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세를 통찰한 냉엄한 승부사 -下-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인가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인가

허창으로 돌아온 조조는 전란으로 파괴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시책을 모색한다. 먼저 전몰병사들의 유가족을 위해 토지를 분배하고 학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문헌전적(文獻典籍)의 연구와 인재 교육을 위해 500호 이상의 마을마다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배경에는 조조 자신이 학문을 즐겨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들 조비(曹丕.-187~226)가 쓴 『전론(典論)』에는 아버지 조조가 시서와 문적을 좋아하여 비록 전쟁터라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다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202년, 원소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다. 기주목에 부임하여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자 세금을 면제하고 호족들의 세금 수납을 일정하게 정하여 착취를 억제하였다. 이후에도 원소가 차지하고 있던 청주, 병주를 평정하게 된다. 이로써 조조의 최대 숙적이던 원소군은 전멸하게 된다. 그리고 북방에도 둔전제를 시행하여 행정조직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결국 동북방에서 세력을 떨쳤던 오환족(烏丸族) 20여 만 명이 투항하게 되어 변방인 요동(遼東), 요서(遼西)지방까지 평정시킬 수 있었다. 이해에 유비는 형주(荊州)의 융중(隆中)에 있는 제갈량을 찾아가 군사(君師)로 맞이했다.

208년, 조조는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른다. 군사와 행정을 장악한 조조가 형주로 진군하자 유종(劉琮.-유표의 차남)이 투항한다. 한편 조조군을 피해 남으로 달아났던 유비는 제갈량(諸葛亮.-181~234)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남의 손권(孫權.-182~252)과 동맹을 형성하여 적벽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은 수전경험의 부족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타격을 입고 퇴패(退敗)하게 된다. 이리하여 조조의 천하통일의 꿈은 멀어지고 남북의 대치국면이 형성된다. 이때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여 익주(益州)로 세력을 확대하고 손권은 강남에서 입지를 확고히 한다. 이로서 천하가 삼분(三分.-훗날 위, 촉, 오의 삼국)되는 형세에 이른다.

이후 조조는 내정에 주력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공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조는 일대 개혁정치를 펴는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재능과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과거의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장료(張遼.-?~222), 장합(張合.-?~231), 가후(賈詡.-147~223)와 같은 적장(敵將)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조조의 인재경영술은 무엇보다도 능력 위주의 발탁과 적재적소의 배치,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핵심이었다. 이처럼 ‘구현령’은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이다. 이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인재가 모이고 국가는 더욱 강성해졌다.

당시 중원에서 한중(漢中)의 장로(張魯)와 관중(關中)의 마초(馬超), 한수(韓遂)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먼저 관중을 평정한다. 또 진군하여 한중을 평정하고 참모 하후연(夏候淵)을 주둔시킨다. 이때 헌제는 조서를 내려 조조를 위왕(魏王)에 봉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고조 때 공신이었던 소하(蕭何)의 경우처럼 조정에서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손권과 연대하여 형주의 관우군을 격파시킨다. 조조는 신하의 입장을 취한 손권을 형주목에 임명하고 관우의 장례를 제후의 예에 따라 치러주었다. 다음 해인 220년 조조는 당시 66세로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아들 조비가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위왕조를 세웠던 것은 그로부터 9개월 후였다. 조비는 연호를 황초(黃初)로 바꾸고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로 추존하였다. 다음 해에는 촉한(蜀漢)의 유비도 재위에 올랐고, 손권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위나라 문제(文帝.-조비)로부터 오왕(吳王)으로 봉해진다.

조조에 대한 평가는 한(漢)나라를 계승한 왕조의 정통론에 따라 달라진다. 진(晋)나라 때 지어진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한(漢), 위(魏), 진(晉)에 근거한 정통론에 따라 위를 정통으로 본다. 북송시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資治通監)』에서도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조조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남송시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춘추 사관에 입각하여 유비의 촉한 정통론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때부터 조조의 이미지는 간웅(奸雄)과 난신(亂臣)으로 고정화 된다. 이러한 반(反)조조의 감정은 민간 문예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명나라 나관중이 지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촉한의 유비에 맞서는 조조는 ‘난세의 간웅(奸雄)으로 묘사된다. 이후 소설『삼국지연의』는 어떤 역사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흥미를 유발하여 수많은 독자에게 읽혔다. 즉 일반 대중들에게 『삼국지』는 정사(正史)의 역사책보다는 ’칠실삼허(七實三虛.-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 로 평가받는 소설 『삼국지연의』가 널리 유포되었다. 그런 까닭에 조조는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간웅과 악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친숙하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대략 선조(宣祖.-1552~1608) 재위기간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가 『삼국지연의』를 읽는 것을 경연관(經筵官)이었던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만류한 기록이 나온다. 이후로 많은 유학자가 정사의 역사적 정통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연의(演義)를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인 연의를 배격한 이면에는 그만큼 널리 읽혔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가 이미 17세기에는 민간에서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9세기에는 상업출판의 성행과 더불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상제님께서도 당시 민중들에게 유행하였던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와 관계된 한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되게 하고 못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빈(孫臏)의 재주는 방연(龐涓)으로 하여 마릉(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의 재주는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데 있느니라.(교법 3장 28절)

중국 역사에서 조조는 정치, 군사, 경제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통치자였으며, 많은 시를 남긴 훌륭한 문학가였다. 이와 같은 조조를 송나라의 소식(蘇軾.-1037~1101)은 “술을 걸러 강가에 가고, 창을 옆에 끼고 시를 읊었다. 진실로 일세의 영웅이다.”라고 했다. 조조는 주해서(註解書)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를 남길 만큼 병법(兵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용병술을 지닌 인물이다. 이러한 조조의 능력은 난세를 평정한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둔전제의 실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교육제도의 정비 등 적극적인 민본정책을 강구한 정치가였다. 정사 『삼국지』에서 드러난 그의 업적과 삶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희대의 영웅이라 평가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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