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의,. 국민보도연맹 성립배경

[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되었던 대한민국의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이 단체의 성립은 일제강점기시기 친일 전향단체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것으로 1948년 12월부터 시행된 국가보안법과 관련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전향자들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 감시할 기관이 필요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사상 검사로 유명하던 선우종원과 오제도가 결성 과정을 주도했다.

1. '국민보도연맹'은 1945년 6월 5일 결성된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반공 조직'으로, 가입자 수는 약 30만 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예비검속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때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창고·공회당·연무장, 그리고 인근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2. 미국 육군 소속 방첩부대인 CIC와 경찰·헌병 등은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활동을 심사해 'A·B·C·D' 혹은 '갑·을·병'으로 분류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과 고문이 수반되었다. 인민군에 밀려 군과 경찰이 급히 후퇴한 충청도, 전라도,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에 대한 심사·분류 작업도 없이 곧바로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3. 국민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예비검속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09년에 진행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와 국가 책임을 밝혀냈지만, 예비검속과 사살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4. 국민보도연맹 평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좌익관련자의 전향 조직으로서 반공활동과 교육, 그리고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살해이다. 조직결성 취지는 일제의 사상보국연맹이나 대화숙을 모방한 좌익 관련자들의 사상전향을 목적으로 '반공활동'을 주로 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이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연행된 후 집단학살된 것은 정부가 전향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직에서 소속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고 오히려 살해한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지난 2007년 7월 4일, 충북도청 기자실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가 주최하는 보도연맹과 관련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헌병대 6사단 상사로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참여했던 김만식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6월 27일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

그동안 한국 전쟁 직후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정부 최상층부에서부터 나왔을 것이라는 추정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통령 특명”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당시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주1)

이날의 회견에서 김씨는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 중에는 아주 순박하고 어진 평범한 시민과 농민이 많았다. 하지만 국가명령에 따라 처형집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헌병대 6사단에 소속돼 (대통령 특명을 받은 다음 날인) 28일 강원도 횡성을 시작으로 원주 등에서 많은 보도연맹원을 처형한 후 충북 충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보도연맹원에 대한 최초의 집단학살이 7월 1일 경기도 이천에서 있었다는 주장을 뒤집는 것이기도 했다.(주2)

그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나 증거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도 일부 확인되었다. 춘천 지역의 보도연맹원 일부가 예비검속되어 횡성지역으로 끌려와 살해되었으며, 횡성읍내 추동리 고개니 고개에서 보도연맹원 몇 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횡성 아래 지역인 원주에서는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판부면 금대리 일명 ‘가리패 고개’에서 살해되었다.(주3)

김만식씨는 또 “이후 충북 충주(7월 5일)-진천(5일, 조리방죽)-음성(8일 백마령고개)-청원(9일, 옥녀봉)-청원 오창창고(10일) 등에서 보도연맹 관련자를 처형하고 문경을 거쳐 경북 영주(7월 중순)와 문경(7월 15~16일), 상주(7월 중순) 등으로 이동하며 처형을 계속했다. 일부 지역의 경우 소총으로 안돼 기관총으로 일제 사격을 하기도 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처형 과정에서 다른 기관과 CIC의 역할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민간계통에서 보도연맹원 신청과 등록을 받았다. 이후 전쟁이 나자 각 경찰서별로 보도연맹원을 소집했다. 심사는 CIC가 했다. A․B․C급으로 나눠 A․B급은 모두 총살하고 C급은 설득시켜 군대로 보냈고 여자들은 훈방 후 요시찰 대상이 됐다. 헌병대의 경우 경찰서에서 보도연맹원을 인계받아 연대 헌병대 주관하에 보병과 경찰병력 일부를 지원받아 총살을 집행했다.”(주4)

경찰서에서 인계할 당시 신분장 같은 게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거 없었다. 그냥 경찰서에서 몇 명이다 하면 대충 숫자만 파악해 인계받았다. 강원도 원주비행장의 경우 상황이 급해서 구덩이도 파지 않고 총살 후 곧바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충북 오창창고 사건의 경우 “6사단 19연대가 맡았다”고 했고, 충북 옥녀봉 사건은 “6사단 7연대가 나갔다. 당시 증평에서 소집한 보도연맹원 일부를 지서장이 풀어줘 헌병대 장교가 증평 지서장을 권총으로 총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라고 증언했다.

