20만 명은, 엄격한 방역 체제하에 갇히어, 건강한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모든 것이 단절되었다. 그것은 나치 독일군 점령하에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감옥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던 몇 천만 명이라는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거기에서 난무하는 독재 지배의 표어, 암시장의 사기성 거래, 향락에 대한 굶주림, 견고하게 맺어져 있다고 믿었던 가족 간의 이간이나 불화,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이별의 슬픔이나 고통. 페스트에 휩싸여 있는 동안 오랑 주민의 생활을 장식했던 이 모든 현상은, 현실에서 나치 점령하의 유럽 각 지역에 나타났던 것들이다.

카뮈는, 『페스트』 구상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초기, 그것에 『구금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허구로 구성된 『페스트』는, 현실에서 일어난 구금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940년대에 『페스트』를 손에 든 프랑스 독자는, 바로 일상으로 체험했던 전쟁과 점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카뮈 자신, 프랑스 사람으로 독일에 협력한 사람이나 레지스탕스, 고립이나 연대, 거기에 더해 집단 학살(Oradour‐sur‐Glane!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도시. 1944년 6월 10일, 퇴각하던 나치 독일 친위대가 주민을 대량 학살한 곳으로 유명하다. 희생자는 교회에 갇혀 불에 타 죽은 500명의 부녀자를 포함하여 650명이 넘고, 생존자는 겨우 몇 명뿐이었다. 당시 도시의 이 비극을 기념해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그 옆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등, 점령기의 다양한 체험을, 이 소설 속에 모습을 변형시켜 표현하고 있다.

『페스트』의 상징적 의미는, 여기에 더해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 지진 피해나 대규모 재해(!) - 나아가 이 세상의 악과 죄 없는 사람의 죽음과 고난의 문제 -를 둘러싼, 한층 깊은 차원으로 이끌고 간다.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카뮈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세속 내적으로, 인간주의적으로, 지상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쏠려 있다. 그때 초월성의 차원은, 엄격하게 차단되어 있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트』에서는, 작품과 작가의 일체성 = 동질성이 다양한 등장인물들에게, 각각 역동성과 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실존철학이 말하는 ‘한계상황’(칼 야스퍼스)에서 인간의 다양한 행동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한층 더 구체적ㆍ인상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렇게 해서 카뮈의 『페스트』는, 21세기라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 - 각박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 - 에 대해 예민하게 호소하는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오랑 시를 덮친 페스트

카뮈는, 이 소설에서 페스트를 20세기인 1940년대의 북아프리카 항만 도시 오랑에서 일어난 “상식을 벗어난 기이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페스트에 휩쓸린 도시는, 극성을 부리는 이 전염병 때문에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고, 시민 전체가 생존을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 노출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면, 1940년대에 오랑에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소설 속의 오랑은, 카뮈에게는 어디까지나 ‘부조리’에 노출된 이 세계 전체를 상징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모방해 만든 상’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오랑은 “완전히 근대적인 도시”라고 소개된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살아 있기에 남은 시간을 카페에 앉아서 잡담으로 허비하며 보낸다. “그들은 특히 장사에 관심이 많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사업을 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물론 그런 단순한 즐거움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고, 여자와 영화, 해수욕을 좋아한다.” 여기에서는 사회 표층에 있으면서 유행이나 관습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현대인’ -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일상적인 ‘인간(속물적 인간)’- 의 모습이 제시된다.

■ 페스트의 발생

이야기는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계단 통로 한가운데서 한 마리 죽은 쥐에 발이 걸리고, 수위에게 주의를 주는 데서 시작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이 의사 리외야말로 오랑시를 덮친 페스트 사건의 경과 전체를 기록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시내 곳곳에서 아주 많은 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나와 죽어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어느 사이엔가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고,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잇달아 죽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포와 혐오를 감지하면서도, 사태를 직시하는 것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것이 가공할 전염병의 조짐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행정 당국도, 초기에는 집단적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한 예방 조치를 신속하게 취하려 하지 않았다.

