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미술관 ’세렌디피티”전
21명의 작가 창작모티브 공개

 

인연(因)이라는 단어 만큼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하는 단어도 없다. 작가들은 창작의 고뇌가 인(因)이 되어 영감이라는 연(緣)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오는 4월 25일까지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에서 열리는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serendipity)‘전은 21명의 작가들이 창작에 영감이 됐던 것들을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켰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자리다. 작가들에게 영감은 뜻밖의 선물(세렌디피티)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세현 '붉은 산수'
이세현 '붉은 산수'

이세현은 DMZ군복무시절 야간투시경을 통해 바라 본 비무장지대 풍경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투시경에 들어 온 녹색 풍경이 신비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나무와 숲이 가득한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동시에 절대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이런 양가적 감정이 투영되어 ’붉은 산수‘가 탄생됐다.

손봉채는 커닝페이퍼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학 강사 시절 시험 감독으로 교실에 들어간 작가는 투명한 OHP 필름을 이용해 답안을 작성하던 학생의 커닝페이퍼를 압수하게 된다. 가져온 시험지와 필름을 책상에 놓고 펼치는 순간 글자가 겹쳐지며 생긴 잔상이 입체로 보였다. 손봉채 작가만의 ‘입체회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기창은 병원 진료실에 보았던 X-ray 필름에서 영감을 얻는다. 자신의 교통사고 X-ray 필름속 절단 난 뼈 이미지가 마치 먹의 농담처럼 나타나는데 눈길이 갔다. 종이와 먹을 벗어난 작품 ‘뢴트겐 정원’의 탄생 스토리다.

이명호는 수년 간 대학 교정을 오가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한 그루 나무를 대학원시절 우연히 보게된다. 그 날 나무가 마치 작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오롯이 보였다. ‘Photography-Act Project (사진- 행위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신작 ‘드러낸’연작은 왕궁은 사라지고 흔적만 파편적으로 남은 터를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그 사진을 칼로 긁어서 마치 도로 텅 빈 캔버스처럼 보이도록 하는 작업이다.

김범수는 미국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출연한 코카콜라 광고 상업용 영화필름을 구입하게 된다. 필름을 작업실에서 펼쳐보면서 다채로운 색감과 인물들의 미묘한 변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스토리에서 강렬한 영감을 받는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처럼 과거의 순간적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기록된 서사적 스토리 안에서 역사와 수많은 사람의 정지된 이야기들이 작가의 편집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작가만의 조형적 시각언어로 승화됐다.

이길래 '소나무'
이길래 '소나무'

이길래는 고속도로의 화물차에 적재된 동파이프를 우연히 목격한 것에서 작업이 시작됐다. 동파이프를 처음 본 순간 작가의 머릿속에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세포 이미지가 떠올랐다. 기술문명의 상징인 동파이프와 생명의 상징인 세포의 이중적 속성을 결합한 작품 구상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잘게 자른 동파이프를 측면을 눌러 긴 타원형을 만든 후 용접으로 붙여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독창적 제작방식은 노동집약적인 직조로서의 전통적인 조각의 방법을 유지하면서도 안과 밖이 서로 동하는 구조로 꽉 찬 양감을 주는 차별적 조각이 탄생하게 됐다.

양대원은 병원 로비에 걸린 암세포 전시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암세포 사진 속 형상이 검은 사람들의 무리들로 보였다. 대학 화학과 재학시절 배웠던 분자구조와 유사했으며 수많은 검은 풍선이 끈적끈적한 액체에 가득 들어차 뒤엉켜있는 느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속 인간들의 모습을 암세포의 검고 동글동글한 형상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첫 출산한 신생아의 모습과 죽음의 상징인 암세포가 오버랩(overlap)되면서 동글동글하고 속이 텅 빈 검은 풍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동글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반물리학(권영대저),무기화학(james. E.Huheey)의 책도 도움이 됐다.