▲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기관지『애국자』창간호.(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愛國者』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기관지로서, 주간으로 발행되었다. 발행은 7호까지 이어졌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재)한국연구원에서 입수한 창간호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중인 2호가 있다. 창간호 발행일은 단기 4282년(서기 1949년) 10월 1일이며, 편집인 겸 발행인은 박우천(朴友千)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간사장, 편집장은 장기환(장(張基煥)이었다.

이날 공개 증언에 나선 김만식씨는 전형적인 반공보수인사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1948년 헌병대 6사단에 배속된 후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처형과 관련 강원도 횡성 등 일부 지역의 현장지휘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며, 1950년 7월 대구 다부동 전투에 ‘육탄결사대’ 소대장으로 참전해 전과를 이룬 공로로 헌병대에서는 처음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주5) 그는 육군대위로 예편해 대한무공수훈자회 초대충북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처럼 평생을 반공전선의 일선에서 살아온 사람이 국가권력의 범죄행위를, 그것도 자신이 직접 관계된 일을 고백하는 것은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날 회견을 주관한 충북대책위원회는 “이번 증언은 진실규명운동에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용기 있는 증언에 박수를 보낸다”고 격려했다.

이때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날 김씨가 증언한 해당 지역에서는 모두 4,700여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김씨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많이 확인되었다.(주6)

가장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국가 범죄

해방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그리고 한국 전쟁을 통해 무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인민항쟁, 여순 사건, 4.3제주 사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사건 등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그 중에서도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아마도 한국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에 희생된 사건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한국 역사를 통해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특히 근현대사를 통해서 민간인들이 잔혹하게 학살되는 일들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국민보도연맹보다 더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성공회대학교의 김동춘 교수는 “국민보도연맹이야말로 단군 이래 우리 역사에서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가장 잔혹하고 비인도적이고 반국민적인 범죄”라고 평가했다.(주7)

▲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이하 NARA)의 북한 노획문서군(RG 242)에서 발굴한 보도연맹원 양심서.(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양심서의 작성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경기도 시흥군 서면 가학리(현재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행정동은 학온동) 주민 이선재(李善載) 외 7인이 보도연맹 가입 당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보도연맹 가입자의 본적과 주소, 가맹동기, 현재의 심경, 앞으로의 각오, 자기반성, 자기의 주위환경, 가입을 권유한 사람의 이름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들 소속은 민애청과 농민위원회로 기재되어 있다.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안양구(安養區) 서면분회(西面分會) 가학(리)반(班)으로 기재되어 있어 상위조직으로 구(區) 단위, 다음으로 면단위에서 분회(分會), 말단 하부조직으로 반(班)이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국민보도연맹원증 앞뒤면.(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이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맹원들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국민보도연맹이란 과거 남로당 등 좌익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거나 이와 관련한 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켜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전국에 걸쳐 30여만명(주8)의 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주9)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국가 권력에 의해 전국에 걸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학살자 숫자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고 최소 수만명에서부터 최대 30만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주10)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포괄적 과거사 정리기구’이면서 한국 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 학살 사건과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진실화해위원회의 경우에도 전체 진실규명을 요청한 신청 건수의 약 25%인 2,570건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이었다. 그만큼 민간인 학살 사건 가운데서도 비중이 높다는 이야기이다.(주11)