리외는 오랑 시내에서 가장 유력한 의사 리샤르의 찬성도 얻어서, 시청에 강하게 촉구, 보건위원회를 소집시킨다. 2개월 이내에 시민의 반수가 죽어 없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경계 조치를 강구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페스트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법률에 규정된 중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에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러한 긴박한 소통 속에서, 행정 당국의 대표인 시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엉거주춤한 발언으로 일관했다.
“내 입장에서는, 그것이 페스트라는 유행병이라고, 여러분이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리외는 곧바로 다그쳤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시민의 반수를 죽어 없어지게 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페스트라고 부르거나 페스트가 아니라고 부르거나 하는 ‘어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시간’ 문제인 것이다. 페스트가 아니라고 해도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취하는 예방 체제를 긴급하게 펴는 바로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논의 끝에 위원회는 “이 병이 마치 페스트인 것처럼 대응하는” 것에 책임을 진다는 표현에 “열렬한 동의”를 표명하고 결말이 났다. 여기에는, 위기에 처했을 때, 때때로 볼 수 있는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가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가는 최종적인 정책 결정의 책임을 전문가 부담으로 떠넘기는 경향이 있고, 전문가 쪽은 긴급하게 내려야 할 판단을 연기해 회피하고자 하면 하기 쉬운 거니까.

회의 3일 후에 시청이 내다 붙인 “조그마한 흰색 전단”에서는, 당국이 사태를 똑바로 보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당국이 취한 예방 조치는 결코 엄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사 리외의 눈에는 “여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필요한 많은 조치를 희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희생자의 수가 하루에만 30명대에 달했던 날에, 당국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페스트 발생을 선언했다. 시로 들어오는 입구는 폐쇄되고, 항만은 봉쇄되었다. 이 시점부터 다음 해 2월 8일까지 9개월 동안, 오랑시 전체가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소설은 페스트가 느닷없이 시작되어 급속하게 확대되어 가는 속도와 격렬함에 맞추어 - 말하자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 악센트를 바꿔 가며 이야기를 해 간다. “처음 며칠의 기록은 다소 자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쓴 것처럼, 4월 후반의 사건 경과에 대해서는, 시간 단위로 ‘하루’가 사용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5월과 6월에는 시간 단위를 어느새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로 바뀌어 있다.

■ 민중의 의식 전환

이 사이에, “심각한 변모가 이 도시 외관을 변화시켰다.” 당국에 의해 승용차 운행과 식료품 보급은 제한되고, 가솔린은 할당제가 되고, 절전節電까지 시행되었다. 얼마 안 되는 필수품만이 육로와 항공로를 통해 오랑에 반입되었다. 사치품 가게는 문을 닫고, 다른 상점에도 품절 게시문이 내걸렸다. 그 다른 쪽에는 가게 앞에 구매자들의 행렬이 늘어섰다.

이렇게 해서 시로 통하는 입구가 폐쇄되고 나서, 모든 주민은 현실에 갇혀, 말하자면 ‘추방된 존재’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시 밖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야만 했다. 페스트가 계속 창궐하는 긴 시간과 지나친 가혹함, 그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 의식이 어떻게 변해 가는 지가 이 이야기의 주제이다.

페스트가 사람들 사이에 야기한 심각한 의식 전환은, 무엇보다도 시간 관련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현재에서 미래로 관심을 돌리는 일, 또는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은 완전히 의미를 잃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만 관심이 한정되어 버리게 된다.

“자신의 현재에 초조해 하고, 과거에 앙심을 품고, 게다가 미래를 빼앗기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인류의 정의 또는 증오로 철창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사람들과 너무 닮아 있었다.”

작가는 그것을 “모든 죄수, 모든 유형자流刑者의 심각한 고통”에 비교하고 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공포와 고난에 직면해, 인간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시된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처음에는 우선 사람들을 하찮은 일에 감동하는 부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시끌벅적한 향락에 몸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쪽이 있고, 개중에는 식료품이나 생활필수품 부족을 기회로 삼아 이익을 얻으려고 흉계를 꾸미는 사람도 나온다. 이러한 가운데 미신이 유행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이 순간부터는, 그들은 노골적으로 하늘의 변덕에 맡기게 되고, 이유도 없이 고통 또는 희망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기록자는 이러한 “방치된 상태는, 장기간 계속되면 결국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시키기에 충분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주목할 만한 말을 끼워 넣고 있다. 페스트는 이제까지의 타성적인 생활을 중단시킨다. 끊임없는 공포를 수반하는 이상 사태는, 거기에 수반되는 피로감만이 아니라, 특별한 생명의 집중감도 생겨난다. 이 위험한 상태 속에서 이제까지 관심을 기우리지 않았던 인간성의 내적 본성이 갑자기 드러난다.

