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

이 말은 『손자병법』 「형편 形篇」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은 다음에 싸우려 하며,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우자고 달려든 다음에 승리를 구하려 한다.

이른바 ‘선승(先勝)’이란 정확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주도면밀하고 실제상황에 알맞은 작전계획과 준비를 전제로 한다. 정확한 전략과 전술은 머릿속 상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착오 없는 군사 정보에 근거하여 적과 나의 군사 실력을 과학적으로 대비함으로써 ‘지피지기’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손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와 장수가 움직였다 하면 승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성공을 거두는 까닭은 적을 먼저 알기 때문이다.”(『손자병법』 「용간편」.) ‘선승’은 군사 책략의 기본적 요구사항이자 조건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성공적이고 돋보이는 전례치고 지휘관의 ‘선승이후구전’이라는 군사 사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명나라 말기 이자성(李自成)이 양양(襄陽) 회의에서 정확한 진군 계획을 수립한 다음, 순조롭게 북경에 진군하여 명 왕조의 봉건 통치를 뒤엎은 것도 이 전략 사상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서울 광진구와 구리를  통하는 아차산 ⓒ 안데레사 기자
서울 광진구와 구리를 통하는 아차산 ⓒ 안데레사 기자

1643년 5월, 이자성이 이끄는 봉기군(蜂起軍)은 호북(湖北) 양양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봉기군의 북벌에 따른 전략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 회의에서는 북벌에 따른 기본 전략에 관해 대체로 두 가지 의견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하북으로 진격하여 곧장 북경을 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양양을 거점으로 수비하면서 북경으로 가는 명나라 군대의 식량 운송을 단절시키고 기회를 엿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병부종사(兵部從事) 지위에 있던 고군은(顧君恩)은 이 두 가지 의견에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곧장 북경으로 쳐들어갔다가 만에 하나 승리하지 못하면 후방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의견은 너무 성급한 면이 있다. 양양에 체류하다 보면 장기간 장강의 중‧하류에 머무르는 꼴이 되어 명 왕조를 뒤엎는 대업을 빨리 완성할 수 없다. 그러니 이 견해는 너무 느리다. 그는 대안을 내놓기를, 먼저 하남을 거쳐 관중을 탈취하자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섬서 지역은 봉기군의 총수 이자성의 고향이어서 민중의 지지기반이 튼튼하므로 이곳에 거점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곳의 인력과 물자를 가지고 산서(山西)를 공격한 후 북경을 취한다. 이렇게 하면 전진하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나면 지킬 수 있으니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책략이라는 것이었다.

이자성은 고군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봉기군은 빠른 속도로 동관(潼關)을 탈취한 다음 서안으로 진군했다. 서안에서 봉기군은 양양에 건립한 정권 조직을 더욱 단단히 다지고 확대하는 한편, 섬서성과 감숙성 각지를 공략하여 섬서성 근거지를 확보했다. 이듬해 봉기군은 섬서성의 근거지에 의지하여 북방 명나라 군대가 약해진 틈을 타서 산서로 진격했다. 그리고 10월, 순조롭게 북경으로 진군하여 명나라 왕조 통치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래의 전쟁은 군사력의 대항일 뿐 아니라 경제력을 포함한 종합적 국력의 싸움이다. 이른바 ‘총력전’이다. 또 한 전쟁 실력의 겨루기일 뿐 아니라 전쟁 잠재력의 총체적 비교다. 강력한 전쟁 잠재력을 갖춘 쪽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것은, 싸우지 않고 미리 승리하는 창조적 조건을 갖추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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