6.25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이승만 정부는 경찰 조직을 통해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을 소집, 연행하여 바로 살해하거나 일정 기간 구금했다가 집단으로 처형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 위험인물로 분류, 관리해오던 사람들을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예비검속․구금한 다음 그 어떤 법적 절차도 없이 살해했는데 이는 ‘즉결처형’ 형식을 띤 것으로써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의 경우는 한국 전쟁 당시 군․경 토벌작전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나 미군폭격 등에 의한 민간인 희생과는 달리 전국 각처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였으며, 피해인원이 대단히 많고 가해․명령 계통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국가 권력의 조직적인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전쟁 직후 반정부인사 또는 좌익인사에 대한 조직적인 처벌의 규모와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전쟁이라는 비상상황 하에서 국가 내부의 좌익 혐의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살상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사건에서는 좌익관련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대거 희생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국민보도연맹원의 예비검속․구금과 대규모 집단살해는 전쟁 시기 군․경 등 국가기관이 지속적으로 범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 이 사건은 인민군의 점령과 함께 여러 지역에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유엔의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인가?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검찰의 예비검속과 구금은 전쟁 발발과 함께 한강 이남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실시되었으며,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예비구금을 주도한 것은 경찰이었고,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부터 군(CIC)의 지휘 아래 처형이 진행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의 CIC(특무대)(주12)와 경찰 사찰계의 주도 아래 CIC(지구, 파견대), 경찰(정보수과, 사찰계), 헌병, 해군정보참모실(G-2), 공군정보처(G-2)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 등이 학살에 관여하였다.(주13)

▲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인 에버트 소령이 촬영했다. 이 사진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50년간 비밀문서로 분류돼 묶여 있다가 지난 1999년 말 해제됐다.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기 전 일부지역에서는 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중심이 되어 과거 활동을 심사하였다. 이때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으며, 활동 정도에 따라 ‘A․B․C(D)’(주14)나 ‘갑․을․병’ 등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서는 당연히 폭력과 고문이 수반되었다. 특히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서는 심각한 고문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연행된 후 심사․분류 절차도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되었다.

예비검속되어 구금된 보도연맹원 중 ‘A(갑)’로 분류된 주요간부들은 대부분 7월 초순경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은 인민군이 점령하기 직전 군․경이 후퇴하면서 살해되었다. 예비검속자 중 일부는 경찰의 묵인 하에 도망치거나 사적 연고, 금품 제공 등을 통해 풀려나기도 했다. 극히 적은 경우이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인명을 중요하게 여긴 경찰이나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풀려나 집단학살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추산이 가능한 몇 개 군의 경우 국민보도연맹원 중 약 30~75%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체 희생규모는 알 수 없었지만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1,000명 이상이 살해되었 것으로 추정되었다.(주15)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포함되지 못한 희생자들이 확인된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주16)

국민보도연맹원의 예비검속과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군․경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행된 사실을 놓고 볼 때 이승만 정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건의 가해자는 국가(정부)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보도연맹 조직결성 및 이후 학살에 이르는 전 과정의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사건에 대해 역사적 책임은 물론 실질적 책임이 있다.”(주17)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연맹 조직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입수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연맹의 분임과 각 반의 조직도, 맹원의 사진이 붙은 조직도로서, 각 지부의 연맹원 조직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규모와 조직체계를 추정할 수 있는 1차 사료이다. 서대문구 제1분회 맹원조직표 및 맹원수첩용 사진과 제1반, 제2반, 제3반, 제4반, 제5반, 부녀반 맹원들의 성명과 사진이 조직도에 붙어 있다. 조직표 및 맹원수첩용 사진과 제1반, 제2반, 제3반, 제4반, 제5반, 부녀반 맹원들의 성명과 사진이 조직도에 붙어 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국민보도연맹은 정부에 의해 결성․운영되는 관변단체였지만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임의단체였다. 가맹 대상자들은 자발적 의사보다는 대부분 정부의 강제적․폭력적 절차를 거쳐 가입되었다.