예를 들면, 페스트로 인한 “이 느닷없고 게다가 오랫동안 계속된 별거”로, 비로소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늙은 의사 카스텔과 그 아내의 경우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감정이 고통에 시달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부부를 “예외”적인 경우로 기록한 의사 리외 자신도, 이제까지 병든 아내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페스트 발생에 앞서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게 된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한 번 결혼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더욱더 적극적으로 페스트와 대결함으로써 본래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만 존재했다. 리외는, 그 대표적인 존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오랑시에 페스트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하게 퍼지는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의사로 환자를 돌보고, 또 시 전체 방역 체제의 조직자로 활약한다. 그러한 리외의 노력을 떠받친 것은, 예를 들면, 평소 눈에 띄는 일이 없었던 시청의 하급 직원 조제프 그랑의 변함없는 구체적 협력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보건대保健隊에서 일종의 ‘간사 역할’을 맡아 했다.

더욱이 우연히 언론인으로 파리에서 취재차 방문해 페스트에 말려든 레이몽 랑베르의 행동도 눈길을 끈다. 그는 처음에, 파리의 사랑하는 아내와 다시 만나는 것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한 때는 비합법적 수단을 이용해 탈출하는 일조차 기도했었다. 그러나 이윽고 자기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에 수치감을 품고, 보건대에 헌신하는 성실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 예수회 신부 파늘루도, 독특한 존재감을 가지고 소설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불을 뿜는 듯한 격렬한 말로 청중의 양심에 호소하고, 페스트를 신의 심판의 징표로 삼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신앙을 회복하라고 압박하는 학식이 풍부한 설교자였다. 여기에는 뒤에서 말하는 것처럼, 페스트 = 이 세상의 ‘부조리’를 둘러싼 신의론神義論[신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이론] 문제가 잠재해 있었다.

의사 리외 주변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은, 장기간에 걸쳐 페스트가 만연하는 동안에,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경험해 갔다. 그러나 섬뜩한 페스트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평상시와 변함없는 인간성을 계속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용하게 두드러지지 않는 행동을 통해 무한한 사랑의 존재를 실감하게 만든 리외의 어머니. 그녀는 초기에, 역 앞으로 마중 나온 아들 리외로부터 쥐가 많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들과 다시 만나는 기쁨을 “쥐든 뭐든 상관없어”라고, 전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좀 특이한 오랑의 체재자로, 나중에 리외에게 “형제 같은 느낌이 드는” 마음의 벗이 되고, 페스트와 싸우는 수고를 함께 떠맡아 주었던 장 타루 등. 그는, 몰래 기록한 관찰 노트로, 나중에 기록자인 리외의 보고 내용에 상세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풍부함을 더하는 데도 공헌했다.

6월말에는 불볕더위와 함께, 페스트 사망자는 일주일에 700명을 넘을 만큼 많아졌고, 행정당국은 방역 조치를 더욱 강화해야만 했다. 햇살은 시市에서 모든 색채를 지우고, 모든 기쁨을 추방해 버렸다. 이 여름에는, 가까운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고, 시민들은 그때까지 오랫동안 즐겨 온 해수욕의 낙을 맛볼 권리를 빼앗겼다.