윤진섭은 작품을 오브제로서 선택하는 매 순간마다 새로운 세렌디피티를 경험한다. 출품작 ‘부러진 삽’은 지하철 구로역에서 내려 문래예술공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보도 옆에 화단에서 발견한 것이다. 작가는 이름 없는 삽자루에 부러진 삽(Broken Sho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곤 문래예술공장에 도착해 작가들에게 사인은 부탁하고 즉석에서 포즈를 취하여 사진으로 남겼다. 그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있어도 순간적이고 변화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의 작품은 그저 주위에서 줍거나 얻거나, 선물 받은 살아있는 관계의 흔적들과 그에 대한 작가의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 해석, 코멘트, 약간의 감각적인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현주 'Rebirth of Life'
최현주 'Rebirth of Life'

최현주는 5세 무렵, 어머니가 만들어준 계란 프라이를 처음으로 보았는데 그 이미지는 마치 향기가 가득한 활짝 핀 꽃으로 보여 차마 먹지 못하고 신기해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탱탱한 노른자와 흰자의 조화는 수저로 건드리기조차 아까운 대상이었고 긴 세월동안 그녀의 뇌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녀에게 두 감각은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었고 40년의 연구와 작품구상을 거쳐 2011년 미각과 시각을 융합한 공감감적 계란 프라이 꽃 작품이 태어났다. 청각을 그림과 융합한다는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뉴미디어 매체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발상이 떠오른 순간 센서와 디지털 장치를 캔버스와 결합해 관객이 그림을 감상하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유근택  ‘Fountain1’
유근택 ‘Fountain1’

유근택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분수대 앞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분수가 뿜어내는 물줄기에 매료됐다. 분수는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익숙한 소재였지만 그날따라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분수의 물줄기는 풍경에 진동을 만들어내고, 풍경을 분할하거나 해체하기도 하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만들어 냈다. 분수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이치를 위반한다는 것, 즉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역발상적 개념이 그에게는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발견은 작가에게 폭포와 분수의 특성을 통해 동서양의 문화적인 차이를 비교해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작가는 ‘분수 연작’을 통해 동·서양이 만나는 지점과 두 세계가 확장되는 개념을 연구하는 등 회화의 근원을 집중 탐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김승영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2009년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 골목길에서 우연히 목격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이미지는 작가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폐허’ 그 자체로 다가왔다. 작가는 최초의 발견을 작품으로 옮겨 3년간의 제작과정을 통해 2011년 ‘Strasbourg’을 완성해냈다. 명상적인 사운드와 함께 삶의 시선과 죽음의 시선을 교차로 보여주거나,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근원으로 도달한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과 반복에서 ‘삶’은 지속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베른트 할프헤르 사진콜라주 작업
베른트 할프헤르 사진콜라주 작업

베른트 할프헤르(Bernd Halbherr)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1993년 독일 남부 비블링엔 바로크식 수도원의 돔형식의 천장화를 본 후 시작된다. 둥근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세상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고, 이후 세상을 완벽히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보다 깊게 몰두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단편적인 부분을 보여준다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하여, 사진을 완전한 시야로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과학과 디자인의 도시 독일 울름(Ulm)에서 태어난 베른트 할프헤르에게 치밀하게 계산된 작업과정과 과학적 사고는 어린 시절부터의 자연스러운 일련의 사고 체계로 잠재되어 있었다. 특히 1994년 학교의 전시 주제였던 ‘사진과 조형’을 계기로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완전하게 볼 수 있는 조형적인 요소로 지금까지 작품의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구(ball)를 떠올렸다.

홍순명의 영감은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 읽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서 비롯되었다. 13년간 백인 사회 속 동양인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힘의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주변인이자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느꼈다. 그런 그에게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중심인과 주변인 개념을 착안하고 배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도 속에 편입되지 않은 주변인의 삶을 살면서 그는 중심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주변이 있어야 하는 주변의 또 다른 속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이 10여년의 작업 구상을 거쳐 2004년 전 세계 주요 언론 보도 이미지를 재편집하여 주변 이미지로 편집한 사이드 스케이프(side scape) 연작을 낳게 했다.

이름 자체가 구름(운 雲)으로 ‘구름의 작가’ 라는 운명을 타고난 강운의 인생에는 2번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이 있었다. 첫 번 째는 ‘구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된 계기다. 창밖으로 유유자적 흐르는 구름을 보게 되었다. 거기엔 시간, 공간 , 빛이라는 물리의 3대 원칙이자 회화의 3대 구성요소가 녹아있었다. 작가는 예술의 추상적인 개념을 ‘구름’에 비유하여 전달할 수 있겠다는 나름의 인식이 생겼다. 두 번째 뜻밖의 발견은 2006년에 비롯되었다. 우연히 무수히 겹쳐진 한지 배접판의 흔적에서 백색의 무한공간이자 여백을 발견한 작가는 ‘구름’을 소재로 하여 보이는 형상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유와 철학, 우리의 인생사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기 시작했다.

