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바탕으로한 재심외 추천 영화들

영화 한 편을 스마트폰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런 참변호사도 있구나와 왜, 약자에겐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는가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혹은 듣고 싶지 않거나 들어도 믿을 수 없었던 사건들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이 한국영화의 ‘정의’(正義)가 된 듯하다. 영화 <도가니>(2011) 이후 최근까지 쏟아져 나온 실화 소재의 영화들(이하 실화영화)이 미성년자 성폭행(<도가니>(2011), <소원>(2013), <돈 크라이 마미>(2012))과 장애인의 인권 유린(<들개들>(2014), <섬 사라진 사람들>(2016)), 정권과 사법부의 폭력(<남영동 1985>(2012), <부러진 화살>(2012), <변호인>(2013)), 대기업의 비인간적인 행위들(<또 하나의 약속>(2014), <카트>(2014)), 분명하게 존재하는 역사적 증언(<귀향>(2016), <눈길>(2017))과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3년 전 그 날(<다이빙 벨>(2014), <나쁜나라>(2015), <업사이드 다운> (2016))과 같이 많은 이들의 관심과 위로, 행동이 절실한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들이 ‘고발’이라는 단어와 늘 동행한다는 것 역시 그 방증이 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 이 영화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실제 사건 규명에 일조하는 등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는 실화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들이 정말로 정의로운지에 대한 질문은 불편한 것으로 삭제되거나 삭제돼야만 했다.

이 삭제의 이면에는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문제적인 사건들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하며 혹여 관심이 없거나 거스른다면 결코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없다는 거대한 압력이 자리한다. 영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이미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분노는 필수이며 그 분노는 결코 틀린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러한 강박이 그 사건을 다루는 가공의 세계까지 포용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믿을만한 영화적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 영화들이 가미한 여러 요소들이 적절한지를 따지는 일과 사건 자체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는 것은 절대 등가에 놓일 수 없다. 이 영화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의 이름으로 사건과 사건을 겪었던 이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민감해지는 것이 오히려 실제 사건에 더 가까이 가 닿는 방법일 수 있다. 위에 나열된 영화들을 떠올렸을 때, 그 실제 사건 자체의 모순이 아닌 피해자가 구타당하는 모습이나 가해자의 악랄한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면 과연 그 영화를 보며 느끼(도록 유도했)던 분노가 정확한 과녁을 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실화영화들이 믿고 있는 정의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이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정말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던 것인지를 고민할 즈음 영화 <재심>(2017, 김태윤)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00년 일어났던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당시 미성년자였던 소년이 누명을 쓰고 10년간 만기복역한 후 한 변호사를 만나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간단하게 언급한 스토리만 보아도 이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앞서 나열했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이 영화가 실제의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의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심지어 기존 실화영화들이 보여줬던 설정의 집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당겨 말하자면, 이 영화는 피해자에게 꽤나 폭력적이다.

실화영화의 소재가 되는 사건들을 가리키는 가장 흔한 수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표현이다. 상식의 경계를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너무도 쉽게 등장하는 ‘드라마’라는 용어는 사실 이와 정반대편에 서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선택으로 인한 우연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건 속에서 누군가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 우연들이 중첩된 결과이다. 현실의 돌발적인 상황들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며 그것은 상식의 범주를 바꿔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 한다. 그러나 재현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의 세계에서 우연은 허용되지 않는다. ‘믿을만한’ 이야기로 구성돼야 하는 재현에서 우연은 가장 먼저 배제돼야 하는 것이며 개연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요소로 칭송받는다. 그럴만하다고 고개 끄덕이게 만드는 순간들의 나열인 드라마, 그렇기에 현실은 늘 드라마를 뛰어넘는다.

그러니까 실화라는 현실의 사건이 영화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이미 있는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실화영화들이 해야 할 것은 그 사건 발생 혹은 그 사건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에 그럴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실화영화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소재로 선택한 사건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정의를 드러낼 방법을 찾아 다양한 설정들을 배치하고 실제 사건을 재현한다. 가령 <재심>에서 현우(강하늘)가 사건의 목격자에서 피의자로 전락하는 순간, 그가 그런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보이기 위한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15세 ‘다방꼬마’를 형사의 입을 빌어 ‘양아치 새끼’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 <재심>의 선택은 이렇게 시작된다.

