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늙어 가는 길

저는 원불교에 귀의(歸依)한 후, 한 번도 법회를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거의 두 달 이상 좋아하는 교당에 달려가 법회도 못 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하는 바람에 누가 <덕산재(德山齋)>에 오고 가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방콕’입니다. 그럼 이 미증유(未曾有)의 호기에 무얼 하고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평생 길러 보지 못한 수염을 길러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또한 아름답게 늙어가는 길이 아닌 가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랬더니 손주 녀석이 따갑다고 뽀뽀도 안 해 주고 도망갑니다. 아내는 음식이 수염에 묻어 지저분하다고 깎으라는 성화가 빗발칩니다. 그래도 교당에 법회 보러 갈 때까지 길러보려고 버텨보지만 아무래도 제가 손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정말로 아름답게 늙어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시인 윤석구님의 <늙어가는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씩 낭송(朗誦)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늙어 가는 길> 詩/ 윤석구

『처음 가는 길 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 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 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 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 답 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늙어가는 길이 초행(初行) 길이긴 하지만 이 또한 걸어갈 만한 아름다운 길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나이 들기는 쉬워도 아름답게 늙어가기는 어렵습니다. 은퇴한 노인들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많아집니다. 사회활동이 거의 없어지는데다 자녀들도 바쁘다는 이유로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쓸데없이 수염도 길러보고, 이것저것 간섭도하고 불평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노인들이 불평을 늘어놓으면 자식들은 성가신 잔소리로만 받아들입니다.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저기 아프다는 소리만 늘어놓으니 자식들도 달리 도와줄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되풀이되는 부모의 불평을 듣는 일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은 노인들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품위 있게 지내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질병에 대한 불평과 엄살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열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는 동안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넷째, 재색명리(財色名利)에 초연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혹 원한이 있으면 풀고 가야 합니다.

여섯째, 내생을 위한 정신 · 육신 · 물질로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일곱째, 기도와 참선(參禪)으로 정신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여덟째, 내 한 몸, 내 한 가정을 뛰어넘는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언제 죽어도 좋게 죽음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열 째, 신앙과 수행으로 영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만 실행해도 우리는 가히 아름답게 늙어가는 길을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발자취는 땅에 남고, 마음이 발한 자취는 허공에 도장 찍힙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생 자취는 끼쳐 둔 공덕으로 세상에 남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아름답게 늙어가는 길을 두고 추하게 늙어 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저 역시 아내의 성화에 일생 처음 길러보는 수염을 깎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늙어가는 것이 저의 매력이라고 하네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3월 2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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