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項羽】 이상에 따라 살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다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 그러나 지도력의 한계에서 결국 무너지다

초한전쟁 초기와 중기까지 유방은 항우에 비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 항우가 패배하고 말았다. 항우의 실패는 어느 정도 그의 성격으로 인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방은 비록 깡패 출신이긴 하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충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재를 활용했고 대사를 도모함에 있어 어떠한 대가도 감수했다는 것이다. 반면 항우는 영웅이기는 했지만 천성적으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행적을 ‘아녀자의 덕’으로 돌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예컨대 그는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를 앞장서서 빨아줄 줄 알았지만, 장수들에게 기분 좋게 봉상(封賞)하지는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장군을 임명하는 대인(大印)을 새겨놓고도 망설이며 만지작거리고 손에서 떼지 않아 손잡이가 다 닳아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대담하게 인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주위의 인재들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유부단하여 의심이 많았던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진평(陳平)은 항우의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그의 유력한 조력자들을 제거했다.

무엇보다도 진평의 이간책(離間策)에 말려들어 범증(范增)을 잃은 것이 항우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사실 구체적인 상황은 천차만별이지만 이간책의 본질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 핵심은 상대방이 의심을 품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전한 3년(BC 204) 초, 초한 양군은 형양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항우의 병력이 형양을 포위하여 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해버리자 유방은 매우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한군은 군량과 마초가 부족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선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결국 유방은 항우에게 사자를 보내 화의를 청하면서 홍구를 경계로 형양과 성고 이동 지역은 초가 차지하고 이서 지역은 한이 차지하여 무장을 해제하자고 제의했다. 항우가 사자의 말을 듣고 화의를 수락하려 하자 범증이 말했다.
“유방은 곧 패할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의 땅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애당초 ‘홍문의 연회’에서 한 번 기회를 잃었는데 이번에도 유방을 멸하지 못하신다면 장차 그의 손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항우는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화의를 거부하고 곧장 출병하여 형양에 맹공을 퍼부었다.

유방은 화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형양성 안에서 종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불안에 떨던 유방이 진평에게 말했다.
“천하가 이처럼 갈가리 찢긴다면 언제 이를 다시 수복할 수 있겠소?”
“대왕께선 지금 항우를 걱정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항우의 수하에 범증과 종리매(鍾離昧) 등 몇 명의 충신들이 있긴 하지만, 항우는 의심이 많고 고집이 세기 때문에 인사를 밝게 살피지 못하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지요. 대왕께서는 거금을 들여 초나라 사람들을 매수하신 다음,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쓰십시오. 그러면 항우와 그의 신하들은 서로 의심하며 뜻을 한데 모우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초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초를 멸하고 한을 흥성케 할 수만 있다면 재물이야 아까울 게 어디 있겠소.”

유방은 즉시 명령을 내려 금 4만 근을 진평에게 주고 이간책을 꾸미게 했다. 금을 가지고 처소로 돌아온 진평은 곧장 심복인 소교(小校) 등 몇 명을 불러 초군 사병으로 변장시키고, 금을 주어 초의 병영으로 숨어 들어가 초왕 신변의 인물들을 매수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며칠 후 초군 진영에서는 종리매가 군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분봉을 받지 못한 데 불만을 갖고 한과 연합하여 초를 멸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걱정하고 있던 항우는 유언비어가 돌자 이를 그대로 믿고, 종리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며 만반의 방비를 다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항우는 화의를 명목으로 한군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성안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진평은 초의 사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방과 상의하여 함정을 마련해놓고 초의 사자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형양성으로 들어온 초의 사자는 곧장 한왕부로 가서 유방을 알현했다. 유방은 술에 취한 척하며 되는 대로 몇 마디 늘어 놓고는 진평을 불러 사자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진평은 초의 사자를 객관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자 시종들이 미리 준비해둔 술과 푸짐한 안주를 내왔다. 진평은 유방의 부탁을 받고 대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라 무슨 영문으로 사자가 찾아왔는지도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범 아부(亞父)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분의 책을 가져오시진 않았는지요?”

초의 사자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금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난 초왕의 명령을 받고 화의를 위해 온 것이지 범 아부가 보내서 온 것이 아니요.”

진평은 이 말에 짐짓 놀라는 척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셨군요!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진평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나와 버렸다. 초의 사자가 막 음식을 먹으려 하는 순간 시종들이 들어와서 차려진 음식을 전부 거둬가더니 형편없이 초라한 음식을 다시 내왔다. 초의 사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는 그 길로 곧장 주린 배를 움켜쥐고 초의 군영으로 돌아와 버렸다.

영내로 돌아온 사자는 곧장 초왕을 알현하고 형양성에서의 일을 다소 과장하여 얘기했다. 특히 범증이 한왕과 내통하고 있으니 철저히 방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는 그리 교묘한 이간책도 아니었다. 조금만 세심하게 따져보면 진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미가 급하고 의심이 많은데다가 지혜롭지 못한 항우는 사태의 전말을 깊이 생각할 줄 몰랐다. 사자의 말에 항우가 대로하여 말했다.
“전에도 이미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은 바 있지만 오늘에야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구나!”

그리고 당장 범증을 잡아다가 죄를 물으려 했지만 대신들이 말리는 바람에 잠시 분을 참았다. 하지만 이후로 다시는 범증을 신임하지 않았다.

범증은 항우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일체 딴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항우가 화의를 위해 공격을 중지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항우를 찾아가 공격을 늦추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항우가 격분하여 말했다.
“서둘러 형양을 공격하다가는 성을 빼앗기도 전에 내 목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범증은 무턱대고 화만 내는 항우의 태도에 기가 막혀 당장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성격이 급한 항우가 누군가로부터 유언비어를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항우에게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며 초를 도와 한을 멸하려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충언을 듣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데 대해 크게 마음이 상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항우에게 말했다.
“이제 천하의 대세가 정해졌고 대왕께서 모든 일을 뜻대로 하시니 늙고 병든 소신은 이만 고향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를 항우도 붙잡지 않았다. 본영으로 돌아온 범증은 사람을 시켜 항우에게서 받은 인수를 돌려보내고 그날로 고향으로 떠났다. 초나라의 강산이 장차 유방의 손으로 넘어갈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얼마 후 그는 등에 악성 부스럼이 돋기 시작했으나 의원을 찾지 못한데다가 여로의 피로가 겹쳐 피를 쏟으며 죽고 말았다.

유방과 비교해 볼 때, 항우에게는 영웅적인 기질이 훨씬 많았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그의 용맹성은 ‘역발산기개세’라는 명성을 얻었고 강직하고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구분하는 성격으로 부하들을 사랑하고 도의를 중시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성격적 특성들이 제왕의 길에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유방처럼 교활하고 몰염치하며 잔인하고 음흉한 성격을 갖지 못했고 유방이 지녔던 빼어난 재능과 지략을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진평의 이간책에 걸려들어 훌륭한 조력자와 충신들을 잃었던 것이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항우의 영웅적인 기질은 영원한 매력을 지닌 채 비극적인 영웅으로 기록되면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감정적인 치우침에 불과하다. 항우의 실패를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영웅이란 이상에 따라 살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형임을 알 수 있다. 영웅과 정치가는 서로 상충하는 인간형인 것이다. 진정한 영웅들이 종종 아녀자의 인자함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웅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이기도 하면서 실패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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