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설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으로, 설치 위치와 방식을 이유로 비판받았다. 이후 KIST 측의 해명이 있었지만 비난의 시선은 여전하다.

[뉴스프리존=김종용기자] 시국이 혼란한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사업들은 막힘없이 추진되고 있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100주년 기념식 추진 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특히 위원회 측에서 밝힌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의 광화문 설립 계획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철거 문제로 시끄럽다. 충남 아산시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사당인 현충사(顯忠祠) 역시 또 하나의 대한민국 현충원이다. 이 사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이후 퇴락을 거듭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사 주도로 중건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한 뒤 대한민국을 본격적인 국민국가로 개조해가는 과정에서 현충원에 버금가는 추모 시설로 거듭난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재위시절 이순신의 공적을 기려 현충사에 직접 현판을 사액했지만 현재 현충사에는 숙종이 아닌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순신 종가는 현판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예컨대 문무를 겸비한 고독한 영웅, 결사항전의 정신을 가진 충신 이미지는 대중에게 호소하기 쉬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다른 배경을 가지지만 역사적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는 조정 대신들의 권한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충신 이순신’에 주목했다. 그 후 일제시대 국권을 잃은 상황에서 『이순신전』을 쓴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이순신은 다시 주목받는다. 박정희는 이순신의 군인 정신을 강조해 자신의 신분적 컴플렉스를 만회하고, 그와의 동일화를 통해 고독한 영웅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거기에는 기존 제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의 충성심을 국민들에게서 유도해내려는 국가주의적 사관도 작용했는데, 충무공의 충성을 기린다는 뜻의 '현충(顯忠)'이라는 현판을 임금이 직접 내리면서 현충사는 성역으로 거듭났고 오늘날까지도 초임 군 장교나 경찰공무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성역화 사업을 거쳐 현충사는 1967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당초 현충사는 조선시대의 개인 사당으로, 그 규모 역시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성역화를 통해 새로 문을 연 현충사는 경내 면적만 16만3000평을 헤아린다. 또한 이순신 영정을 모신 본전을 필두로 유물관과 고택, 활터·홍살문·정려 등의 각종 시설이 화려하게 배치되었다. 이순신의 실제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에 그려진 초상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충사에 모셔진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른바 표준 영정이다.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 일제(日帝)의 이순신 가문 탄압도 모두 견뎌내며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1932년에는 조선인들이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지켜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순신으로부터,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국민의 이상형’을 발견해내려고 했다. 이순신은 박정희를 통해 ‘시민들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국민의 모범’으로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이순신 현창(顯彰) 사업을 벌였다. 이 사업은 2016년 현재까지도 정부 주도로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력으로 환산한 이순신의 탄생일인 4월28일, 현충사 현장에서 거행되는 ‘탄신 다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충무공 혹은 현충사가 갖는 국가 추모시설로서의 위상은 이 행사를 집도하는 최고 제관(祭官)의 면모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 시대의 최고 제관은 박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박정희는 반드시 이 행사에 참여했다.

▲ 이순신 종가 "현충사

하지만 현충사는 1966년 성역화작업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17만여 평의 현충사가 정작 충무공보다는 박 전 대통령을 드러내는 용도로 쓰였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이런 전통은 문민정부 시대에 접어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영삼을 마지막으로 대통령들은 한동안 현충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순신을 기린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록 최고 제관 자리에서 대통령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이순신의 탄신 다례식에는 국무총리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해 헌작(獻爵)과 헌화(獻花)를 한다.

김영삼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현충사를 멀리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명박을 제외한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공통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국가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국민’을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매력적인 존재다. 그러나 현충사에는 박정희의 향이 너무도 짙게 남아 있다. 1995년을 끝으로 대통령 발길이 뚝 끊긴 현충사에 지난 3월 현직 대통령이 다시 나타났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다. 현충사가 단순히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을까?

▲ ⓒ청와대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충사 사당에서 거행된 이순신 장군 ‘탄신 다례식’에서 분향하고 있다(1977년).

충무공의 '명량대첩 승전 420주 년'을 맞은 올해 이순신 종가는 방치된 숙종 현판을 다시 원상 복구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13일 밝혔다. 현재 난중일기 원본은 현충사 내 박물관에 소장돼 전시 중이지만 종부 소유의 물품으로 언제든 전시를 철회할 수 있는 상황이다.이는 한편으로, 이순신과 현충사에 짙게 드리운 ‘국민’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할 책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면 언제나 이순신과 현충사가 호명되곤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사심이 없는 삶을 산 절대의 충신, 국민의 이상으로 그려진다. 이런 이순신에게 시민들은 환호한다.

지난 2005년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조차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같은 곳"이라 발언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거센 항의로 유 전 청장이 공식사과하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당국에서조차 현충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국민’ ‘국가’라는 집합명사와 추상명사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 더 나아가 요즘 각광받는 가치인 정의를 질식하게 만드는 독소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국민 혹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압과 폭력이 자행되었던가? 그 질식의 굴레에서 이순신과 현충사를 구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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