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돌 13:38 new 반갑습니다. 오래 전부터 깊이 좋아했던 무량대복(無量大福)을 검색하면서 2016-11 에 띄우신 김덕권 칼럼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우리 덕화만발에 다시 한 번 보여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덕산님! 안녕~~~」

「하얀 돌 이성조님!

대단한 결례를 했습니다. 얼마 전에 하얀돌님께서 다시 한 번 올려 달라고 요청하신 2016년 11월 23일자 저의 졸문 <무량대복(無量大福)>을 그만 준비를 해 놓고도 깜빡 해버려 이제야 올려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공부하시는 셈 치고 읽어 주시지요!」

『가만히 세상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늘 복을 지으며 사는 사람도 있고, 복을 까먹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복(福)’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정해진 실체가 없기에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 이에게는 하늘이 무량대복(無量大福)을 내려 주시지만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그릇 만큼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량대복을 받으려면 무량한 그릇을 키우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리 복이 많다 하더라도 그 복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그릇을 키운다는 것은 몸과 입과 생각(身口意)을 잘 다스려 일상 그 자체가 복 짓는 일이 안 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그 복을 받으려면 진리께 “진리님 복을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복은 짓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은 받으려는 대상에 매달리게 되지만, 짓고 자 하는 마음은 내 스스로의 것이라 매달리거나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지어먹는 복은 내가 짓는 밥처럼 내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지는 복, 얻는 복, 받는 복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을 내 것으로 만들고, 무량대복을 사용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복 짓는 연습을 잘하여 능숙하게 복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릇을 키워 무량대복을 받는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첫째,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하는 것입니다.

보시보다 큰 공덕은 없습니다. 자신이 땀 흘려 번 돈으로 은혜를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 베 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재산이 없으면 몸으로 뛰는 것입니다. 몸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으로 상대방이 잘 되라고 빌어주면 그것도 큰 공덕입니다.

둘째, 집착을 끊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 했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 때문이지요.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는 욕심,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집착, 더 아름다운 이성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집착을 끊고 놓아버린 만큼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겸양 이상의 미덕은 없습니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합니다.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복은 내리지 않습니다. 오체투지에서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어 모든 이를 존중하고 공경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넷째, 관인후덕(寬仁厚德)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누가 못 봅니까?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말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너그럽고 부드럽게 덕을 베푸는 것이지요.

다섯째,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인욕(忍辱)으로 원한을 멈추는 것입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그 원한은 그쳐지지 않습니다. 참고 견디는 사람이 가장 큰 복을 받습니다. 인욕은 어려운 일만 참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참는 것도 인욕이지요.

여섯째, 진리를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적이고 도덕적이며 진리적인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질 때에는 열 가지 법을 비교해 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종교에 귀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 화 대중화 생활화된 종교를 선택하면 바로 그것이 큰 복입니다.

일곱째,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닙니다. 실천하는 것이 힘이지요. 자비가 실천되지 않으면 무자비가 됩니다. 일체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자(慈)요, 일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비(悲)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자비는 실천되었을 때 존재하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여덟째,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웃음꽃에는 천 만 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돈 안들이고 복을 짓는 방법이지요. 찡그리고 화난 얼굴에 복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화열(和悅)과 인자(仁慈)가 넘치는 모습에 무량대복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저는 <하하하하하하하!> 하고 웃고 있지요.

아홉째,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소망성취의 열쇠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세상과 일체생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한 몸, 내 한 가정을 뛰어넘는 기도에 영험이 깃 듭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는 맨 나중에 비는 것이지요.

열째, 조금 손해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기쁘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손해가 손해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금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위해 맨발로 뛰는 것입니다. 결국 손해를 본 만큼 무량대복은 찾아오는 것이니까요.

어떻습니까? 이 열 가지만 실행해도 무량대복이 찾아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으시는가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입니다. 하늘은 짓지 않은 복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짓지 않은 죄를 받지 않는 것이지요.(天不降不作之福 人不受不作之罪)

그래서 원(願)은 큰 데에 두고, 공(功)은 작은 데에부터 쌓으며, 대우에는 괘념치 말고 오직 공덕 짓기에 힘을 쓰면 큰 공과 큰 대우가 돌아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사람이 한 세상 살고 갈 때에 의(義)가 넉넉해야 하며, 덕(德)이 커야하고, 원(願)이 높아야 대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복짓기를 세상에서 몰라준다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공정한지라 쌓은 공이 무공(無功)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며, 같은 덕이라도 음덕(陰德)과 무념(無念)의 덕이 최상의 공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복 받는 그릇을 키워 무량대복을 받아 보지 않으시려는지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3월 2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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