애초에는 좌익경력자가 국민보도연맹의 주요 가입대상이었지만 그 규정이 광범위하고 자의적이어서 좌익관련자들 뿐만 아니라,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도 감언이설이나 협박으로 상당수 가입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에 대해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요시찰대상으로 취급하였다.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으로 감시대상이 된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체제 아래서 ‘빨갱이’로 낙인찍혀 정치․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들에 대한 폭력행사도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이 남침을 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이 장차 북한에 동조하게 될 것을 우려해 이들을 곧바로 연행․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기 전 집단으로 학살하였다.(주18)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라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가 있어야 하지만, 당시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예비검속한 구금자들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한 것이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또한 이는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범죄행위로써 ‘인도에 반하는 범죄’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특정한 이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에 대한 국가 권력의 조직적인 학살행위로서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주19)에 위반되는 ‘특정한 범죄행위’, 즉 ‘집단학살(Gonocide)’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의 집단학살’ 사건인 것은 명백하다.(주20)

▲ 김해경찰서 『용공혁신분자조사서 - 6․25 當時 處刑者 및 同緣故者』.(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명부의 제목은 『용공혁신분자조사서』라고 되어 있지만, 안에 수록된 내용은 모두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인적사항이다. 따라서 이 자료의 실제내용은 ‘처형자명부’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서에는 김해지역에서 살해된 201명의 성명ㆍ본적ㆍ주소ㆍ생년월일ㆍ성별, 연고자와 ‘처형자’의 관계ㆍ성명ㆍ본적ㆍ주소ㆍ생년월일, 직업, 성별, 시찰급류, 비고(살해일자) 등이 기재되어 있다. 오른쪽 끝에 표시된 날짜가 살해일이다.

더욱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제주4.3사건이나 여순 사건 등 다른 학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부 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대한민국 정부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감시하였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하여 취업 등 사회생활에서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하였다.

그 때문에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국민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감시와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으며 그로 인해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주21)

반공주의와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결합

왜 이승만 정부는 자국의 국민을 이처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한 것일까? 국민보도연맹과 관련된 일부 인사들은 6.25 전쟁 발발 후 개성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인사들이 인민군 환영에 앞장 선 것을 예로 들면서 연맹원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 사건은 남한 정부에는 잠재적인 장애요소이면서 북한정권의 남한 점령에 중요한 인적 자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예방적으로 처치한 것으로써 남한정권의 안위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국민보도연맹은 국가가 나서서 과거 좌익경력이 있는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남한정부는 보도연맹의 조직함으로써 남로당 등 좌익세력을 뿌리뽑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이승만 정부)는 보련원들에게 진정으로 전향하면 국가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보도연맹원들은 그러한 국가(이승만정부)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수시로 이뤄지는 비상소집과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따랐고, 남한정부의 시책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남한정부는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한정부는 이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만 국민보도연맹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정말로 적의 인적자원이 될 위험성을 염려했다면 학살이라는 방법이 아니라 후방지대로 이동시켜서 그런 위험성에 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 맹원들을 부산 등으로 이송하기도 했으나 부산과 경남 등 미점령지역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학살한 것을 감안할 때 이들도 모두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이들이 적의 편으로 돌아설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방적 차원’에서 학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강 한 귀퉁이로 밀려간 상황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는 평소에 이들에 대한 불신과 잠재적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저항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국가를 누가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김동춘 교수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배경으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좌익 콤플렉스, 국가권력의 중추인 군대와 경찰에 남아 있던 일제 잔재, 반역 담론이나 의사 인종의 정치 같은 유교적 전통사회의 영향 등을 들고 있다.(주22)

우선,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가장 주된 지지기반은 이승만과 지주․자본가세력, 그리고 친일․친미 엘리트였는데 이승만은 권력 장악을 위해 일제 경찰 출신과 월남한 반공 극우 청년 테러단체들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제경찰의 나쁜 전통과 관행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대한민국의 친일경찰들은 일제 시대의 온갖 고문 기술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써먹었고, 좌익 탄압과 함께 무고한 사람들에게도 좌익 혐의, 빨갱이 굴레를 씌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경찰과 더불어 남한 사회를 극우 천지로 만들고 반공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했던 극우청년단 출신들의 활약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 정권의 주요한 지지기반이었던 극우단체이 회원들은 사실상 테러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나중에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 등을 거치면서 군대와 경찰 등에 들어가게 되는데, 호림부대, 백호부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하게 된다. 전쟁 이전에는 사적 폭력을 행사하던 깡패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전쟁과 함께 국가기구의 구성원이 되어 공공연하게 학살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주23)

