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선문답(禪問答)에 대해서 물어오셨습니다. 불교는 너무 어려워 가까이 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배움이 약한지라 이를 말로 다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아는 한 말과 글로 답을 드리기로 약속을 드렸습니다.

선문답이란 불교에서 조사(祖師)가 수행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과제와 그에 대한 수행자의 대답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도의 선지식(禪知識)이 있는 스승과 제자가 맞상대를 할 때 가끔 의중을 엿보기 위해 선문답으로 말을 걸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두(話頭) 또는 의두(疑頭)라고도 하지요.

화두란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 문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수행자끼리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 주고받는 문답형식의 대화. 다른 말로는 법거량(法擧量) 혹은 법담(法談)이라고도 합니다. 논리나 상식, 지식을 초월한 직관적이고도 역설적인 대화로서, 이런 방식을 통해 선리(禪理)를 드러내고, 지고(至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선사(禪師)들의 한 마디 언행은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게 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 살아있는 법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선문답은 옛 선사들이 수행자를 깨닫게 하는 언행일 뿐만 아니라 그 언행 자체에 깊은 진리와 지혜가 응결돼 있어서 말끝에 단박 깨닫는, 즉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자는 것이지요,

선문답은 탈 상식, 초 논리의 대화입니다. 상식적인 대화로는 관념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역설적 비약적인 방법이라야 백년, 천년 묵은 관념의 벽이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상식이나 지식, 논리를 초월한 것입니다. 선문답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논리와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공(空), 중도(中道), 불이(不二), 일여(一如), 무심(無心), 무집착(無執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으로,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잡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들으면 비약이 심해 뭐가 뭔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선문답의 유래는 서가모니가 영산설법(靈山說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빙긋이 미소를 띈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염화시중(拈花示衆)’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말을 통하지 않고 통하는 진리로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자를 세울 수 없는 진리는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선문답이 아니면 해탈의 경지는 도저히 언어를 통해서 밝힐 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여기 특이하게도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밝았던 다산(茶山 : 1762~1836)의 선문답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다산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침교 법훈(枕蛟 法訓), 초의 의순(草衣 意恂), 인허만순(印虛 萬淳) 세 선승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이 선문답을 보면, 다산은 뛰어난 선지식(禪知識)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다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높고 깊은 선문답에는 누구나 감탄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순이 “어떻게 해야 티끌이 가득한 세상에서 쇄탈합니까?” 라고 묻자 다산은 “가을 구름사이의 한 조각 달빛(秋雲一片月)”이라 답합니다. 의순이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실제 일을 실천합니까?” 다산이 답합니다. “날리는 꽃 서울 하늘에 가득하다(飛花滿帝城)”라고 말합니다.

또 법훈이 묻습니다. “깨달음의 관문을 어떻게 터득합니까?” 이에 다산은 “나는 새 그림자가 차가운 방죽을 건너가누나(鳥影渡寒塘)”라고 답합니다. 어떤 고승이 그런 정도의 선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법훈 · 의순 · 만순 등 제자와 같은 젊은 학승들의 인품과 사람됨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이 지닌 약점을 보완하여 수준 높은 선승(禪僧)이자 학승(學僧)이 되도록 올바른 가르침을 내린 것은 놀랄 일입니다. 40세 이후 귀양 살던 시절에는 다산초당 인근의 스님들과 어울리며 불교 경전도 연구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법거량이 아니었을까요?

어떻습니까? 이제 선문답이 무엇인지를 대강은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어찌 쉬운 새 불교를 두고 어려운 옛 불교를 알려고 하시는지요? 2564년 전에 지은 옷이 오늘 날 우리 현대인에게 맟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시대화 · 대중화 · 생활화> 된 새 불교가 탄생 된지 100여년이 지났습니다.

원불교의 목적은 이 세상 일체생령(一切生靈)이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광대 무량한 낙원에서 다 함께 잘 사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불교처럼 어려운 불교가 아닙니다. 간단하고, 명확하며, 쉬운 새 불교입니다. 화두도 20개의 의두요목으로 간소화 했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도 개벽하자는 것이지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3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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