■ 페스트 전성기

초여름에 일어난 이 사건들에 이어서 제3장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짧은 부분이지만, 페스트 전성기인 7ㆍ8월을 다루고 있다. 그 시절은, 일년 가운데 가장 덥고, 가장 바람이 강한 계절에 해당한다. 불볕더위의 정점은 집단 전염병의 정점과도 겹친다. 시내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과 먼지, 건조한 공기는 오랑시 전체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환자가 나온 지역을 다루는 방식을 둘러싼 잠재적인 불만이나 불안은 서로의 ‘연대’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피해가 심한 몇몇 지역을 격리하고, 그 지역에서는 꼭 필요한 직무를 가진 사람 외에는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조치를 자신들만을 특별히 소외시키는 ‘약자 괴롭히기’라고 여기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마치 자유롭게 살고 있는 인간인 것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꾸로 다른 지역 사람들 쪽에서는, 제한 지역의 주민들을 자신들 이상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위안”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도 아직 우리 이상으로 속박당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이, 힘든 시기를 지나가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희망”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페스트는, 초기에는 인구가 밀집한 시 외곽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이제는 시 중심 지역에도 덮쳐 왔다. 그 사이에, 이윽고 시 전역을 뒤덮어 죽음의 희생자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거듭 늘어나는 사망자의 매장은, 한층 신속하게 또한 가차 없이 행해져야만 했다. 이미 교회 묘지는 너무나 비좁아졌고, 장례 의식을 다 갖춘 개인적인 매장은 불가능해졌다. 그것에 대신해 깊고 우묵하게 판 커다란 구덩이가 집단 묘지가 되어, 몇 겹으로 겹쳐진 시체 위에는 석회가 뿌려졌다.

“여름의 막바지 동안, 또 가을비가 계속해 한창 내릴 때”, 시영 전차는 시민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한밤중에 많은 시체를 소각장으로 실어 날랐다. 이 소각로의 이미지는, 나치 독일 지배하의 절멸 수용소의 소각장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카뮈는 이 소설 곳곳에서 다양한 변형으로 전쟁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포위, 적, 패배 등).

이런 나날을 보내며, “시민들은 일이 진행되는 형편에 만족해 보조를 맞추고, 세간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적응해 간 것이지만, 그 까닭은, 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당연하게, 불행과 고통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통증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한 때의 절망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개개의 인간이 분발해 새로운 상황을 열 수 있도록 결단하는 일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절망이 지속화되어, 영속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면, 사람들은 원래 결단할 힘을 잃어버리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일이 진행되는 형편에 몸을 맡기게 되기 때문이다.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들은 다만 현재 속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현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말해야만 하는 데, 페스트는 모든 사람에게서, 연애도 심지어 우정의 능력까지 빼앗아 버렸다. 왜냐하면 사랑은 얼마간의 미래를 요구하는 것이며,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미 매 시각의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거의 피로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던 의사 리외조차, 그치지 않고 나타나는 페스트 환자를 앞에 두고, 인간적인 감수성이 딱딱하게 메말라가는 것을 느낀다. 일상화된 진료 행위를 반복하는 가운데, 치료 그 자체도 대충하게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역할은, 이미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진찰하는 것이었다. 발견하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그런 다음 선고하는” ‘관료주의화’된 작업에 불과하게 되어만 갔다.

“실제로 그가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은, 구제가 아니라 지식이었다. 이런 것은 물론 인간의 직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결국 공포에 노출되어 사망자가 속출하는 이 민중 속에서, 도대체 누구에게, 인간다운 직무 따위를 수행할 여유가 남겨져 있었다는 것일까?”

이제 오랑시 전체 속에서 이제까지 타당했던 모든 규범과 질서가 붕괴된 것처럼 보였다. 방화, 무기를 가진 작은 집단의 습격과 약탈, 총격의 응수, 절도범의 총살 등이 행해졌고, 당분간 11시 이후의 야간 소등 규제 조치가 내렸다. 11시 이후, 오랑시는 완전히 어둠에 휩싸이고, “마치 돌로 변한”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기록자 리외의 필치는, 전혀 정서를 개입시키지 않고, 정확 동시에 사실 그대로, 그 ‘종말적’인 양상을 전하고 있다.