남경민의 우연한 발견은 2000년 5월 어느 날 석수동의 낡은 작업실 건물로 들어서던 순간부터 시작된다. 작업실의 문을 열자 항상 보던 익숙한 실내 풍경이 어제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낯설고, 동시에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노출시키는 듯한 새로운 인상을 받았다. 작업실의 풍경이 곧 화가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자 미술사 대가들의 작업실 연작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환희의 순간이었다. 이후 작가는 렘브란트, 마네, 세잔, 고흐, 피카소 등 대가의 작업실을 보존한 생가 및 작품이 소장된 미술관을 직접 방문하거나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들의 예술세계, 삶의 흔적들을 추적했다. 이후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화가의 작업실을 재현한 ‘화가의 방’연작에 몰두하게 된다.

함명수의 영감은 1991년 우연히 자신의 작업실 책상에 놓인 ‘새로움의 충격 모더니즘의 도전과 환상’이란 책 표지에서 비롯되었다. 책 표지에 독일의 초현실주의 여성작가인 메레 오펜하임의 ‘모피 찻잔’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그 강렬한 이미지는 번뜩이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모피 이미지는 작가의 기억 속에 새겨진 어릴 적 어머니와 누이가 털실 뜨개질 하는 모습과 결합되었다. 이후 그는 오직 붓 터치만으로 털의 질감을 모사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되었고 다양한 실험에 몰두했다. 작가 특유의 털의 질감을 재현하는 기법은 10년간의 실험과 연구를 거쳐 탄생했다. 털의 질감뿐만 아니라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나, 풀의 질감 등 다양한 질감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도양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1998년 기하광학을 공부하던 시절, 렌즈의 이미지서클에 대해 알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보몬트 뉴홀의 ‘사진의 역사’와 ‘잠상’,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사진의 이론과 기법을 총망라한 바이블로 평가받는 바바라 런던의 ‘사진’책을 감명 깊게 읽은 그는 1999년 대형카메라를 구입해 이미지가 생기는 원리와 구조를 연구했다.

황인기 '방 금강전도'
황인기 '방 금강전도'

‘디지털 산수화’로 잘 알려진 황인기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1997년 충남 옥천의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던 중 무심코 바라본 자연풍경에서 비롯되었다. 공업용 소재를 재료로 활용해 자연풍경을 표현하는 특유의 기법이 태동된 순간이었다. 그가 서울대에서 회회를 전공하기 전 응용물리학을 전공한 융복합적 이력도 역발상적 작품구상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작가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시대와 지역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후 머릿속 구상을 구체화하는 연구와 실험을 거쳐 ‘디지털 산수화’의 초기작이 태어났다.

유현미의 뜻밖의 발견은 1997년 가을날 찾아온다. 작가는 아들과 함께 퍼즐놀이를 하다가 뒤집힌 퍼즐 한 조각을 발견했다. 완전한 형태의 그림을 추론하며 맞추어 가는 퍼즐의 앞면과 반대로, 그림이 없는 퍼즐의 뒷면은 내용은 없으나 구조를 갖춘 한 개의 조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순간 그림 없는 퍼즐을 목격하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하얀 퍼즐조각(무의식의 조각)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담은 ‘그림 없는 퍼즐’ 동화책을 직접 집필하며 잃어버린 무의식의 조각이 전체의 기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성동훈 '산 할아버지'
성동훈 '산 할아버지'

성동훈은 2009년도 국제사막 프로젝트를 위해 몽골 욜링 암 (Yolyn Am-독수리 계곡) 을 방문했을 때 바위산을 뛰어다니는 야생 산양을 목격하게 된다. 현지주민들이 산양을 산 할아버지로 부르며 오랜 친구, 가족, 수호신처럼 대하는 것을 목격한 작가는 산양의 형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구현하겠다는 창작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산양의 몸에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구현하기 위해 성동훈은 청화백자와 전근대의 동전을 재료로 산양의 몸과 뿔을 만들었다.

김성복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 연작이 탄생하기까지에는 두 번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이 있었다. 첫 번째 발견은 1970년대 초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흑백텔레비전에서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우주 소년 아톰‘시리즈의 주인공 아톰(atom)이었다. 아톰은 이름의 어원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인 원자(atom)에서 비롯되었듯 쪼개어지지 않고 단단하다. 두 번째 우연한 발견은 1980년 중반 그가 조각을 전공하던 대학시절, 처음으로 보았던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에 위치한 서산마애삼존불(국보84호)이었다. 소년 영웅 아톰과 백제인의 미소가 결합된 인간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이처럼 이번전시는 작가의 사유를 따라 영감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볼 수 있는 기회다. (사진 사비나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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