이들은 역사와 사회적 정의와는 정반대로 양지만을 찾는 기회주의적 인간들이었고, 친일 콤플렉스를 가진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극우 반공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모두 빨갱이로 몰아가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고, 전쟁 발발과 함께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학살이라는 범죄 행위를 자행했다.

▲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직권조사 결정 기자회견.(진실화해위원회 3주년 활동현황)

다음으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주된 집단은 군대와 경찰이었는데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억압적 폭력적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경찰의 경우 친일 경찰이 그대로 조직을 장악했으며, 군대의 경우에도 만주군․일본군 출신이 군요직과 지휘부를 장악했다.

그에 따라 군대와 경찰은 일제 시대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민주공화국’의 공민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그대로 행사했다. 특히, “전쟁 당시 계엄민사부장으로 거창사건을 은폐하려 한 김종원과 특무대장이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부역자 색출과 학살에 가장 직접적으로 개입한 김창룡” 같은 인물이 활약함으로써 대량 학살은 자연스런 일이 돼 버리고 말았다.(주24)

이와 함께 당시 한국 사회는 전근대적 유교 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잔존하고 있었고, 이런 사회적 조건이 민간인 학살을 더욱 잔혹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반역적 사상’으로 규정하고 무차별적인 처형을 합리화했다.

이승만은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과 관련하여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하여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도록 하며 앞으로는 어떤 법령이 발표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없도록 방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상자가 없을 때 가족을 대신 살해한 ‘대살(代殺)’ 행위를 저지렀던 데서도 그러한 가족과 그 구성원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다.(주25)

결국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국가라는 이름 아래 ‘좌익’ 혹은 그와 연루된 사람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학살에 대해서도 법적․도덕적 부담을 덜어내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반공의 이름으로 ‘빨갱이 족속과 그 가족들’에 대해 어떠한 잔혹 행위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었고, 이는 학살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 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좌익이라고 지목되는 자를 살해하고 그의 처를 빼앗아 첩을 만들고, 그의 재산을 강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동춘 교수는 이런 행위는 “원시사회 정복전쟁에서 정복민이 피정복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나는 귀족들 간의 피의 살육․재산 약탈․영토 분쟁 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보았다.(주26)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유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이미 보도연맹과 유사한 사상전향자 단체가 있었는데, 당시 조직결성을 주도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원용했던 것이다.

▲ 공주시 상왕동 유해발굴지.(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공주시 상왕동 발굴에서는 모두 3개 지점에서 약 300여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2009년 공주시 상왕동(왕촌)의 유해 발굴 제1지구 전경이다. 이 현장에서는 충남지역 보도연맹원과 공주형무소 재소자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1937년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면서 조선에서 전향자들을 이른바 ‘사상보국전선’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7월 24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사상보국연맹)’을 만들었다.

사상보국연맹의 주요사업은 각 관찰소와 협력하여 비전향자를 포섭하고, 전향자의 생업을 도모하여 재범의 우려를 없애며, 궁극적으로는 황도선양․내선일체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상보국연맹은 조선총독부 법무국 관할의 사상범보호관찰소가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주27)

1941년 1월 일제는 사상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상보국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산한 후 재단법인 ‘대화숙(大和塾)’으로 통합하였다. 대화숙은 일본정신의 함양과 내선일체의 강화, 전향자의 선도․보호를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1941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비전향 사상범을 예방구금소에 강제수용할 수 있게 하였고, 5월에는 치안유지법을 전면 개정하여 전향을 거부하거나 보호관찰제도에 해당되지 않는 사상범들까지 예방구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주28)