<재심>은 살인자의 누명을 쓴 한 소년이 어떤 이유 때문에 재심에 이르게 됐는지, 재심의 과정 중 어떤 증거가 채택되고 거부됐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나가는 영화가 아니다. 표면적인 영화의 줄거리는 이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재심>은 재심의 첫 재판이 시작되는 것으로 끝을 맺으며, 그 이후의 결과는 자막이 대신할 뿐이다. 제목과는 다르게 이 영화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한 소년이 왜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나름대로’ 설정한 정의에 문제가 발생한다. 재심의 과정을 따지는 것과 한 소년이 피해자가 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의 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사법부라는 국가 기구의 구조적 문제를 전제에 두지만, 후자는 개인의 약점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즉, 피해자의 고통이 드러날 때에만 이 영화의 정의는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심>은 피해자를 심리적인 동정의 대상으로 내려놓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많은 실화영화들이 피해자가 당했던 고통과 공포를 반드시 스크린 위에 드러내고야 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재심>은 여러 기사를 통해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사자의 말을 굴욕적인 고문을 당하는 현우의 피멍든 몸과 얼굴로 굳이 재현해낸다. 여관방에 끌려가 형사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씬에서 현우는 단 한 번도 형사와 동등한 앵글로 잡히지 않으며, 형사의 다리 앞에 무릎 꿇은 현우의 몸의 구도로만 형사와 한 프레임에 놓인다. 팬티만 입은 채 형사들에게 폭행당하는 현우의 모습이 하이앵글로 마무리되는 이 씬은 피해자에게 이입하거나 혹은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피해자를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던 불쌍한 사람으로 거리를 두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현우의 모 순임(김해숙)의 설정 역시 현우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데에 일조할 뿐이다. 순임이 등장하는 첫 장면, 순임은 한 관공소를 찾아가 악을 쓰며 흰지팡이를 휘두르는 시각장애인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를 쓰며 공무원에게 대드는 나이 많은 순임의 모습은 그가 현우를 도울 수 없는 이라는 것, 교육의 정도도 경제적인 여건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쉽게 보여준다. 실제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는 사건에 대해 차분히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는 비장애인의 젊은 여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설정이 의도하는 것 역시 분명하다. 약한 이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상황. <재심>은 현우를 이러한 상황에 몰아넣는다.

이처럼 <재심> 속 피해자의 고통은 스크린 위에 전시된다. 이 장면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 실제의 사건을 직시하는 데에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폭력이라는 점에 있다. 현우에게 폭행을 가하는 영화 속 형사는 등장부터 욕을 입에 달고 있으며, 다방에서 새로 일하게 된 여성을 소개받고 그 여성을 희롱하는 그저 나쁜 놈에 머무른다. 이 같은 형사의 모습은 그가 조작을 해서까지 범인을 잡았어야 하는 이유를 그저 못된 인간의 광기 정도에 그치게 할 뿐, 이 사건에 이 외의 어떤 문제가 있을지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 늘 주눅이 든 채로 땅을 바라보며 말하는 현우를 폭행하는 형사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분노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 사건이 재심에 이르러야 할 만큼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현우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이 모든 상황을 타계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 영화는 현우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물론 실제 변호사가 있는 사건이지만, <재심>에서 변호사의 등장과 설정은 정확히 실화영화의 공식에 따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불쌍한 피해자의 서사인 전반부와 피해자를 도우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조력자의 서사인 후반부의 결합. 실화영화들은 대부분 이 구조 안에서 운용된다. ‘본의 아니게 이 상황에 끼어들게 된’ (대부분) 남성이 피해자를 만나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결말은 이 두 서사의 결합이 만들어낸 ‘감동 스토리’로 자리한다. 그러나 이 감동 사이에서 피해자의 모든 문제가 적절히 해결됐는지, 해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본인이 맡았던 소송에서 패배하고 위기에 처한 준영(정우)은 동기를 통해 대형 로펌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이를 위해 억지로 무료 변론을 시작해 만난 것이 현우이다. 현우를 만나면서 ‘속물’ 변호사였던 준영은 조금씩 변해 가는데, 이때 동력처럼 작동하는 것은 현우가 겪는 괴로움이다. 재심을 권하는 준영에게 더 이상 법을 믿을 수 없다며 갈등하던 현우가 ‘전 재산’이라며 자신이 모아온 일당을 받은 준영은 현우의 정식 변호사가 된다. 이후 준영은 현우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들을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 사이사이 끼어드는 현우의 상처 입은 얼굴들이 준영이 이 사건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유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현우가 겪었던 일을 준영에게 이야기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플래시백과 위증을 했던 친구를 찾아 벌이는 난투극, 15살 때 자신을 때렸던 형사와 맞닥뜨려 눈앞이 흐려질 만큼 공포에 떨고 급기야 형사를 찾아가 그를 때리고 칼로 위협하는 장면까지 현우는 끝내 이 영화가 설정한 폭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우의 고통은 준영의 변화를 설득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이 도구는 너무나 잔인하다.

‘나름대로’의 정의가 피해자의 피해에만 주목할 때 오히려 피해자는 영화에서 고통 받거나 사라진다. 무죄선고를 받기까지 16년이 걸렸던 한 인간의 시간이 이 영화에서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심>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물리적 폭력으로 단순화 시키면서 그가 놓쳐야만 했던 시간들, 그 사이 그가 느꼈을 절망들, 혹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은 쉽게 삭제한다. 게다가 <재심>은 이 많은 폭력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쉽게 위로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한 변호사가 어떠한 법적 지식도 없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명쾌한 답을 내려주고 박수 받는 장면이나, 양복을 입고 어색해하는 현우의 등을 두드려주며 응원하는 예의 그 따뜻해 보이는 장면만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 단순함은 두 남자주인공의 눈물이 자주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방관자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기엔 그곳에 피해자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재심>스크린을 찾지 못하여 미안 함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은 피해사실이 없다는 자유로움이 나의 일 처럼 기쁘다.

서울대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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