“달빛이 환한 하늘 아래, 도시는 집들의 하얀 벽과 곧게 뻗은 거리… 한 그루 나무의 검게 퍼진 그림자에 얼룩을 지게 하는 것도 없고, 한 사람의 산책자가 내는 발걸음 소리나 한 마리 개가 짖어대는 소리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거리…가 늘어서 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대도시는, 그때 이미 생기를 잃은 거대한 입방체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영원히 청동 속에 갇힌 옛날 위인들의 말없는 초상만이, 돌이나 쇠로 만든 모조 얼굴로써, 그 옛날 인간이었던 사람의 쇠락한 모습을 환기시키려고 홀로 시도하고 있었다. 이 진부한 우상들은,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 생기가 사라진 네거리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무감각하고 우둔한 사람 같은 그 모습들은, 이제 우리가 뛰어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의 시대, 또는 적어도 그 끝판의 양상…페스트와 돌덩이와 어두운 밤이 마침내 모든 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어떤 지하 묘지 같은 양상…을 상당히 잘 상징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페스트 지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도시를 뒤덮은 절망감과 소외감의 분위기가 지옥도처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 해방의 날에

페스트가 정점에 이르렀던 이 시기에 이어서 마지막 4개월, 다시 말해, 여름 끝 무렵부터 가을, 나아가 초겨울에 걸친 계절을 다룬 제4장에서는, 시간 단위는 ‘일주일’과 ‘한 달’로 바뀐다. 이 가을의 계절에는 안개와 폭염과 비가 이어지고, 아득히 높은 하늘을 지나가는 남쪽의 철새들도, 도시 위를 “우회”하고 있었다. 페스트는, 여전히 이번 주 역시 지난주와 답보 상태를 계속하고, 도시를 그 발아래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생긴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이다. 의사 리외의 동료 카스텔이 새로 개발한 혈청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험 삼아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소년이 겪는 죽음의 고통을 더욱 가혹한 형태로 지연시켰을 뿐 아무런 효과 없이 끝났다. 이 ‘죄 없는’ 소년의 애처로운 죽음과의 싸움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삼스럽게 ‘부조리’를 둘러싼 냉엄한 질문이 생겨나고, 더욱이 나중에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계절을 맞이할 무렵부터, 그때까지 확대 일로였던 페스트에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폐 감염으로 침대에 쓰러져 호흡 곤란에 빠져 있던 늙은 공무원 그랑은, 혈청을 맞은 다음날 아침, 침대 위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 기적적인 병세의 진행 정지를 리외는 “이해할 수 없는 소생”(=부활)이라고 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제5장은, 새해 초기의 두 달이 채 안 되는 엄동의 계절에 할당되었다. 기록자는 시간의 단위를 다시 변경해 시작 무렵처럼 ‘하루’마다 정확한 자료를 기입해 간다.

고양이나 개의 모습이 다시 울타리 사이로 보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 있는 쥐”의 출현도 화제가 된다. 그것은 분명히 집단 전염병이 갑자기 퇴조하기 시작한 징조였다. 도시의 사람들은, 기대와 실망이 뒤섞여 엇갈리는 가운데, “흥분과 침체” - “심각한 회의주의”와 “낙관 사상의 자연 발생적 징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마침내 1월 하순에는 시 당국에 의해 “건강한 시대의 조명으로 돌아간다”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월 어느 화창한 이른 아침”마침내 시로 들어오는 입구 개방이 공시되었다.

“정오에는, 태양은 아침부터 대기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찬바람을 밀어 내고, 끊임없이 강렬한 햇빛의 물결을 도시 위에 쏟아 붓고 있었다. 낮은 정지된 듯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보루의 대포는, 정지한 것 같은 하늘에,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광장이란 광장에는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두운 항구에서, 공식적인 축하의 불꽃이 솟아올랐고, 도시 전체는, 길고 은은한 환호로 불꽃에 답했다. 온갖 색의 빛다발이 하늘로 올라가며 그 수가 늘어났고, 사람들의 함성이 메아리쳐 오는 가운데, 리외는 “여기서 종말을 고하는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기자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이 페스트에 대한 기록자의 존재가 명시된다. 작가 카뮈는, 이 기록자의 결심 동기에 대해 적는다.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해, 이들 페스트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행해진 도리를 벗어난 행동과 잔인함의, 하다못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라고.

의사 리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증언자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감정 억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희생자들의 편이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 기록을, 다음 세대를 위해 써서 남겨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페스트』가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 속에서, 이하 특히 중요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두세 개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상세하게 논하고자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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