사상범이 만기 출옥한 이후에도 보호관찰소가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감시결과 완전한 전향이 인정되면 비로소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보호관찰소의 감시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위반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예방구금할 수 있었다.(주29)

일제강점기 사상보국연맹과 대화숙을 실질적으로 지도․관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법무국(검찰 등)과 경무국(경찰)이었다. 사상보국연맹은 보호관찰소와 복심법원이 소재해 있는 전국의 7개소에 지부조직을 결성하였으며 그 활동을 관리․지도한 기관도 보호관찰소였다.(주30) 대화숙 또한 법무국 산하 보호관찰소장이 대화숙 지부 회장을 맡아 직접 지도하였다.

특히 전국의 읍ㆍ면 단위까지 조직이 뻗어있는 경찰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과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는 실무기관이었고, 사상보국연맹과 대화숙을 관리하며 사상전향자들에 대한 일상적인 관리와 통제를 전담하였다.

사상보국연맹․대화숙과 국민보도연맹을 비교해 보면, 이 단체들은 모두 좌익전향자를 소속원으로 하고 있었으며, 좌익전향자에 대한 ‘보도(保導: 보호하여 인도한다)’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하다.(주31)

그런데 그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1949년 이후 보도연맹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상범’을 구속, 사찰했던 검찰과 경찰 출신이었다.

먼저, 보도연맹은 검찰당국이 내놓은 것이었는데 보도연맹 결성안을 작성하고 제안한 사람은 오제도 검사였다.(주32) 결성 당시 검찰에서 보도연맹 결성에 관여한 인물은 대검찰청 차장검사 옥선진(보도연맹 부총재), 서울지검 검사장 이태희, 서울지검 차장검사 장재갑, 서울지검 검사 오제도․정희택․선우종원(주33) 등이었다. 또한, 보도연맹의 결성준비는 김태선 서울시경찰국장과 최운하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장이 주도하였다.(주34)

한편, 검찰은 보도연맹 창설 직후 각 지방검찰청에 정보부를 신설하여 보도연맹원에 대한 ‘교화전향 보도사업’을 담당케 하였으며, 보도연맹의 지방지부는 전국 각 경찰서 단위로 건설하였다.(주35)

그런데 검․경 간부들 중 보도연맹의 결성과 운영에 가장 깊이 관여한 인물은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으로 선출된 이태희, 장재갑, 오제도, 선우종원, 김태선, 최운하 등이었다.(주36)

이들이 보도연맹을 결성․운영하게 된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해방 전후 경력을 알 필요가 있다. 다음 <표>는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들의 해방 전후 경력이다.
최고지도위원 중 보도연맹 창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였던 4명(이태희․장재갑․오제도․선우종원)은 모두 일제강점기 검찰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최운하는 일제 말기인 1943년 12월부터 경무국 보안과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보안과는 사상범과 방송, 출판물 검열 등의 사무를 다루는 총독부 사상통제의 최일선이었다.(주38)

이들은 일제강점기 검찰과 경찰로 근무하면서 보도연맹과 유사한 단체인 사상보국연맹․대화숙을 직접 지도․관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보도연맹’이란 조직명도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했다.(주39)

보도연맹․사상보국연맹․대화숙의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보도연맹을 결성한 검찰과 경찰들은 일제강점기 ‘사상보국연맹․대화숙’을 본떠서 보도연맹을 창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이었던 선우종원은 2007년 10월 17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에게 한 증언에서 보도연맹의 모델이 ‘야마토쥬쿠(大和塾)’였다고 말했다.(주40)

결국,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결성되었지만 조직의 성격과 명칭, 운영방침 등은 일제강점기의 유산이었다. 보도연맹 창설을 주도한 검찰과 경찰 간부들은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이 운영․관리했던 사상보국연맹․대화숙․교외교호보도연맹의 조직 성격과 명칭, 운영방침 등을 원용하여 조직을 결성했던 것이다.(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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